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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또 하나의 전쟁

[책의 차례로], [4장으로]

사진을 눌러주세요! [바로 아는 성]으로'아무래도 그만 둬야 할까봐.' 민영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덜터덜 걸었다. 집에 가서 무조건 드러눕고만 싶었다. 집으로 향한 큰길이 사막처럼 답답하고 무더웠다. 민영은 자신의 몸뚱아리가 점점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뜨거운 대지는 마치 늪처럼 자신을 빨아들여 영영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할 것만 같았다. 어제 민영은 회식자리에서 남자들의 안주거리가 되었다. "송민영 씨, 노래 좀 해봐. 저래뵈도 귀염성이 있는 아가씹니다, 과장님." 과장이 함께 한 전체 과 회식자리에서 최 대리는 벌개진 얼굴로 마구 지껄여 댔다. "아, 뭘 해요? 여기 과장님께 술좀 따라 드리고 그래야지, 무슨 여자가 이렇게 뻣뻣해?" 최 대리는 송과장 옆으로 민영을 강제로 갖다 앉히려고 했다. 민영은 벌떡 일어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술자리를 나와 버렸다,. 도저히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술집 작부인가?' 민영은 노여움에 몸을 떨며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생각 같아선 당장 사표를 내고 싶었지만, '어쨌든 난 일하러 가야 한다'고 당차게 마음을 먹고 새벽바람부터 서둘러 출근을 했다.

그런데 과장은 오전회의 후 다짜고짜 민영을 불러세웠다. 그는 지난달에 있었던 대리점 사원 연수에 관해 민영이가 제출한 보고서를 내밀면서 공연한 트집을 잡았다. "이걸 보고서라고 쓴 거야? 보고서 한두번 써봐?" 민영은 반질반질하게 윤이 흐르는 바닥을 내려다 보며 대꾸했다. "그건 미스터 한이 작성한 51차 연수 보고서 모델을 보고 작성한 건데요. 그 보고서가 모범적이라고 지난번에 과장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또 말대꾸야. 다시 하라면 다시 해. 미스 송은 머리 좋은 사람이잖아." 민영은 돌려받은 보고서를 들쳐보았다. '더 어떻게 뭘 고치란 말인가. 이건 순 트집이다.' 민영은 보고서를 받아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과 직원들이 모두 민영을 보고 '저럴 주 알았어' 라고 순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다. 얼마나 설레이며 기다렸던, 기대에 차서 힘차게 달려갔던 직장이었던가. 대졸여성들의 취업문이 좋아졌다는 등 차별이 심하다는 등 들리는 얘기가 많았지만 민영은 자신이 있었다. 아니, 그런 얘기는 자식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실력만 있으면 됐지 무슨 상관이람.' 그건 다 자신이 없고 실력이 딸리니까, 또는 공연한 트집을 잡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핑계에 불과한 이야기들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처럼 취직이 잘 되지 않았다. 면접가지 가면 다행이었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곳은 아예 여직원을 채용하지도 않았고 어쩌다 입사원서를 내면 대개 서류전형에서 탈락해 버렸다. '이류대학이어서 그런가 보다.' 성적이 좋은 편이어서 성적표를 중심으로 제출하는 서류전형에서 미끌어진다는 게 몹시 속상해진 민영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면접까지 간 몇몇 직장은 민영이 스스로가 툇자를 놓은 적도 있었다.

능력은 둘째치고 옷매무새며 생김새를 더 많이 보는 것같아 기분이 상했다. 면접시험을 보려 가기 전에 화장하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쓰는 일이 어색하고 불만스럽기까지 했다. '일하는 사람을 구하는 건지, 미인대회를 여는 건지 모르겠어. 기분나빠.' 학교 밖의 세상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냉정하고 낯설었다. 농담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한 오빠와 민영은 심하게 말다툼을 하기까지 했다. "계집애가 드세서..... 넌 그러다간 오래 못 버틸 거다." 민영은 그런 식으로 자신을 업신여기는 오빠와 절교를 선언했고 오빠를 경멸했다. 입사 첫날, 상무이사라는 사람은 아버지같은 미소를 띄며 너그럽게 말했다. "우리 회사는 남녀평등이요. 여자라도 실력 있고 능력만 있으면 인정하는 게 회사 방침이요. 분투하길 바라오." 그러나 상무이사의 호언은 민영에겐 한낱 물거품 같은 말장난에 불과했다. 입사하자마자 민영은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미스 송' 이라고 부르는 게 역겹고 싫었다. 처음 며칠은 엉겹결에 지나갔지만, 그 후로 민영은 '미스 송' 이라는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봐요 미스송! 왜 부르는데 대답을 안하는 거요?" 입사하던 날부터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던 최 대리였다. "전 미스송입니다. '미스송' 이라고 부르면 대답하지 않겠어요." 신입사원, 그것도 여직원의 이 당돌한 대답은 회사에서 한참이나 애깃거리가 되었지만 민영이로선 사람들의 눈총이 편한것만은 아니였다. 최 대리는 어디 두고 보자는 마음이었는지 민영을 냉랭하게 대했다.

