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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어머니, 또 하나의 여성
[책의 차례로], [10장으로]

시계는 벌써 오후 네 시를 지나고 있었다. "가긴 가야할텐데....." 현숙은 같은 혼잣말을 벌써 세 번째나 하고도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였다. 다방 종업원은 현숙의 물컵까지 가져갔다. 이제 갈 따가 되지 않았느냐는 의미였다. 현숙은 두 시간이나 넘게 죽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설 전날이라 그런지 손님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현숙이처럼 혼자 오두마니 앉아 있는 여자 손님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다들 왔다간 바삐 서둘러 나가곤 했다. 오늘은 늦게 갈 핑계도 궁색한 일요일이다. 평일 같으면야 직장 때문에 늦는다는 전화라도 할 수 있지만, 오늘은 그런 얘기가 통할 수 없었다. 태식이라도 함께 갈 수 있다면 이렇게까지 주저하지는 않으리라 싶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태식은 지방 출장중이었다. 밤중이나 내일 새벽에 곧장 시댁으로 온다는 전화가 걸려왔었다.

"힘들더라도 좀 일찍 가, 응?" 태식은 어렵게 부탁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휴 -.어쩔 수 없다. 이런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현숙은 배에 힘을 주고 벌떡 일어섰다. 자신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님 때문에 태식은 단식투쟁까지 했었다. 시집살이 맵다는 것은 옛날 예기인 줄만 알았던 현숙은 시댁에 갈 적마다 울음을 삼켰다. 그런 멸시와 소외를 경험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그런 일이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자신들의 결혼을 반대한 태식의 어머니일지라도 말이다. 뿐만 아니라 대가족인 시댁의 부엌일은 엄청나게 많았다. 시조부 제사가 결혼 후 석달만에 있었고, 그때 현숙은 일이 譻난 새벽에 태식이가 잠든 머리맡에 앉아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우선 부엌일이 허리가 훨 정도로 힘들었고, 내가 이 결혼을 왜 했나 싶은 심정 때문이었다. "늦었습니다."시댁 명절준비는 이미 한참 진행중이었다. 대문을 열어주던 아주머니가 이미 분위기를 대강 설명해 주었고, 예상을 했던 터이기도 했으므로 담담히 인사를 했다. 어머니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대신 시부모를 일찍 여윈 탓으로는 먼저 와 있는 고모가 시금치를 다듬다가 큰소리로 야단을 쳤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야! 맏며느리가 되서 시부모를 모시지 않고 사는 것두 황송할 판인데, 명절이렇게 오면 어떡해! 왜, 다해놓거든 오시지 그랬어? 요즘 직장가진 며느리들은 다 이렇게 하는거야?" 시아버지는 시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분가를 허락하였다. 그건 허락이라기보다는 태식을 곁에 두고 싶지 않은 심사를 표현한 것이었다. 아들하나 없는 셈친다는 얘기를 결혼 전에 수없이 해대던 분으로선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오히려 현숙은 그것이 차라리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아버님께는 인사드렸니?" 어머니는 막내 고모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전히 현숙을 돌아보니 않고 냉랭하게 물었다. "아니요. 아직..........인사드리고 오겠습니다." 현숙은 부엌에서 마루로 걸어 나왔다. 2층에서 왁자한 웃음소리가 났다.

시동생과 조카들이었다. "아버님, 절 받으십시오." 안방에는 막내 고모부와 시아버지가 술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관 둬라!" 시아버지는 아예 옆으로 돌아 버렸다. 고모부는 그저 헛기침만 하였다. 현숙은 이를 악물고 절을 했다. 절은 하는 중에도 시아버지는 관두라는 소리를 했다. 제사나 명절 때 현숙은 '시댁으로 부역간다.'고 농담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다. 시댁은 유별나게 봉건적이어서 남자 어른들을 물 한 그릇조차도 꼭 아이들이나 여자들을 시켰다. 언젠가 현숙이는 물 좀 갖다 달라는 막내 시동생에게 그 정도는 고등학생이니 할 수 있지 않느냐고 응수했다가 시어머니에게 꾸증을 듣기도 했다.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어느 며느리가 시동생에게 그따위로 대꾸하더냐? 너희 집에선 그렇게 배웠니?" 어머니가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은 결혼 전부터 알고 있었다. 미운 며느리가 하는 짓이니 일거수 일투족이 트집이었으리라. "옷이 그게 뭐냐, 신경 좀 써라. 무슨 아이가 화장도 안하니? 궁시렁스럽다."

















