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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일상이 되는 성
[책의 차례로], [8장으로]

"아 - 함. 이리 피곤한지 모르겠어." 현숙은 허리를 펴고 팔을 등 뒤로 쭉 뻗었다. "언니 시집가더니 재미가 좋은가봐." 옆에 않은 미스 최가 징그럽게 웃었다. "재미는 무슨....." 현숙은 겸연쩍었다. 어렵사리 결혼식을 하고 신접살림을 시작한지 달포가 넘었다. 살림이래야 친정살림에 비하면 소꿉장난같은 것인데도 이찌나 피곤하고 신경이 쓰이는지 그저 오전 11시쯤되면 졸음이 쏟아져 내렸다. 어머니가 안 계시다는 것이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형부가 너무 잘해 주나봐. 언니, 형부더러 조금만 못해 주라고 해요. 내가 그러더라고." "이 노처녀가, 흉물스럽긴...."결혼생활은 바쁘고 힘들었다. 게다가 태식의 요구까지 있던 날 다음에는 더 피곤한 게 사실이었다.

"나 오늘은 내버려 둬. 오늘 회사에서 놀림당했어." 현숙은 퇴근하자마자 자신을 껴안으려는 태식의 가슴을 밀어내었다. "내가 뭘 어쨌는데?" 태식은 현숙의 선포를 능청스럽게 맞받았다. 태식은 결혼 후 유난히 현숙을 탐했다. 밤마다 좀체로 현숙을 가만 놔두지를 않았으니까. 현숙은 그러는 태식이가 밉지 않았고 또 응하지 않으면 태식이에게 실망을 줄까봐 늘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현숙은 그것이 별로 재미가 없었다. 연애시절에는 은밀하고 비밀스러워 안타깝고 불안했고 그래서 애틋했는데 결혼하고 나니 영 시시한데다가 태식이가 너무 노골적으로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 밉살스러운 때도 있을 정도였다. 현숙은 태식이가 좋아하므로, 태식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이 기뻐서, 사실 때론 귀찮기도 하고 때론 짜증이 났지만 요구에 응해 주었다. 현숙으로서는 태식이와의 따뜻한 포옹이나 부드러운 대화, 간단한 애무로도 만족스러웠고 편안했다. 그렇지만 태식은 그것으로 만족해 하지 않았다. 그리고 현숙이가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진짜야. 나 오늘은 접근금지야. 태식씨 먼저자. 나 이것 좀 보다 잘게." 현숙은 잠자리를 펴면서 또 한 번 강조했다. 태식은 옆에 누워서 보라고 유혹했다. "안 건드릴게." "싫어." '오늘은 강하게 나가야지 흔들리지 말고.' 현숙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럼 나 잠들 때까지만 옆에 누워 있어줘." "안돼!" "그래, 좋아! 알았어."태식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현숙은 태식이 꼭 어린애같이 느껴졌다. 태식의 회사의 동료나 선배사원들은 갓 결혼한 햇병아리 신랑을 놀려먹는 것이 일과 중 하나처럼 되어 버렸다. 태식은 처음엔 얼떨하고 기분도 상했지만 크게 신겨쓰지 않고 웃어넘기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논리나 입장이 그럴듯해 보이가 시작했다. "신혼 초에 화끈하게 해 주라구. 야 이제보니 미스터 남, 쑥맥이로구먼. 나한테 한 수 배워야겠어." "나이들어 후회하지 말고 젊고 한창일 때 재미를 봐야지." 그들이 말하는 남성의 성은 강하고 박력있는 것이어야만 했다. 태식은 자신의 성적인 능력이 어떤지 대해 비로소 궁금해졌다. 오르가즘이나 여성의 성적 반응 등에 대해서도 새삼 궁금한 것들이 많았다. 현숙을 상대로 그 온갖 궁금증을 풀어볼 수 있다는 게 자못 신기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였다. 그러나 늦게 배운 도둑질이 밤새는 줄 모른다더니, 그 재미와 흥분이 부끄러움과 쑥스러움을 눌러버렸다. "난 하나도 재미가 없어. 이건 좀 문제 아니니?" 민영은 현숙의 하소연이 재미있기도 하고, 어이없기고 했다. "아니, 그렇게 연애를 하고도 그런 고민을 다 하니?" "글세, 결혼을 하고 나니까 감정이 안 생겨. 어떨 때는 내가 아닌 것 같애. 그런 느낌이 들면, 마치 내가 매춘부가 된 것 같아서 슬퍼지기까지 한다구." "싫다고 해, 싫으면." 민영은 명쾌하고 간단했다. "글세 그게 잘 안되더란 말이지. 공연히 그 사람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 같아서 말야." "야, 난 도저히 모르겠다. 너무 어렵다. 그거." 민영은 하하 웃으면 도리질을 했다. "내가 그래서 오늘은 잡지책을 다 훔쳐보지 않았겠니? 그랬더니 뭐라더라, 응. 좋은 척 해주라는 거야. 미소를 짓고, 이마를 짚어주고, 부끄러운 듯 몸짓을 하라는 거야." 현숙은 잡지핵에서 얻은 지식을 열심히 소개하다가 갑자기 풀이 죽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민영은 현숙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게 별거니? 밥 먹고 싶지 않으면 안 먹듯이, 너 하고 싶지 않으면 안하면 그만이지 그게 다 무슨 얼어죽을 얘기냐? 간지럽다, 간지러워." 현숙은 민영의 이야기가 옳다고 생각했지만 잡지책의 조언대로 한 번 해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도 솟아올랐다. '태식은 어제 일로 기분이 언짢은지 오늘 아침엔 별로 웃지도 않았는데.' 현숙은 민영과 헤어지는 길로 목욕탕에 들렸다. 마지막 손님으로 겨우 들어가서 대충 샤워만 하고 나왔다. 태식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현숙은 가볍게 화장을 하고 레이스가 많은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오늘밤엔 요부가 되어 볼까?" 현숙은 거울을 보고 빙긋 웃었다. 좀더 오래 묵혀서 꺼내 먹어야 할 매실주 병을 식탁 위로 가져 왔다. 안주도 몇 가지 준비하고 장식용 양초도 꺼내 놓았다. 오늘밤엔 현숙이가 태식을 꼬셔볼 작정이었다. 그렇게 해 놓으니까 왠지 흥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10시, 11시. 자정이 다 되도록 태식을 돌아오지 않았다. "손가락이 부러졌나? 전화도 못한담?" 현숙은 이부자리 위에 오두마니 않아 점점 커지는 시계소리를 따라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너무 성관계에만 집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 둘다' 현숙은 정신이 퍼뜩 드는 느낌어었다. '그렇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서로가 사는 모습은 어떤지, 직장생활에서 느끼는 고충은 무엇인지, 그런 얘기를 연애시절보다 너무 못하고 있다. '이러면 안되는데....' 현숙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 시계소리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들렸다. 똑. 똑. 똑........시침소리에 맞추어 현숙의 인생이 과거로 뚝뚝 잘려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현숙은 짙은 술냄새를 느껴 선잠에서 와닥닥 깨었다. "우리 색시야아 - ." 태식은 고주망태가 되어 현숙을 덮치려는 찰나였다. 현숙은 엉겹결에 옆으로 빠져나오고 태식을 그대로 이부자리 위에 쓰러졌다.