"거 너무 딱딱하게 하지 마쇼. 얼마 다니지도 않을 직장 부드럽게 지냅시다." 남자직원들의 충고 같은 말들은 민영을 은근히 비웃고 있었다. 민영은 코웃음을 쳤다. '결혼 때문에 직장을 그만 둘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을 걸요.' 그러나 민영은 그 생각이 실현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안되는 여직원들조차도 민영을 별종처럼 여겼다. 남자직원들 사이에서 민영은 힘들고 까다로운 여자로 찍히게 되었다. "오빠같은 사람한테 그 무슨 말대꾸나, 말도 잘 안듣고." "아니 무슨 여자가 이렇게 드세고 감정적입니까?" 민영은 그런 비난 속에서 외롭게 스스로와의 싸움을 하고 또 했다. 그러나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업무상의 비협조 때문에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급기야 과장에게 불려가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송민영 씨. 이렇게 업무처리할 거면 집에 가서 시집갈 준비나 해." 그런데다가 얼마 뒤부터 최 대리는 음흉한 미소를 띠면서 "이봐, 미스터 김, 미스 송이 날씬해 진 거 같지 않아? 엉덩이도 통통해지고 어때?" "이봐, 미스터 리, 거 미스 송 한테 좀 잘해 주라구. 미스 송은 우리 사무실의 꽃 아냐, 꽃이 시들면 사무실 분위기가 영 잡치는 거니깐, 미스 송 얼굴이 수척해지지 않게 잘해 줘. 알았지?" "여 - 미스 송 몰라보게 예뻐졌어. 어제 근사한 남자랑 놀았나 보지? 미스터 한, 안 그래?" 그건 치사한 폭력이었다. 민영은 때로는 화를 내고, 때로는 못들은 척하고, 또 때로는 변죽을 맞춰 주었다. "그래요? 맘에 드시다니 기쁘네요.

" " 그럼요 날씬해져야죠. 그래야 좋은 데 시집가지요." 생각지도 않았던 상황이었다. 현실이 원망스럽고 억울했다. '내가 뭐가 부족해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나?' '남부럽지 않게 대학까지 나왔다. 우수한 학생이라고, 모범적인 사람이라고 창찬들으며 지냈는데 왜? 도대체 내가 왜?' '그만두자. 그만두고 보기 싫은 것들, 기가 막혀서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것들과 깨끗이 결별하자.' 그러나 억울하고 분한 생각은 오기를 발동시켰고, 오기하나로 버티고 또 버텼다. 물론 남자 직원들이 모두 그런 식으로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만히 있거나 또는 따라서 웃음으로 분위기에 동조하였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여자직원의 태도였다. 어떤 때는 한술 더 떠서 민영을 놀려댔다. 말끝마다 '무슨 여자가'를 갖다 붙였다. "야, 야, 그만둬라. 맨날 그놈의 회사만 갔다 오믄 눈물을 짜고 그러니 사람이 생병 나겄다." 어머니는 저녁도 안 먹겠다며 드러누운 민영은 곁에 앉아서 걱정어린 참견을 하였다. 어머니는 민영이 지장에 다니는 걸 탐탁치 않아 했다. "그래봤자 돈을 멀겠냐, 당상이 되겠냐? 공연히 몸만 나빠지고 못된 것을 배우게 되지. 그저 얌전히 있다가 좋은 혼처 나서면 시집이나 가거라." 이건 어머니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민영은 '그러러면 뭐하러 대학을 보냈냐, 아깝지 않느냐'고 응수했다. "이 철없는 것. 요즘엔 왠만한 혼처라면 다 대학 졸업한 신부를 원하는 걸 아직도 모르느냐?" 어머닌 혀를 끌끌 차셨다.

