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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외모로 승부하는가

#마돈나 스타일로 해주세요

요즘 여성들 사이에는 <에비타>라는 영화에서 열연한 마돈나의 스타일이란 바로 얼굴에는 하얀 분을 , 입술에 새빨간 립스틱을 그리고 머리는 단정히 빗어 올린 '시늉' 헤어 스타일이다. 아마 지구 거리에는 나가 보면 '한국판 마돈나'들의 행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에서 '키취(Kitsch)'라는 현상을 떠올였다. 키취란 '잔짜가 아니면서 진짜인 척하는 모조품, 그리고 이 모조품에서 자기 기만적인 만족감과 위로감을 얻으려는 심리상태'를 의미한다. 키취는 우리 시대의 다양한 문화현상과 복잡한 문화 심리를 포괄적으로 설명해 주는 사회 문화적인 현상이다.

한마디로 키취는 대중사회의 산물이다. 그래서 이것은 대중의 삶을 이어주고 의미를 창출하는 대중의지지 기반이다. 이것은 고급문화에서 소외당한 대중의 컴플렉스를 보상해 주는 하나의 문화현상인 셈이다. 지금과 같이 대중사회에서 누가 이 키취문화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아마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대중사회 자체가 바로 키취문화를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러한 키취현상은 두 가지의 상반된 의미를 갖는다. 소수 엘리트들만이 향유했던 문화를 저변 확대하여 평등 심리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무척 긍정적이지만 실체 없는 허위 문화를 양성하여 자본주의의 상업화에 함몰된 문화를 창출해 낸다는 점에서는 아주 부정적인 면모를 지닌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부정적으로 생산되는 키취현상이다. 키취는 창조적으로 생산된 문화가 아니다. 바로 베끼기와 모조품, 즉 '허위 허식'을 창출하는 문화 공간의 산물이다. 키취는 상업주의와 결탁하여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양산하기 때문에 향유자들은 특정한 허위 의식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키취문화와 자본주의 상업성의 결탁은 특히 여성 문화에서 두드러진다. 이러한 여성 문화에 의하여 대다수의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특정한 허위 허식에 함몰된 존재가 된다. 한동안 우리 사회를 강타한 '공주병 신드롬' 도 바로 이 키취문화의 산물이다. 여성들은 '공주병 신드롬'속에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존재로 내몰아쳐졌으며, 그것을 빌미삼아 어떤 사람들은 엄청난 돈을 챙기기도 하였다. 백화점마다 공주를 연상시킬 만한 레이스 달린 의상이나 구두 등이 불티나게 팔렸다. 우리는 한바탕 '공주병 신드롬' 때문에 열풍을 겪었다. 이것이 바로 키취문와의 위력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키취문화의 주범이 바로 TV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상업성에 사로잡힌 TV는 키취 아이템을 찾아내어 비틀고, 휘젖고 내뱉어 한바탕 소용돌이를 만들어 수많은 스타와 돈방석을 만들어 낸. 키취맨, 그는 바로 소비자다. 자본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의 성원 그 누구도 TV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키취문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이러한 압력 속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자아를 끊임없이 계발하고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최근 드라마를 보면, 공주병에 걸려서 한심한 골치덩어리로 그려지는 여자들이 유별나게 많다. 이것 역시 상업주의와 결탁한 키취문화의 한 단면이라 하겠다. 여성들이 대중문화를 수동적으로 소비하고 수용하는 한 TV의 상업주의는 교묘하게 여성들의 본질을 왜곡해버릴 것이다. 무작정 마돈나처럼 창백하게 분칠하고 새빨간 립스틱을 바를 것이 아니다. 이제는 적극적으로 자기만의 독특한 미를 계발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이 사회의 왜곡된 키취문화를 거부할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여성이야말로 진정으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참여성상'이 아니겠는가.



#신데렐라는 없다.