시계가 두 번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와오. 이 술냄새. 어딜 갔다 이제 오는 거야, 아휴." 현숙은 낭패감을 느끼며 태식의 엉덩이를 힘껏 내리쳤다. "오늘 기분좋게 한잔했다. 왜? 3차 가자는 걸 이쁜 내 색시 생각나서 안 갔는데 왜, 불만있어?" 태식은 말도 잘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해 있었다. 취중에도 허우적거리며 현숙을 끌어안으려고 했다. "정말 못 봐주겠네." 현숙은 골이 나서 볼멘 소리를 했다. 태식은 여전히 현숙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그냥 자. 나 진짜 싫어." 현숙은 일어서 버렸다. 태식은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이내 코까지 골면서 잠이 들었다. "내가 정말 못 발려. 남태식!" 현숙은 태식의 발치에 서서 엉망으로 쓰러져 잠든 태식을 내려다보았다. 식탁 위의 양초며 술병이며 색깔좋은 안주가 모두 낄길거리고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일곱번째 이야기 - 부부관계에서 성의 위치와 의미

#성적 쾌락, 인간만의 특권

인간만의 성욕에 관한 이러저러한 숱한 문제와 이야기들을 만들어 냅니다. 인간의 성욕은 식욕 등과 샅은 생물학적 . 본능적 욕구이며, 그것이 채워질 때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음식을 다 먹은 뒤에 느끼는 포만감도 이같은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음식을 다 먹은 뒤에 느끼는 포만감도 이같은 쾌감, 만족감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적 쾌감은 보거나 듣는 것과 같이 직접 접촉하지 않아도 생깁니다만 직접적인 접촉이나 성교시에 훨씬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인간은 보다 우수한 자손을 낳기 위해서, 또 해당 사회의 경제적 생산관계를 고려하여 혼인형태를 변화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들은 성관계에서 쾌락과 기쁨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보다 풍부하게 발전시켰습니다. 따라서 이 쾌락은 남녀 사이의 성관계를 인간적 교감과 유대를 확대시켜 주는 수단이며, 남녀사이의 인간적 교감과 유대가 전면적이고 총체적일수록 쾌감을 더 강하고 싶은 것이 됩니다. 인간이 자신의 문제를 보다 깊이 성찰할 수 있게 되면서 이 성적 쾌락에 관한 관심도 비약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흔히 외설적이거나 흥미위주의 잡지에서 왜곡되게 취급당하는 오르가즘 이론은 이러한 배경에서 인간만이 이룩할 수 있었던 과학적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욕에 따른 성적 만족이나 쾌락 등은 그 자체로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나아가 풍부하고 다양해질수록 인간의 생활과 문화를 풍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은밀하고, 공공연한 신화들

