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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언론의 봉인가

#박찬호 열풍

"귀하신 몸 박찬호" 이것은 한 일간지 스포츠면의 헤드라인이다. 요사이 언론에서 가장 잘나가는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박찬호다. 그의 인기는 언론에서 뿐만 아니라 신랑감 후보로서도 대단하다고 한다. 박찬호가 펼치는 게임을 보기 위해서 회의 시간을 바꾸는 회사가 있는가 하면 야구 동호인 모임 열풍도 대단히 거세다. 심지어 박찬호가 소속된 LA다져스 모자와 티셔츠는 고가임에도 불티나게 팔이고 있다. 연일 대서특필되는 언론 속의 박찬호 이미지는 늘 일에 몰두하는 전형적인 프로의 모습이다. 그것이 그를 더 돋보이게 한다. 흔히 남녀간의 성역할 고정관념은 그들의 성격, 영할, 직업, 육체적 특성에서 나타난다. 이처럼 고착된 성역할 고정관념이 이 시대의 모든 남녀를 짓누른다. 어떤 남성이라도 가부장이 되어야 하면 절대 눈물을 보여서는 안된다. 어쪄면 남자답지 못하거나 사회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면 그는 당연히 주눅들게 마련이다. 반대로 여성 역할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가장 편한 여성의 인생 속엔 늘 여성스러움이 간직돼 있다.

이러한 성고정관념 현상은 특히 프로의 세계에서 더욱 뚜렷하다. 언론 속의 남자 선수들을 보자. 대체로 그들은 경기에 열중하고 성취감에 환호하는 모습 등 아주 정열적으로 그려진다. 그들은 완벽한 프로의 모습이다. 그러나 여자 선수들은 어떤가. 대체로 그들은 일보다는 외형적인 특성이 두드러진다. 여자 선수들의 날씬한 몸매나 섹시한 미모는 늘 클로즈업된다. 스포츠면에서 나타난 여자 선수들의 사진은 대부분이 즐거워하거나 행복한 표정의 모습이다. 그런 탓인지 경기 중 치열하게 경쟁하거나 최선을 다하면서 힘겨워 하는 여자 선수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여자 선수들의 사진은 경기 모습 대신에 대체로 사생활을 설명하는 사진들인 많다. 사진들은 여성적인 특성을 담은 온화하거나 지적인 그리고 섹시한 모습 등의 감정적인 성격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스포츠 신문에서 남녀 선수의 사진을 설명하는 기상의 용어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남자 선수들의 사진을 설명하는 기사의 단어들은 '도전', '끝냈다.', '불끈', '청춘', '질주', '야망', '폭발', '무적', '특급 출격', '발사', 천하 통일', '쿠데타', '대혈투' 등이다. 반면에 여자 선수의 사진을 설명하는 단어는 너무 다르다. '사뿐히', '행복한 미소', '인형', '신데렐라', '여왕', '백조' 등의 단어로 묘사하고 있다. 한 여자 선수의 사진 시가를 살펴보자. "하나 마리의 백조"라는 헤드라인을 가진 이 기사는 "97년 민정 학원 배 전극 리듬체조 대회 마지막날 경기에서 유연한 동작으로 리본 연기를 펼치고 있다' 였다. 실제로 이 사진은 유연한 동작을 펼치는 김민정 선수의 모습을 잡았다.



또다른 여자 선수의 사진을 보자. 그것의 헤드라인은 "백만달러짜리 히프"였다. 그 기사는 "프랑스의 나탈리아 타우지트가 6일 벌어진 97 이탈리아 오픈테니스 대회에서 땀에 젖은 팬티를 치켜올리면 풍만한 히프선을 보여주었다." 였다. 실제로 이 사진은 타우지아트가 팬티 보이는 뒷모습을 클로즈업하였던 것이다. 언론이 다루는 남녀 선수들의 모습은 왜 이처럼 판이하게 다를까. 이것은 언론의 왜곡된 성역할 고정관념 때문이다. 상업성에 함몰된 우리 언론이 여자 선수들의 날씬한 몸매와 미소에 길들여지면 질수록 많은 자질 있는 여성들의 열망은 묻혀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는 절대 여자 선수의 열풍은 불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마릴린몬로처럼 치마 여미는 프로 여자 선수의 모습은 60년대에서나 판칠 매력이 아니던가.