얼마 전 막내린 MBC-TV의 <신데렐라>라는 드라마의 열풍이 만만치 않았다. 그 열풍 또한 흥미진진하였다. 이 드라마는 몇 주 동안의 시청률에서도 단연코 1위였다. 이 드라마는 최근 97 대선을 앞둔 정치판 용들이 한판 승부와 맞물려 뜨겁게 달아올랐다. 도대체 어떤 여성이 신분 상승의 티겟을 거머쥘 것인가로 사람들은 흥분했었다.

그러고 보면 현실에서든 허구의 세계에서든 성공 혹은 신분 상승에 대한 에피소드는 최고의 관심거리가 된다. 드라마 <신데렐가>는 재미이었다. 아무리 방송 위원회나 여성 단체에서, 또 도덕 군자들이나 지식인들이 입을 모아 "비윤리적이고 선정적이어서 안방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비난했지만 이 드라마의 여운은 당분간 지속된 것 같다. 왜 우리 상식을 벗어난 드라마가 그같은 열풍을 몰고 왔는가? '신데렐라 열풍'에 묻혀 있는 우리 시대의 여성상을 적나라하게 벗겨 보자. 분명히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우리 사회의 상식 지수를 훨씬 뛰어넘는 등장 인물들과 관계 설정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특이한 구도는 여성을 철저히 성차별 고정관념속에 묶어 두었다. 두 가지의 극단적인 여성상, 즉 사악하고 이기적이며 변덕스런 교화한 여성 얌전하고 유순한 현모양처형의 여성의 대결 구도와 악의 이항 대립 개념으로 강화되었으며 행복과 불행의 이중적 삶을 사는 통속적인 관계로 였어졌다. 반면 이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남성들은 사회적 파워를 구비한 존재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성적이고 적극적이었으며 여성을 완벽하게 보호하는 잰틀맨이었다. 그 동안의 전통적인 드라마가 그랬듯이 이 드라마 역시 어떤 여성이 남성의 품에 아니게 되는가, 또 어떤 유형의 여성의 행복하게 되는가를 문제 제기하였다. 그러면서 그 해답으로 '남성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여성보다는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을 선택한다.', '자아실현에 치중하는 여성보다는 가정 지향적인 여성이 궁극적인 행복을 거머쥔다.' 라고 제시하였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전문직 여성의 '무가치성'을 교묘히 표상 하였다. 예컨대 '여성이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공해도 현모양처보다는 행복할 수 없다.'는 논리를 통해서 여성의 사회적 열망을 삭히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여주인공 혜진(황신혜분)은 왜 수년간 쌓아온 재능과 능력을 재벌 2세와의 결혼과 바꾸려 했는가? 왜 자아실현에 대한 특별한 의지도 노력도 없는 혜원(이승연분)이 남성의 사랑을 받게 되었는가? 결국 이 구도를 통해서 이 드라마는 여전히 남성은 실제로 드라마 속의 서준석(김승우분)은 혜진에게 "나는 당신의 무한한 성공 욕구를 감당할 만한 힘이 없다"라고 말함으로써 여성다움이 여성의 우선적인 조건임을 내세웠다. 이렇듯 <신데렐라>는 뒤틀린 여성상을 마음껏 찬양하였다. 이런 유의 드라마가 여성의 지위 향상에 엄청난 해를 끼치고 있음은 자명하다. 솔직히 말해서 필자도 언제나 신데렐가를 꿈꾼다. 어느 날 갑자기 백마탄 왕자품에 안기는 인생을 꿈꾸어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리고 이러한 인생을 거부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물론 신데렐라는 한마다로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여성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신데렐라가 되는가가 아니라 왜 신데렐라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누가 신데렐라를 만드는가이다. 좀 더 확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문제는, 정말 우리 사회에서는 신데렐라의 탄생이 가능한가이다. 우리 현실은 보자. 여성의 성공이나 신분 상승의 기회는 얼마나열여져 있는가, 그러한 사회적 성공이나 신분 상승을 위한 여성의 노력은 어느 만큼 수용되는가? 이것의 대답은 아주 회의적이다. 실제로 이 사회에서 성공(신분상승)할 수 있는 여성의 기회란 거의 제한되어 있으며, 또 그것을 향한 여성의 노력에 대한 평가 역시 최악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신데렐라가 있다'란 말이 허구이며, 또 이 말에 깔려 있는 성차별 이데올로기에 주목해야 한다. 날마다 텔레비전은 신분상승할 수 있다고 떠들어댄다. 텔레비전은 은연중에 "보통 사람도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신분상승)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너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까"라고 속삭인다 그러면서 중국에는 신분 상승의 불가능함을 자연스럽게 정당화한다. 엄밀히 말하면 신데렐라는 하나의 허위 의식인 셈이다. 즉, 지배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하나의 보수적인 틀이 뿐이다. 좀 더 여성학적으로 살펴보자. 신데렐라의 허위 의식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한 여성들은 자신의 무한한 창의성과 의욕을 계발하기보다는 타인에게 의존함으로써 얻는 안정감과 만족감에 인생을 걸게 될 것이다. 여성 스스로 '성공한 삶' 보다는 '여성으로서의 행복한 삶'에 비중을 둘 것이다. 가상의 신데렐라 기제가 바로 여성억압 기제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자.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평범한 교육과 사회적 매너, 지위를 얻은 여성들이 어떻게 상류층으로 진입할 수 있겠는가?