결혼이 남녀 사이의 성관계를 공식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나면 부부 사이에서 성을 아주 일상적인, 생활의 일부분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그에 관한 이야기들은 마치 어떻게 요리를 해보니 맛있더라, 어떤 천으로 커텐을 해 놓으니 분위기가 살더라는 이야기들처럼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갑니다. 은밀히, 그러나 공공연하게 말이죠. 그런데 그러한 이야기들 중에는 사실과 다른 뿐아니라 사람들을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게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신화처럼 믿을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데도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이같은 신화들은 성이 인간적 기쁨과 풍부한 만족을 주는 것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현실을 대변해 줍니다.

<여자들의 신화>

1. 나는 불감증인가봐.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어. 그냥 아내로서의 책임감, 의무감으로 대해 왔는데. 이러면 문제가 있는 거라며?

2. 좋은 척하는 것두 매너 아니겠니? 아 한 30분 정도만 참고있으면 되잖아. 적당히 기분좋게 해주라고. 그까짓거 어렵게 생각하는건 결벽증증세라고 봐.

3. 성적인 만족이 부부관계를 원만하게 만드는 핵심사항이라구. 오르가즘을 매번 느낌으로서 생활에 활력을 주는 거지. 그건 자꾸 개발해야 돼. 고정관념을 버리는 게 제일 중요해. 밤에야 요부가 되면 어때? 남편 바람 안 피우고 좋지.

4. 남편이 정숙하지 못하다고 할까 봐 난 늘 소극적이야. 그런 재미를 밝히는 건 거리의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해. 그런데도 뭔가 늘 허전하거든. 혼자 자위를 하기도 해. 내가 좀 기질이 있는 걸까?

<남자들의 신화>

1. 여자들이란 남자들이 길들이기에 따라서 성정으로 성숙하는 법. 마치 새로 산 물건을 길들이듯이 처음부터 주도권을 쥐고 리드해 나가야지.

2.횟수, 강도, 이런 것들이 남성으러서의 권위를 보장하는 거라구. 계절별로, 나이별로 횟수가 달라지니 잘 알아 두라구. 하여간 혼이 쑥 빠지도록 해줘야 된다니깐. 그래야 대접을 제대로 받는다는 걸 명심해야 돼. 정력유지에 각별히 신경쓰도록!

3. 여자들이 애타게 원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어. 적당하게 무관심한 척하는 거지. 그래서 우리들의 존재가 여자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정확히 알게 해줘야 한다구. 이른바 성적으로 군림해야 한다 이거야.



#부부는 성으로 사는가?

성관계는 부부를 혈연적 관계로 맺게 해줍니다. 그리고 일상적인 생활의 한부분으로 자리잡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태도를 갖는 게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앞서 한가지 짚어야 할 것은 왜 이 문제가 이전의 어느 사회에서보다 훨씬 빈번히, 부부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대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 사회는 이전 사회의 가족과는 달이 오로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소비의 단위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가족의 형태에 있어 핵가족이 중심이 되게 하였고, 따라서 부부간의 관계가 가족의 중심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여기에 자본주의 사회가 확산시키는 개인주의 사조는 개개인에 관한(사회적 연관보다는 개체 자체의 문제에 집중하는)분석을 촉발시켰으며, 이에 따라 부부 사이에서의 정서, 사상, 습관, 성과 같은 문제에 관한 관심이 증대된 것입니다. 관심의 증대나 정교한 분석 그 자체는 인간의 삶에 관한 풍부하고 총체적인 해명을 가능케 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므로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정교하고 구체적인 분석의 결과 부부 사이의 성에까지도 상품이 침투하도록 하는, 그야 말로 무엇이든 상품이 되게 하는 자본주의의 목적에 이용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침대, 침구, 속옷이나 부드럽고 유혹적인 잠옷, 각종 정력제가 그런 상품들이 아닙니까? 여성들을 주 대상으로 하는 잡지들은 이같은 상품을 선전해주는 강력한 수단입니다. 이 상품선전의 선정적인 표현은 그렇게도 사회적 지탄을 많이 받았는데도 전혀 끄떡없이 계속 실리고 있습니다. 또 하나, 부부가 혈연적으로 굳게 맺어진다는 것은 가족을 형성하여 대를 이음으로써 인류문화의 창달과 번영을 가능케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인데, 이 본래의 목적이나 부부관계의 본질이 변질되어 간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숱한 질문들, 신화들이 도대체 궁극적으로 무엇에 답하고 있는 것인가요? 오직 쾌락, 오직 감각적이고 찰나적인 희열. 그뿐입니다. 그 사상의 뿌리는 개인주의요, 개인주의는 가족 이기주의를 만들어냅니다. 성관계를 중심에 두는 부부관계는 가족 이기주의를 필연적으로 발생시킵니다. 인간의 과학으로까지 발전시켜낸 성에 관한 이야기들은 사람 사이의 교감을, 서로간의 이해와 연대를 보다 풍부하게 하는 데 복무시켜야 합니다. 따라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부부의 성생활은 성에 매이고 지배되지 않고, 그것을 그저 자연스러운 애정의 표현으로, 생활의 한 작은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일 때 가능해질 것입니다.