#전설 속의 여자

다이애나는 한 편의 전설 속의 여자 주인공과 같다.

다이애나는 호들갑스러운 언론이 만들어낸 우리 시대의 최고의 신데렐라였다. 필자는 그 동안 다이애나가 행복하기를 바랬다. 그녀의 존재가 바로 우리 사회에서의 신분 상승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몰락하면 우리 사회에서의 신분 상승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며칠 전 다이애나가 사망했다. 이것은 결코 한 유명한 여성의 죽음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 죽음 속에는 거미줄 같이 얽힌 권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아 언론은 '다이애나 흔들기'에 철저하게 한몫 했다. 언론은 그녀의 결혼을 신데렐라의 탄생이라고 떠들었고, 그녀의 이혼과 외도를 값나가는 최고의 돈벌이로 이용했다. 그러더니 언론은 그녀의 장례식을 거대한 세기말 사건으로 부풀려 급기야는 그녀를 신화적 인물로까지 포장하였다. 다이애나가 죽은 지 1주일 동안 온 세계의 언론은 거미즐 치듯 그녀를 다루었다. 모든 언론에서 다이애나에게 최고의 찬사를 쏟아 부었다. '전설 같은 존재이며....' 최고의 신데렐라로 모든 서민의 우상' 이라고 미화시켰다.

도대체 언론은 언제까지 신데렐라 꿈으로 많은 사람들을 유혹할 것인가? 이 시대의 여성들이 다이애나를 꿈꾸면서 온 정성을 바칠까 몹시 두렵다. 솔직한 다이애나의 16년간은 궁전 속의 천덕꾸러기로, 동시에 궁전밖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요기감이었지 않은가. 실제로 영국에서 다이애나는 서민의 우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블루칼라를 독자로 삼는 타블로이드판의 단골 손님이었다. 타블로이드판 언론의 특성은 황색 저널리즘을 지향한다는 데 있다. 이 신문은 무엇보다 독자들의 본능과 흥미 자극하는 데 최고의 가치를 두며 범죄와 섹스 기사를 환영한다. 이런 신문에서 다이애나의 사생활은 최고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서민 출신의 스무살의 처녀에서 왕세자비로의 신분 상승, 16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의 많은 스캔들, 왕세자와의 이혼 등등의 뉴스 거리는 최고의 뉴스감이었다. 실제로 96년 8월 28일에 이루어진 다이애나와 찰스 황태자와의 이혼은 <선>지의 일면에서부터 10면까지 특집 기사로 다루어졌다. 다이애나는 진정 서민들의 우상이었는가, 오늘날 신분 상승의 상징이었는가? 따져 보자. 그러나 대답은 결코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오히려 다이애나는 우리들에게 우리 사회에서 서민의 신분 상승이 불가능함을 알려줄 뿐이다. 왜 다이애나는 새장 속의 새이기를 거부했는가, 언론은 왜 다이애나를 최고의 상품으로 대접했는가, 또 다이아내는 왜 서민의 눈요기감이 되었는가.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진취적인 여성들이 다이애아의 부서진 신데렐라 꿈이 두려워해서 자신의 성공에 대한 의지를 쉽게 포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염려한다.

어쩌면 똑똑한 여성들은 '성공의 대가란 곧 사회적 몰락' 이라는 계산법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그만둘지 모른다. 이처럼 다이애나의 망가진 꿈은 이 시대의 여성들이 겪는 고통의 전형이다. 이제 언론은 제2의 다이애나들을 만들어 내는 상업성을 버려야 한다. 밝은 미래를 가진 여성들이 더 이상 언론 때문에 인생을 왜곡되게 살아서는 안된다.



#주부는 TV 중독자.

금싸라기 같은 아침 시간의 TV 드라마들이 마뜩찮다.