드라마 <신데렐라>에서 혜진이나 혜원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왜일까? 애당초 우리 사회는

신데렐라가 탄생할 수 없는 구조를 지녔기 때문이다. 실제로 드라마의 최종회에서 두 여주인공은 원래의 자신의 신분으로 되돌아간다. 그들에게는 또 그것이 행복인 것을 그려졌다. 이 드라마의 또다른 흥미거리는 바로 여성의 신분상승(신데렐라를 꿈꾸든 지간에)이 불가능한 원인을 개인적 차원으로 돌렸다는 데 있다. 드라마<신데렐라>를 보자. 우리 사회에서 보통사람(특히 여서)의 성공이란 없음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신데렐라가 될 수 있다는 허위위식을 갖게 하여 노력하도록 부추긴다. 예컨대 보통집안의 출신인 혜진은 신데렐라라는 허위위식 속에서 성공을 위해 매진한다. 그러나 그녀는 사악하고 비윤리적인 행동과 성격을 가져 결국 버림받는다. 여기에서 드라마가 보통 사람의 신분상승(성공)의 불가능한 원인을 사회 구조의 틀이 아니라 바로 개개인의 왜곡된 성격에 부과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면서 드라마는 시종일관 '마음이 착하고 현모양처이어야 사랑 받고 행복할 수 있다.' '여성의 사회적 성공은 결국 불행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라는 메시지를 강화하고 잇다. 결국 '신데렐라의 가능성'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우리 사회에는 신분 상승의 기회'가 없음을 교묘히 은폐하는 하나의 기제일 뿐이다.

어쨌든 드라마<신데렐라>는 어떤 행대로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통해서 신데렐라라는 허위의식을 깊이 수용하고 여성의 자립심이나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구를 내버리고 이 사회(남성지배적인)가 원하는 여성으로 거듭날지 모른다. 분명 이것은 여성들에게는 상당한 해악이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왜? 이것은 우리의 성차별 현실을 충분히 드러내고 의제화시켰기 때문이다. 한 번 귀족인 사람은 영위한 귀족인가.