현숙은 시댁에만 오면 천덕꾸러기요 찬밥신세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견뎌내자면 현숙이가 스스로를 며느리로, 한식구로서 여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식모 또는 부역하러 온 일꾼으로 규정해 버리는 게 속이 편했다. 남들이 다 좋아하고 기다리는 명절, 아니 현숙이도 결혼 전에도 가족끼리 화목하게 지내던 명절이 이제는 지긋지긋하기만 한 것이다. 태식이 역시 좌불안석이었다. 현숙의 눈치도 봐야 하고 부모님 눈치도 보아야 했다. 그러나 대개는 어른들의 시선 때문에 현숙을 도와주지 못했다. 식구들이 자신을 '마누라한테 쥐여 지내는 한심한 놈'이라고 여기게 될가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때로는 현숙이가 그 정도나마 견뎌주는 게 고맙기도 하고, 때로는 좀 더 부모님 마음에 들게 행동했으면 하는 기대가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집에 다녀간 뒤에는 언제나 현숙이와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현숙은 태식이가 좀 더 확실히, 분명하게 자신의 편이 되어 주지 않은 것에 대하여 지적하고 서운함을 표현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어떡하나? 내가 그럼 그 자시에서 어머니하고 싸움이라도 해야 속이 시원하겠니?" 태식은 아내 앞에서 어머니와 언쟁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인지에 대해 간절하게 설명하였고, 그러면 현숙은 기운이 꺾여 아무 소리도 못하고 하였다. '하긴 태식씨가 어쩔 수 있겠어?'

그리하여 이 문제는 늘 세월이 흐르면 나아지는 것으로 접혀지곤 하였다. 설날 아침의 차례. 20여명이나 되는 대식구의 아침식사는 오전 11시가 되어서야 설거지까지 끝났다. 늘 그랬듯이 식사가 끝나면 곧바로 성묘갈 준비에 들어간다. 일하는 아주머니와 현숙이, 그리고 머리가 좀 커진 조카들 몇을 제외하고는 온 가족이 성묘길에 나선다. 현숙은 누가 같이 가자고 해도 마다할 것이지만 같이 가자는 식구가 없으니 차라리 속이 편했다. 이렇게 정성스레 조상을 모신 덕분에 잘 살게 되는 것이라고 시어머니는 말씀하시지만 현숙은 마음이 쓸쓸했다. 몇 십만 원이나 드는 명절음식 준비와 자가용 성묘행이, 묘역이나 제대로 마련하지 못해 작은 절간에 모셔진 아버지의 유해와 비교되어 가슴에 찬바람에 지나가는 것이었다. '저게 다 무슨 소용이람' 현숙은 차 배웅을 하면서 그렇게 혼잣말을 하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친정식구들 생각이 간절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연락할 길이 없나 했다. 현준이 색시감이 온다는데 너 혹시 남 서방이랑 같이 좀 올 수 없니?" 한가한 틈을 이용헤서 전화를 걸어 보았더니 어머니는 뜻밖에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시댁 식구들은 성묘를 다녀온 후 저녁까지 먹고 헤어지므로 현숙이가 그 뒷수발을 다 마치면 꽤 늦은 밤이라야 친정에 갈 수 있다는 계산이 된다.