지나치게 선정적인 화면이 눈에 거슬리기 대문이다. 습관적이든, 시간때우기이든 혹은 무엇인가의 정보가 필요했둔자건에 TV 프로그램의 생명줄은 바로 리모콘을 쥔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 정보화니 세계화니 하는 이 시점에서도 드라마에서만큼은 봉건시대에서나 있음직한 여성들이 판을 치고 있다.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학력이나 직업면에서 저급하고, 어리숙하고,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며, 오로지 외모에만 신경쓰는 인물로 묘사된다. 왜 그런가? 여성운동단체들이 이런 매스 미디어를 거부하자고 목소리를 높인지 수십년이 흘렀어도 우리의 드라마는 여전하다. 여성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버려두고 한평생을 현모양처로 만족하는 이른바 '여성들의 신비' 컴플렉스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외침이 어제오늘의 일이었던가.

'여성의 신비'란 무엇인가? 이것은 여성의 역할을 오로지 어머니나 아내라는 영역에만 한정함으로써 여성들 스스로가 개인적인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여성들은 여자라는 신비스러운 현상, 즉 전통적인 아내나 어머니 역할에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 무가치한 인생을 갖게 된다. 베티프리단에 의하면 이러한 생각에 빠져 있는 여자들은 자아를 찾지 못하게 된고 결과적으로 생활에 불만을 느끼게 되어 결국 행복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성의 신비'라는 병을 치유할 수 있을까?

베티프리단 여성들에게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진단하였다. 그녀는 가정 안의 현실속에서 무기력해진 여성들은 가정 밖에서의 창조적인 일을 통해서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으며 충분히 만족스런 인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부르짖는 현실적인 소리와는 달리 여전히 우리의 TV에서는 봉건시대에서난 환영받을 여성들이 주를 이룬다. 남편에게 코맹맹이 소리로 어리광을 부리는 여성, 사랑한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모든 사회적인 판단력을 스스로 마비시켜 버린 여성,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인 말투를 부끄럼 없이 구사하는 여성들.....

이러한 여성들은 아침이나 밤이나 연이어 등장한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습관적으로 TV를 시청한다. "어쩌다 드라마 <정때문에>를 보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봐야 직성이 풀린다. "TV보기가 유일한 낙이다."라고 대답한다면 그는'TV 중독자'일 수 있다.

TV는 '세상 보는 방식'을 가르쳐 주는 강력한 사회화 도구이다. 특히 TV SMS 일상생활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면 사람들의 상징 세계를 지배한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은 TV 메시지를 통하여 사회화된다. 즉, 사람들은 TV를 통하여 세상을 배우고 적응하게 된다. TV세계가 곧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유명한 언론 학자인 거브너(G.GERBNER)가 주장한 '배양 효과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배양 효과란 TV를 통해서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말이다. TV를 통한 배양 효과는 특히 TV를 많이 보는 사람에게서 두드러진다. TV를 많이 보는 사람인 중 시청자들은 TV를 통해서 이 세상에 적응한다.

TV중시청자란 하루에 적어도 4시간 이상을 , 그리고 경시청자는 약2시간 정도 시청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대체로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TV시청을 더 선호하고 실제로 이들의 시청시간도 길다. 특히 멜로 드라마의 주시청자는 여성의 아닌가. 그렇다면 멜로드라마의 세계는 곧 여성들이 현실 세계와 유사한 셈이 된다. 최근 들어 각 방송사는 봄철 프로그램 개편과 함께 새로운 드라마를 선보였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여전히 여성차별적인 이미지를 내세우고 있으며, 소재 또한 현실과 매우 동떨어진 불륜, 이혼, 혼외 출사, 폭력 등이다. 배양효과론에 의하면 이러한 멜로 드라마의 중시청자들은 여성이란 존재를 수동적이고 감정적이며 ' 갈등의 원인제공자'로 자연스럽게 수용한다. 또 주변의 대다수의 가정이 불행으로 얼룩져 있으며 많은 여성들이 비정상적인 관계속에서 사는 것으로 현실을 인식한다. 이런 TV환경 속에서 중시청자들에게 '남녀평등론'을 아무리 외쳐대도 수용될 리가 없다. 왜? 그것은 바로 중시청자들에게 있어서 TV를 능가할 만한 또다른 사회화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여성이 TV에서 줄줄이 엮어져 나오면 여성들은 TV 의 비현실성을 질타해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화면속에서 왜곡되거나 우롱당하지 않기 위해서 'TV 끄기'혹은 '프로그램 거부' 운동 같은 능동적인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이제는 여성들 스스로가 자기 계발을 위하여, 또는 사회를 위하여 의미있는 활 등을 하는게 적극적이어야 할 때이다. 이 시대의 깨어 있는 시민으로 살아남기 위하여. TV중독 증세로 빠져 나올 수 있는 효과적이고 조직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반 여성들 스스로가 "TV 바로 세우기" 캠페인에 동참하는 것이다. 또 하나편에서는 여성 정책 담당자들이 배후에서 이같은 조직적인 노력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야 할 것이다.