#이인모, 김순임 부부를 생각하며

41년간 남과 북으로 갈라져 살아온 부부의 눈물겨운 사연을 부부관계의 중심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게 해줍니다. 6.25때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 붙잡혀 34년간 옥살이를 하고 88년에 풀려난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씨(73세)는 북에 두고온 아내 김순임 씨(64세)가 보내온 편지를 받았습니다.

"여보, 현옥 아버지! 40년 세월 마음 속으로만 불러 보며 생가를 알길 없어 애태워 오던 당신이 남녘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게 될 줄이야. 리별의 그날로부터 어언 세월이 흘러 어제날의 23살 꽃나이 청춘이 64살의 노파가 된 한 여인이 남편을 소리쳐 부르며 흘린 눈물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연과 고뇌가 깃들어 있는지 당신을 리해하실 겁니다...... 며느리를 친딸처럼 아껴주신 어머님은..... 당신을 다시 못 보고 세상을 떠났어요. 이 며느리의 무릎 우에서 숨을 거두면서 어머님은 '우리 아들은 언제든지 꼭 돌아온다'는 말을 남겼답니다....... 현옥 아버지, 통일의 그날 사람들은 40여년간 헤어졌다가 꿈처럼 만나는 우리들의 상봉을 축하하여 '통일 부부'라고 부르겠대요. 그때가 오면 흘러간 인생의 좋은 시절을 되찾은 심정으로 말년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자요."

1991년 9월 평양에서

당신을 한시도 잊은 적 없는 아내 김순임 올림

현옥 어버지께 쓰는 사십 년 편지

도종환

여보, 현옥 아버지 당신이 살아 계신다는데

순임이가 이슬이라면 늘 눈에 넣고 다니겠다고

송도원 바닷가를 거닐며 말하던 당신의 아내

순임이도 이렇게 살아 있는데

아, 당신이 살아 계신다는데

여보 나는 당신을 어떻게 만나야 하나요.

식구들 눈에라도 띄울까봐 잠들 밤에 흘러온

사십 여 년 눈물의 그 끝에

당신이 살아계신다는 소식을 철조망 너머에서 들었는데

나는 당신을 만날 수 없어요. 여보

목단강 강바람 속에서 눈보라와 폭격 속에서

당신이 남기고 간 물낡은 솜동복에

죽어가는 현옥이를 싸안고 울다 쓰러지다

그렇게 다시 살아나 목숨을 이어온 사십 년 분단의 세월

조국의 철조망 이쪽과 저쪽에서

우리의 청춘이 백발이 되도록 당신이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 현옥이가 자라서 남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는 동안

우리 아들은 꼭 돌아온다 언제든지 돌아온다

유언을 남기고 유복자 당신을 끝내 못만난 채

어머님마저 돌아가시는 동안 이렇게 기다려 왔는데

철조망은 우리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돌아서 있어요

한평생을 옥방에서 보낸 당신의 몸에 병이 깊어

우리의 생에 이제 몇 날 몇 밤이 남았는지 기약할 수 없는데

남쪽 땅 북쪽 땅이 아니고 휴전선 신갈나무 근처 아무데서라도

사람의 아내 사람의 남편으로 단 몇 시간만이라고

손 한 번 잡아볼 수 있는 시간만이라도

영영 가질 수는 없는 것인가요.

밤이 새도록 한 뜸 두 뜸 손바느질로 지은 바지 저고리 한 벌

따뜻한 옥수수차 한잔 건제줄 수 있는 자리

이 세상에는 없는 것인가요.

끝내 통일부부로 단 하루만이라도 같이 지낼 수 없는 것인가요

삼십 년 사십 년을 기다려 꼿꼿이 앉았다 재처럼 스러지고 마는

그런 부부로 죽어가야 한단 말인가요.

우리가 젊어서 사랑한 조국이

우리의 마지막 목숨이 다하기까지

단 한 번 부부로 다시 만날 수 없게 하는 땅에서 살아야 하나요

여보, 현욱 아버니 사랑하는 현옥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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