"여자가 나다니면 험한 일을 다하게 되어 있어. 요즘 세상, 여자들 업어다 팔아먹는 세상인데 자신들이 몸조심을 해야 하는 법니다." 어머니가 민영의 이마를 짚어주려고 손을 뻗으려 하자 민영은 돌아누으면서 얇은 홑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이것이 안하던 짓을 하는구나. 직장 당장 때려쳐라. 못된 것만 배우는구나, 점점." 어머닌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여식이 옹졸하고 못나보여 송곳같은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민영은 천정을 바라보고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천정이 점점 멀어지고 몸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어지러웠다. '더 이상 내가 버틸 힘도, 의욕도 없다.' 민영은 울었다. 억울한 심정은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되어 솟아올랐다. 민영은 밤새 사직서를 써다가 버리고 또 썼다가 버렸다. 사직서는 최후의 항의와 부정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패배자의 몫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지만, 이것이 지금 민영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희뿌옇게 동이 터올 무렵, 민영은 가까스로 '사직서'라고 봉투 겉장에 글을 써 넣었다.

#########세번째 이야기-성차별과 성폭력에 대하여

사원모집과 채용시에 특정 직종에 남성만을 모집하거나 여성에게 까다로운 조건을 붙이는 것, 합리적인 이유 없이 남녀 임금체계를 분리해 차별대우를 하는 것, 교육 . 배치 및 승진에 차별을 두는 것, 결혼 . 임신을 이유로 한 퇴직 등 정년. 퇴직. 해고시에 여성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 등을 여성에 대한 처별적 고용관행들 입니다. 이를 규제하기 위한 법률로서 ' 남녀고용평등법'이 지난 88년에 제정되었습니다. 법이 가지고 있는 실질적 효력의 미흡으로 인하여 차별적 고용관행이 획기적으로 변화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이제 여성들은 법에 보장된 자신의 권리를 획득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들은 남녀 노동자를 분할하고 차별함으로써 이득을 얻으려는 자본가들에게는 실로 큰 위협이 되며, 전체 노동자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데에도 한 몫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 발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적 모습의 또 한편에서는 직장내 성폭행이 상습적으로 저질러지고 있으며,. 이는 그 정도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고, 또 교묘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법이나 제도적으로는 성차별을 방지하는 것 같아도 본질상 성차별이 해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엄연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직장내 성폭행은 강간뿐만 아니라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저질러지는 성적 희롱이나 괴롭힘 등을 통칭하는 개념입니다. 승진이나 해고 등을 거래, 또는 협박의 조건으로 하여 은근히 압력을 넣어 오는 모든 행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집요한 눈길, 음담패설이나 우연을 가장한 접촉도 강간까지 가지 않아도 강간을 가능케 하는, 또 그것을 원하는 행위들인 것입니다.

직장내 성폭행은 결과적으로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위축시킵니다. 민영이처럼 대개의 여성들은 성적인 폭력을 당하면 직장을 그만두게 됩니다. 이처럼 여성이 사회적 활동에 소극적으로 되면 자신에 대한 사회적인 차별대우에 자각적으로 대응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이는 전체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런데도 직장내 성폭행은 그것이 개별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데다가 여성들이 자신이 당한 일을 폭로하기를 꺼리는 등의 특수한 조건 때문에 쉽사리 고쳐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런 조건을 이용하여 여성들에 대한 차별적인 억압을 강화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88년 구로공단의 어느 여성을 사업장에서는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농성중인 여성노동자들 앞에서 남자 관리자가 옷을 홀랑 벗고 나체시위를 했습니다. 어린 여공들의 수침심을 악용하여 더러운 짓을 한 것입니다. 결국 농성은 해산되었습니다. 구사대가 여성노등자등에게 성적인 희롱과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다반사입니다. 의사와 간호원 사이에, 상사와 부하 여직원 사이에, 교사와 교사간에 성폭행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제는 직장뿐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어린 소녀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는 그 수법도 점점 잔인해지고 있습니다.