#고개숙인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이 온 국민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라는 이유 때문에 .

한보사태가 날치기 사건들이 고개숙인 아버지의 눈물로 가려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최근 소설 <아버지>는 출판계에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지난해 8월 말에 선보인 소설 '아버지'는 총 100만부를 돌파하고 여전히 하루에도 2만부씩 팔리고 있다. 왜 이렇게 이 소설이 경이로운 기록을 가진 베스트셀러가 되었는가? 어느 날 암선고를 받은 전형적인 중산층의 주인공이 가족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회생했다는 이 소설이 자본주의 출판 마케팅 전략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는 한 마디로 '잘 팔리는 책' 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베스트셀러는 철저하게 경제적 조직체로서의 출판 행위의 산물이다. 베스트셀러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베스트셀러란 바로 한탕주의의 결과 혹은 광고의 산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 소설을 들여다보자. 이것은 전형적인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정말 이 소설의 배경처럼 우리 사회의 가족은 오로지 남성의 노력과 인내로만 지탱된단 말인가?

우리의 주변을 보자. 여성이 가장인 경우도 흔하며 여성의 부단한 인내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가정도 많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자신의 삶보다는 남편이나 자식의 행복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왜 우리 사회는 '고개숙인 아버지'에 대하서만 그토록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가 남성의 권위와 역할에 의해서 유지되는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오랜 세월 여성들은 늘 고개를 숙이고 살아왔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고개를 똑바로 쳐들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한 조직에서 남성처럼 고개를 당당하게 쳐든 여성들은 늘 맥없이 희생되거나 도태되는 일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요즘 들어 온 세상이 지나치게 '아버지 기살리기'에 허우적대고 있다. 언론은 많은 여성들이 현모양처의 길로 들어선다면 경제구조 석에서 명퇴,조퇴 당한 고개숙인 남성들이 다시 당당하게 어깨를 펼 수 있을 것처럼 떠들어댄다. 이와 맞물려 사화에서는 가사일을 잘하는 여성이 최고이며 외모 잘 가꾸는 여성이 이상형이라는 드라마나 광고가 빛을 발한다. 살림 잘하기로 소문난 주부들이 방송가에서 대접을 받고 많은 여성들에게 살림 잘하는 비법이라도 전수하려는 듯 현모양처들의 출판물 경쟁이 치열하다. 하지만 베스트셀러가 대중성을 담보한 포장된 돈벌이 산물이 듯이 '남성 기살리기' 운동 역시 가부장제의 왜곡된 문화적 산물이다. 이러한 가부장 문화에 길들여 여성 문화를 억압해서는 안되다.

엊그제 대통령이 고개를 숙였다고 모든 정치 현안을 간과해서는 안되듯, 소설 <아버지>라는 베스트셀러 의 배후에 묻혀져 가는 가부장제의 부활을 묵과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한순간 아버지로서 대통령이 고개를 숙였다고 해서 그의 모든 정치적 야망을 포기했다고 인식할 국민이 한 사람도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여자와 텔레비전