'모르는 척하고 지금 가버릴까?' 현숙은 가슴이 두근 거렸다. 시어머니는 더욱 자신을 미워하실 거고 다른 식구들도 그럴 거였다. '태식씨가 곤란해지겠지. 그래도 한 번 그래볼까? 이래 미움받으나 자래 미움받으나 마찬가지 아닌가?' 30분이나 망설이다가 현숙은 일을 저지르기로 마음을 굳혔다. "아줌마. 저 친정에 가봐야겠어요. 태식 씨 한테 전화 좀 하라고 전해 주세요." 아주머니는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현숙은 무슨 큰 일을 치르는 심정이었다. "상관없어요. 그럼 수고하세요." 현숙은 단숨에 친정으로 내달았다. 현준이가 제대하고 취직을 하면서 그런대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자리를 메꾸었다. 이제 결혼하게 되면 어머니는 마음을 놓으셔도 될 성 싶었다. 현숙은 마음의 짐이 훨씬 덜어지는 것 같았다. "어째, 시댁 어른들은 다 편안하시냐?" 그저 착하기만 하신 어머니. 현숙은 복잡한 심정을 애써 감추려고 '예'라고 대답했다. 그 잘난 집안이 자신이 딸을 며느리로 받아준 것도 고맙고, 며느리라 그게 마음에 걸렸는데, 분가하여 살게 해 준 사돈양반들이 마치 무슨 은인같이만 생각되는 어머니 셨다. 현숙이가 결혼에 얽힌 속사연을 어머니한테 감추고 살아온 터여서 어머니는 예단하나 제대로 못한 걸 내내 죄스럽데 생각하였다. "다녀온다고 말씀드리고 온거지?" 어머니는 불안한 마음을 드러내셨다. "염려마세요. 다 잘 알아서 하고 왔으니까요." 현숙은 어머니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어머니의 손은 더욱 거칠어진 것 같았다. 현숙은 새삼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로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이 솟아올랐다. ' 태식 씨 어머니도 우리 어머니같기만 하시다면......' 현준이 색시감은 작지만 착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현숙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어서 좋은 말만 골라서 해주었다. 결혼해서 시댁이 어떤 건지 알지 못했더라면 이렇게 세심한 느낌이 들지 않았으리라. 현숙은 동생의 색시감이 편안하게 있도록 애를 썼다. 마음이 즐겁고 넓어지는 것 같았다. 일직 저녁을 먹고 현준이와 그의 여자친구는 밖으로 나갔다.

"어떠냐? 괜찮은 것 같으냐?" 어머니는 현숙의 의견을 물으셨다. "엄마는 어때요?" 현숙은 어머니의 느낌을 알고 싶었다. 어머니는 그리 흔쾌해 하지 않으셨다. "글세. 애가 좀 작지 않니? 약해 보이고. 눈이 굉장히 나쁜 거같더라. 내 아는 사람 하나는 며느리 눈이 너무 나빠서 손주들이다 어릴 때부터 안경을 썼다는데......어째 말하는 것두 우물우물 하니 답답하다." 현숙은 시어머니 생각이 났고, 이미 성묘에서 돌아와 있을 식구들 생각이 났다. '아니 태식씨는 왜 전화를 안하는 거지?' 현숙은 공연히 태식에게 짜증이 나는 걸 느꼈다. 어머니가 뭔가 말을 꺼내려고 하는 것을 막으면서 현숙은 공연히 언성을 높였다. "엄마. 사람을 왜 그렇게 겉모양만 보고 판단해요? 난 우리 엄만 다를 줄 알았는데. 현준이가 어련히 알아서 택했을까. 난 성실하니 착하게 보이던데." '시어머니가 되면 이렇게 누구나 며느리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게 되는 걸까?' 현숙이는 고통스러운 느낌을 걷어버릴 수가 없었다. "엄마. 시어머니가 만약에, 나를 작고 못생기고 말주변도 없고 약해 보여서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엄마 마음이 어떻겠어, 응? 만약에 시어머니가 내가 가난한 집 딸이라 마음에 안 들어한다면 엄마 마음이 어떻겠냐구?" 현숙은 '이러면 안되는데, 이건 순억지인데.......'그런 생각을 머리 속으로는 했지만, 답답하고 울화가 치민 가슴은 이미 머리보다 앞서서 어머니의 가슴을 후비는 말이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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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 이야기 - 고부관계에 대하여

#영원한 갈등관계?