#최다 출연 기사 ; 성범죄

한 해동안 신문에 난 사건 기사들 중에서 가장 많이 실렸던 사건을 말하라면 틀림없이 성범죄에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법무부의 『범죄백서』에 따르면 88년에 일어난 강강피해 고발 건수가 4,658건, 89년 5,102건이고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상담사례는 91년 6개월 동안 985건이었습니다. 여성의 전화나 다른 상담기관에 고발, 접수된 상담사례와 신고되지 않은 것까지 합친다면 실제 일어나는 성범죄는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91년 12월 1일부터 20일까지 신문에 난 사건만 대략 짚어 보아도, 경찰관을 사칭 여관을 검문한다며 투숙하고 있는 여자손님에게 성폭행한 사건, 다섯 살된 정박아를 성폭행했다는 끔찍한 보도, 10대소녀를 윤간한 오토바이 폭주족 일곱 명의 사건, 10대 여학생 열다섯 명을 납치, 유인해서 성폭행하고 감금시켜 놓고 여관투숙객을 상대로 윤락행위를 강요했다는 세 명의 청년들, 열두살 난 의붓딸을 백여 차례나 성폭행한 30대의 젊은 아버지,. 엽기적인 화성 연쇄 살인사건과 비슷한 수법으로 성폭행하고 살인당했다는 광명시의 열두 살 소녀, 동거하던 애인을 성폭행하고 윤락가에 팔아넘긴 남자의 이야기, 차량 데이트족만 골라 상습적으로 금품을 빼앗고 여자를 성폭행해 온 20대 네 명과 고교생 세명등 한패거리인 일곱 명의 사나이(?)들, 유흥비를 마련하려고 아파트 승강기에서 부녀자를 위협, 욕을 보이고 금품을 빼앗은 어떤 군인, 경찰 순찰차를 훔쳐 여고생을 납치하려다 잡힌 사람, 그리고 1년전에 열 살 미만의 여자아이들만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미군 사병 일곱 명의 7년 구형을 받았다는 소식 등. 참담하고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오는 그런 보도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산 속에서, 여관이나 술집에서, 차 속에서. 다리 밑에서, 그리고 안방에서까지 차마 인간으로서 그럴 수가 있을까 싶은 죄악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오빠가, 친구가, 그리고 시의원이, 경찰과 군인이, 그리고 미군들이. 딸을 마중나간 어머니로부터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까지도 유린하고 부수고 있습니다. 이게 과연 '선진조국 대한민국'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입니까! 나라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몇 년이 지나도 악몽이 잊혀지지 않아 입원하고 투신하는 이땅의 딸들, 성적을 유린당할 뿐 아니라 죽임까지 당하거나, 억울하게 죽어가야만 했던 숱한 영혼들을 무엇으로, 어떻게 달래야합니까? 그런데도, 짐승을 죽였을 뿐이라는 김부남 씨에게 검찰은 유죄판결은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구조화된 성폭력

학자들은 이같은 성범죄 . 성폭력이 성충동이 강한 10대나 성도착자들이 저지르는 단순 사건이 아니며, 또 산업화에 따르는 필요악이 아니라고 입을 모아 말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현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요? 첫번째로 그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폭력문화에 기인합니다. 폭력문화의 시원지는 정치권력의 폭력성입니다. 선거제도라는 형식을 통해 창출된 정권이라고해도 그것 역시 금권과 공권력의 억압속에서 태어난 이상 본질적으로는 폭력적입니다. 88년의 구로구청 사건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13대 국회에서 여당이 여러 번 보여준 구국적인(?) 날치기식 법안 통과 행태는 더 이상 이 정권이 민주적이지도, 평화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아니, 사실상 현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민중들에게는 계속해서 일관되게 폭력적이었습니다. 정권의 푹력성과 관련해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제국주의에 의한 성침탈입니다.