'애인'은 한때 장안을 강타한 MBC-TV미니시리즈 중의 하나였다. 이 드라마에는 미모의 연기자 황신혜가 등장하였다. 주인공 항신혜는 '처녀같은 외모를 지닌 능력있는 커리어우먼' 이었다. 드라마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그렇고 그런"에피소드였지만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시청자들은 유부녀의 사랑놀음을 대리 체험하기 위하여 수상기 앞에 모여들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본질적으로 상품 경제가 지배하는 사회다. 그래서 모든 생산물은 팔려야만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수의 자본가들이 대부분의 생산 수단을 소유한, 반면 다수의 직접 생산자들은 생산 수단에서 분리된 채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여성의 본질 역시 이같은 사회구조의 논리 속에서 구현된다.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란 바로 여성이 담당하는 노동의 형태를 결정한다. 사회구조적으로 대다수의 여성들은 저임금 노동자로 한편에서는 소비 중심의 가사 전담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바람직한 여성상은 배스 미디어의 상업성이 만들어 낸다. 여성은 지배계급의 자본논리에 의하여 여성은 다양한 형태를 상품화되며 여성을 지속적으로 외모 지향적인 사고와 논리속에 묶어둔다. 자본주의의 논리와 매스 미디어 산업은 서로 상부상조함으로써 가부장제가 구현하는 여성상을 창출해 낸다. 한마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스 미디어는 여성억압 이데올로기의 주요 기제인 셈이다. 그 동안 다수의 여성론자들은 우리 사회에서의 매스 미디어의 역할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매스 미디어는 기존 사회를 지속시키고 통합하는 성적 고정관념을 전달하는 '성차별적 가치전달제'이며, 여성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경험과 진실을 음폐, 왜곡하여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를 달성하는 '가부장적 가치전달제'이자, 나아다 여성에 대한 왜곡된 사회적 통념을 전달하여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정당화시키는 '헤게모니적 가치전달제'인 것이다. 어쨌든 텔레비전은 현실 속의 여성의 지위를 더 왜곡하고 정교하게 여성을 억업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 장치이다. 텔레비전 세계는 진실하지 않다. 바로 현실을 재구성한 '의사환경(pseudo-environment)'이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어떠한가? 시청자들은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하기도 한다. 텔레비전이 만들어 낸 여성상 역시 그렇다 절대 이들은 우리 주변에서 살아 숨쉬는 여성들의 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시청자들은 그들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텔레비전에서 아름답고 섹시하지 않은 여성은 거의 없다. 한술 더 떠서 텔레비전은 끊임없이 '아름답고 섹시한 여성'이 될 수 있는 가능성과 그 방법까지 알려준다. '아름답고 섹시한 여성'이 누릴 엄청난 혜택까지도 확실하게 보여준다.

특히 광고는 자본주의가 성을 상품화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광고는 마치 여성의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모두 바꿀 수 있다는 신화까지도 창조한다. 날마다 광고는 예쁘고 날씬한 몸매를 갖고 남편에게 성공한 여성들의 모습은 바로 외모가꾸기에 성공한 여성의 모습이다.

"남자는 여성하기 나름이에요" 이것은 수많은 여성들 사이에서 회자됐던 광고 카티이다. 이 광고는 우리 시대의 똑똑한 여성의 모습을 그려내는데 성공하였다. 이 메시지를 전달했던 최진실은 바로 잘나가는 연기자로, 그리고 사랑스러운 여성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광고의 위력이다. 여성은 광고 때문에 날마다. 외모를 관리하고 날씬한 몸매를 유지해야 한다. 이처럼 여성은 광고가 제안한 상품을 구입하고 사용함으로써 빠져 산다. 외보 가꾸기가 바로 여성의 자아 계발인 동시에 자아실현으로 변모한다. 자본주의와 매스 미디어와의 결합은 바로 여성을 성적인 존재로 재생산해 낸다. 그래서 여성은 '섹스의 도구'라는 최고의 가치로 포장된다. 잘록한 허리를 가진 비비안리, 풍만한 가슴과 섹시한 입술을 가진 소피아 로렌 뇌살적인 눈웃음과 몸매의 마릴린 마돈나 샤론 스톤은 바로 언론이 만들어 낸 섹시하고 아름다운 여성들이다.