전통적인 가족관계에 따르면 여자는 결혼을 하면 남편의 가족이 되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집에서는 출가하는 것이 됩니다. 이 풍습은 지금도 여전히 지켜지고 있으나 산업화에 다른 핵가족화 추세는 그 엄격성은 점차 둔화시켜 왔고, 이제는 전통적 가족 규범이나 제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대중적으로 확산된 결과, 가족법이 개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법이나 제도가 바뀐다고 사람이 의식이 금세 바뀌는 것이 아니기 대문에 전통적 가족규범은 여전히 다수 여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출가한 여성은 새로운 부모님을 모시게 됩니다. 남편의 부모가 이제 자신의 부모가 되는 것이며, 그것은 거의 강제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여성은 남편의 부모를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이기적인 여성의 경우 이 강제는 특히나 억압적으로 여겨집니다. 고부관계 역시 결혼을 통해 형성된 인간관계중 하나입니다. 특히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가 여성문제의 하나로 등장하곤 하는 것은, 여성이 결혼을 통해 맺게 되는 새롭고 다양한 인간관계 중에서 잘 조화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갈등이 발생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에는 늘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문제들은 잘 극복되고 해결되면 인간관계를 보다 풍부하고 깊게 해주고, 또는 잘 해결되지 못한다면 갈등이 심화되고 관계가 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고부관계가 후자에 속하는 일이 많다는 사실이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지점입니다.

#고부관계의 특수성

무릇 모든 관계에는 적대적 관계와 비적대적 관계가 있습니다. 적대적 관계는 어느 한편의 고통과 희생이 없이는 다른 편이 행복이나 관계는 어느 한편의 고통과 희생이 없이는 다름 편의 행복이나 평안이 보장되지 않는 그런 관계로서 비화해성을 특징으로 하는 관계입니다. 반면에 비적대적 관계는 갈등이나 대립이 요소가 있으나, 그것이 타협이나 설득, 조정 등으로 능히 해결이 가능한 관계입니다. 자본가와 노동자,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관계는 적대적 관계의 예이고, 여자와 남자, 아내와 남편, 형제와 부모. 자신간의 관계는 비적대적 관계의 예들입니다. 그렇다면 고부관계는 어떻습니까? 물론 비적대적 관계입니다. 현숙은 노동자이며 시댁은 자본가의 집이므로 적대적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한 설정입니다. 현숙의 계급적 처지, 또 시댁의 계급적 처지는 적대적일 수 있으나 현숙이가 시댁과 맺은 관계는 계급적 관계가 아닌 개별적인 가족관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고부관계이서 발생하는 문제는 설득이나 타협을 기초로 해서 풀어나가야 합니다. 두 번째로 고부관계는 매개적인 관계입니다. 즉,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아들 또는 남편이 남성을 통해, 그 남성을 매개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매개적 관계는 매개를 하고 있는 당사자의 역할 비중이 높습니다. 집을 구할 때 부동산업자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부관계에서는 남편, 또는 아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세번재로 생각해 볼 것은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자발적이든 강제된 것이든 시어머니와의 관계는 결혼을 통해 형성된 가족관계중 하나라는 사실이고, 또한 세대차이. 생활습관 ,사고방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공통성에 기초하고 있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특히 이 여성으로서의 공통성을 잘 인식하는 것은 고부관계를 현명하게 풀 수 있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어머니