앞에서도 미군에 의해 10대 소녀들이 유린당한 기사를 예시했지만, 요즘 한창 국제적,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정신대 문제라든가 해방 직후 미군정에 의해 저질러진 성범죄들은 성폭력의 근원과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둘째, 성범죄는 성의 상품화가 본격적이고 전면적으로 이루어 졌다는 사회경제적 조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성상품화는 광고의 선정성 문제로 주로 표출되었습니다만, 이제는 아예 여성들을 그 자체로서 사고 파는 상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차 한 대만 끌고 나가면 몇 백만 원은 금세 벌수 있는데.....하는 유혹을 가끔씩 받습니다. 길거리의 젊은 여자가 다 상품이니까요." 이 말은 5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과거의 어떤 인신매매범이 일간신문을 통해 고백한 말입니다. 지난 2 ~ 3년동안 인신매매라는 '신종 상업'이 이 땅을 공표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습니다. 숱한 여성들이 술집과 윤락가로 팔아 넘겨졌습니다. 외국으로까지 팔린 사람도 많습니다. 딸은 잃고, 아내를 잃은 가족들이 『실종자가족협의회』를 결성해서 조직적으로 움직일 정도로 인신매매는 심각한 사회문제롤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여성이 상품으로 그렇게나 많이 팔렸다는 것은 그 상품을 필요로 한 사림이나 산업이 많았다는 얘긴데, 그것은 즉 향락산업이 번창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서비스 산업의 비대화, 향락산업의 번창은 우리 경제가 기형적이고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 역시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강요되었던 우리 경제의 파행적 구조와 직접적 연관이 있습니다.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 자본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국내 산업의 구조조정은 기본적으로 국내 농업의 희생을 담보로, 노동자에 대한 가혹한 수탈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왔고, 이에편숭한 매판적 자본가들은 견실한 기업운영보다는 투기성, 자본운영을 통해 일확천금을 거두는 비생산적 경영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행락산업이 급격히 팽창하였으며, 여기에 여성은 기가 막히게 이윤이 남는 상품이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에 대한 찰나적 쾌락의 만연과 그것을 조장하는 퇴폐적 성문화의 영향입니다.

오락놀이 중에 여자의 옷을 벗기거나 남녀의 성행위를 묘사하는 포르노성 선정적 음란물이 청소년등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수입된 '땅따먹기', '체리마스터', ' 헥사' 등의 오락 프로그램은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여 성범죄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는데도 당국은 이를 방치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스포츠 신문과 그에 딸려 나오는 만화부록, 외국에서 비싼 가격으로 사들여 국민들을 섹스의 노예가 되게 하는 음란 비디오와 영화들, 각종 선정적인 광고 포스터, TV의 쇼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가수들의 야한 옷차림과 몸짓 등, 이 땅에는 성적 충동을 일으키는 온갖 퇴폐적 환경으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이들 세 요인은 개인주의와 가족 이기주의가 빚어내는 무관심, 여전히 뿌리깊은 여성에 대한 봉건적 비하의식, 그리고 여성 스스로의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태도 등과 어우러져 심각하고도 끔찍스러운 성범죄를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이제 그만, 제발 그만!

그런데도 정부는 범죄와 전쟁을 선포하기만 했지, 그래서 엉뚱한 곳에다 총을 쏘아댔을 뿐, 이같은 패륜적인 성범죄에 대해선 속수무책인 상태입니다. 어쩌면 국민들이 감각적이고 순간적인 성적 쾌락에 탐닉하고, 폭력에 이골이 나서 익숙해지기를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포르노나 다름없는 영화 및 비디오, 잡지, 신문, 오락 프로그램 등을 그대로 놔둘 수가 있습니까? 진실로 국민의 건전한 정서를 함양시키고 밝고 명랑한 사회를 만들려고 한다면 말입니다. 혹시 정략적 차원에서 퇴폐적 성문화를 통해 우민화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닐까요. 아니라면 여성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대로, 총리 관할하에 『성폭력대책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실제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기구는 성폭행, 성범죄의 요인이 되는 제반 사항에 대하여 구체적이고 전면적인 대응을 수행해야만 하고,『실종자가족협의회』와 같은 단체도 적극 지원해야 합니다. 또한 김부남 씨와 같이 억울한 희생을 당한 여성들에 대해 획기적인 사면, 구제 조치를 단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성들은 남자들을 문제의 원인으로 규정하지 않도록, 오히려 어리석게도 그런 환경의 노예가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여자 행실이 오죽했으며 그런 일을 당했을까',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여자들은 은근히 강간당하기를 바란다.' '여자가 끝까지 반항하면 강간은 불가능하다.', '내 가족에겐 일어나지 않는다', '저런 일을 폭로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나'는 등의 고루한, 이기적인 편견에서 자신이 누구보다 먼저 해방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편견을 가진 다른 사람을 설둑, 교정시킬 수 있을 게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회의 민주화 없이는, 또 외세로부터의 간섭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성폭력과 같은 범죄적 현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직시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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