이들이 바로 대다수나 여성들이 바라다보는 선망의 대상이다. 이런 유형의 여성상은 모든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드라마의 많은 여주인공들은 유능하고 전문직 종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아름답고 섹시한 몸매를 지니고 있으며 남자의 사랑 얻기를 최대의 가치로 삼고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세계는 다른 매체와는 달리 현실감, 현장감이 넘치는 기술적 장치 때문에 그 시대의 지매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는 강력한 도구이다. 또한 드라마의 주요 타겟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특정한 여성상을 주입시키는 효과가 지대하다. 근래 드라마에서 압도적으로 등장하는 여성상은 '아름다운 외모로 가사 일에도 완벽한 일하는 여성'이다. 우리는 이러한 여성을 '수퍼우먼형'이라고 한다. 수퍼우먼 여성상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산물로 여성의 교육 혜택으로 인하여 자아실현의 욕구와 현모양처라는 가부장제 틀 안에서 설정된 여성상이 혼합된 형태이다. 결국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자아실현적 여성상'보다는 '순종적이면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성상'이다. 이것은 매스 미디어의 메시지에서뿐만 아니라 매스 미디어 종사자에 대한 요구에서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의 앵커우번을 고르는 조건 가운데 외모나 매력이 우선적이었으며, 동시에 지적인 냉철함과 섹시한 모습이 요구되었다. 우리 사회에서도 전문성이 요구되는 여성 MC에게서도 '전문성' 보다는 오히려 '미모'를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그럼에도 시청자들은 텔레비전 속의 여성상에 대한 차별적인 이미지를 수용하게 되고 이것을 바탕으로 현실 속에서 여성상을 재구성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데올로기 상자인 텔레비전을 과감하게 비판하고 거부해야 한다. 텔레비전을 애인같이 사랑해서는 안된다.




#연인 테레사

이번 한가위는 무척 우울하였다. '여아유괴 사건'이 우리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온 국민은 긴 연휴 동안 대권의 향배 대신에 이 끔찍한 유괴 사건의 전모에만 관심을 쏟았다. 이 사건이 주는 더 큰 충격은 범인이 임신 8개월의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언론은 지나치게 여성이 범인이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 같다. 우리 언론의 보도행태를 살펴보자 언론에서 팔리는 인물은 대체로 남성들이다. 최근 언론은 후끈거리는 정치판 열기에 스포츠 열풍까지 동반하면서 많은 영웅들은 만들어 냈다. 상대적으로 여성은 언론에서 드물게 다루어지면 이들의 이미지 역시 부정적이었다. 언론의 기능에는 '지위부여'라는 것이 있다. 언론이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긍정적으로 다루게 되면 훌륭한 인물이나 사건으로 부각된다. 반면 언론이 어떤 사람이나 사건이 부정적으로 그려내면 극악한 인물이나 사건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언론의 사회적 힘이다.

우리는 이같은 언론의 기능 이면에 깔려 있는 뉴스 가치와 뉴스처리 과정에 '보도된 새로운 정보나 사건'으로서 여러 정보나 사건 중세서 뉴스 아이템으로 부각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가치를 가져야만 한다. 주요 뉴스 가치는 바로 정보나 사건의 영향성, 시의성, 저명성, 근접성 등이다. 특히 정보나 사건의 영향성과 저명성이란 대체로 남성일수록 유명인 일수록 다루어질 가능성이 키다. 이러한 뉴스 가치는 언론의 지면이나 신문에서 남성들만을 판치게 하였다. 최근 우리 언론은 모처럼 한 여성을 매우 긍정적으로 다루었다. 바로 '테레사 수녀'다. 테레사 수녀의 죽음은 전세계의 걸인에서부터 교황까지 '애도의 바다'로 몰아넣었다. 우리의 언론은 그녀를 "우리 시대의 성녀"라고 까지 극찬하였으며, 인도를 행운의 나라로 끌어올린 인물로 묘사하였다.



Brain Food

교황 바오로 2세 또한 테레사 수녀는 인생의 실패자들이 신을 느끼게 만든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테레사 수녀는 죽어가는 사람들, 버려진 아이들, 고통과 외로움에 짓눌린 사람들,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을 진심으로 끌어안았던 것이다. 이참에 우리 주변을 돌아보자. 어쩌면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한국판 테레사 수녀가 있을지 모른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독자들은 지금 머리속에 한국판 테레사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른다. 아마 어떤 발 넓은 독자는 수명 혹은 수십 명에 이르는 사회봉자가들을 생각해 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남의 떡이 커보이는 것은 웬일일까? 이처럼 사회봉사자에 대한 존경심에도 사대주의 근성이 불어있단 말인가. 그러나 테레사의 세계적인 명망에는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무엇보다 언론의 역할에 그 커다란 원인을 두겠다. 언론이란 언제나 읽을 거리의 가치가 있는 유명인만을 쫓아다니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