인간관계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 상대의 처지나 조건을 잘 이해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어떤 관계이든 주동적으로 해결해 나가려는 사람이라면 더더욱이나 그렇습니다. 사람은 대개 환경에 영향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성격이나 사고방식을 형성한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잘 이해해야 그 사람을 총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이 보여주는 단편적인 행위만을 보고 과도하게 기대하거나, 또는 과소평가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의 어머니, 시어머니 세대는 어떤 시대를 살아왔습니까? 그분들은 대부분 일제시대에 태어나고 자라서 소녀시절에 해방을 맞았고 황금같이 빛나야 할 처녀시절은 전쟁의 와중이었습니다. 오직 생존이 최대의 삶의 가치였고, 자식을 먹여 살리는 것, 공부시켜야 훌륭히 되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던 분들이며, 생활 규범과 윤리가 전통적인 가족규범에서 절대로 벗어지 않았던 시대를 걸어왔습니다. 자식들이 장성하여 허리도 좀펴고 눈도 좀 들어 세상을 보았을 때, 그분들의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은 자신들이 살아온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통적인 가치와 규범이 흔들렸고, 자식들은 독립을 주장했으며, 사회는 더 이상 늙고 초라한 자신들은 독립을 주장했으며, 사회는 더 이상 늙고 초라한 자신들은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은 늙은 부모 봉양을 하늘이 주신 과업으로 알고 살아왔는데, 자유와 독립을 외치는 자식들은 그들을 모시기를 꺼려하기 시작하였습니다.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시대의 격랑 속에서 악착같이 살아 남긴 했지만, 시대의 변화를, 그 충격을 여유있게 이해하고 받아낼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아니, 그 누구도 어머니들의 눈과 귀를 열어주고, 손발의 수고를 덜어주지 않았습니다. 위대하고 잘난 정치지도자들은 오히려 어머니들의 굽어진 허리를, 등을 더욱 힘들게 했고, 주름진 이마를 더욱 그늘지게 했으며, 무시하고, 이용하고, 단지 정치적 목적에 동원할 뿐이었습니다. 70세가 넘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하는 노인들, 생계가 막연하여 여전히 힘들고 위험한 노동을 해야만 하는 노인들, 그리고 나는 징용 끌려가 동료의 살을 먹을 뻔 했었다며 당시의 악몽에 시달리는, 나는 일본놈들의 정신대로 영혼까지 파먹혔다며 울부짖는 이 노인들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요, 아버지들입니다.

#함께 살기 위하여

결혼은 더 많은, 더 구체적인 책임을 지며 살아가겠다는 두 사람의 결의이기도 하며, 따라서 고부관계 역시 힘들지만 젊은 남녀가 잘 풀어가야 할 인생의 과제입니다. 시부모나 부모가 자신들을 먼저 이해해주기를 기다리고 서운해 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먼저 주동적으로 서야 합니다.

먼저 풀지 않으면 저절로 풀리지 않으며, 누군가가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부모들은 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들이며, 이분들이 구습과 고루한 사고방식을 스스로 집어던지고 문제를 솔선해서 해결하리라고 기대한다는 것은 비겁하며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젊다는 것은 진보적이며 활동적이고 변화가 빠르고 주동적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며느리들은 어머니와 문제에 대해서는 여성이라는 공통성에 눈뜰 필요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관심있어 하는 것, 예를 들어 남편과의 관계에서 답답하고 속상했던 옛날 이야기들은 들추어 보십시오. 어머니는 즐거워하며 이야기를 할 겁니다. 그분들도 그 억압과 인고의 세월이 즐겁기만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인데, 어머니도 인간인데, 여성이기 때문에 눈물로 달래고 참아야 했던 사연이 한처럼 쌓여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여성적인 연대가 싹터 오를 것입니다. 남편들은 중립적인 양, 멋있게 폼만 잡을 게 아입니다. 그들이야 말로 고부관계에 있어 결정적 조력자입니다. 분명하고 올바른 판단을 가지고 아내와 어머니 사이를 결합시켜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대충 아내에게 떠넘기지 말고, 어머니의 등 뒤로 달아나지 말고 한 가지 일, 두 가지 문제 마다 꼼꼼히 해결해 나가야만, 좋은 남편, 훌륭한 아들로살아갈 수 있으며 진정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부가 한 마음으로, 옳은 길을 가는 것이야 말로 부모님께 효도하는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노동운동을 하다 잡혀서 옥살이를 했던 어느 며느리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제 옥바라지를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님이 번갈아가며 해주셨습니다. 남편은 수배중이라 면회오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지요 시어머님 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고맙고 죄송스러웠습니다. 이 땅의 독재정권이 저와 시어머니를 하나로 만들어 준 것이 오히려 다행스럽습니다. 아들의 활동의 이에 함께 한 며느리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머니는 자식들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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