우리는 드라마 속의 혜진의 '몰락'과 영국에서 벌어진 다이애나의 '귀족 탈퇴'가 서로 무관치 않음에 주목해야 한다. 차라리 '신데렐라 만들기'에 신경쓰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래도 언젠가는 이 신데렐라들이 유형화된 우리의 사회 구조를 무너뜨릴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유리구두

"유리 구두 임자를 찾습니다." 이것은 신부를 구하는 동화속 왕자의 외침이 아니다. LG의 마케팅 전략이다. 최근 LG가 실시한 화장품 판촉 전략은 무척 기발하였다. 그 전략은 다름 아닌 전국 10개의 대도시 백화점을 중심으로 '유리 구두 임자 찾기' 페레이드를 벌인 것이다.매장안에 유리 구두를 준비해 놓고 그 구두를 신어 동화속 신데렐라처럼 발에 꼭맞는 여성들에게 립스틱을 선물로 준다고 한다. 이 기발한 발상은 최근 종영한 <신데렐라>라는 드라마가 낳은 신데렐라 열풍에 힘입어 여성들의 소비 의식을 뒤흔들어 이윤을 극대화시키겠다는 야심찬 의도에서 나온 듯하다.

'유리 구두 발맞추기', 얼마나 기막힌 상술이다. 이 판촉 전략은 바로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성을 상품화하는 기업 상술의 한 단면이다. 한마디로 기업의 마케팅 전략은 우리 문화의 '여성다움' 이데올로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성의 상품화에 일조 하게끔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최근 잘나가는 업종 중의 하나로 '이미지 컨설팅'을 들 수 있다. 이 업종은 제 15대 대선의 후보자들이 벌이는 이미지 메이킹 열풍과 맞물려서 더욱 번창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미지 컨설팅의 주고객은 유명 인사나 전문직 종사자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보통 시민들이라는 사실이다. 요즘과 같은 대중사회에서 우리의 몸(육체)은 더 이상 정신을 담는 그릇 혹은 정신적 가치를 보완해 주는 단순한 하위개념이 아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몸은 그것은 어떻게 가꾸어지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정신 수준은 물론 존재 의미까지도 정립시켜 주는 키워드가 되었다. 한마디로 우리가 아무리 부인하고 거부한다고 해도 요즈음 시대에 가장 중요한 자아 표현 가치는 바로 육체 관리, 즉 이미지 만들기이다. 수십만원을 주고 이미지 컨설팅을 받은 한 자동차 세일즈맨의 고백이다. "전에는 나는 사나운 인상과 촌스러운 스타일을 가졌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외모 컴플렉스에 빠져서 매사를 자신이 없고 주변 사람들도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날이 갈수록 나는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침묵하게 되었고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지 컨설팅을 받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나는 이미지 관리 사가 조언하는 대로 기존 스타일을 바꾸었다. 그랬더니 주변 사람들은 눈에 띄게 나에게 관심을 표명했으며 나 또한 스스로 외모에 자신감을 갖게 되어 매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는 요사이 아주 재미있게 직장생활과 가정 생활을 하고 있다." 이 세일즈맨의 고백은 정신적 가치에 기반을 둔 몸가꾸기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물론 이 성공 사례처럼 이미지 관리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면 엄청난 돈을 투자해도 아깝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우려해야 할 문제는 바로 이미지 바꾸기가 아니라 획일화된 이미지 창출에 있다. 특히 여성들의 왜곡된 이미지 창출은 큰 문제이다. 왜 여성들의 이미지는 왜곡되는가?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 상술이 '여성'의 몸관리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인 획일성이 박힌 한 가지 형태의 여성 이미지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우리들에게 있어서 몸가꾸기는 중요한 성공의 관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몸가꾸기의 기본 개념이 '건강'으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섹시함'으로서의 가치로 변모된 것이다. 실제로 여성들의 날씬함에 대한 욕구는 '건강유지'나 '활동하기의 편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성공의 요소'이자 '성적 어필'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시대의 많은 여성들은 여성 스스로의 날씬함, 매력적임에 대한 욕망을 자신 스스로의 경험이나 욕구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 혹은 이익의 대상에서 비롯된다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섹시한 여성 혹은 날씬한 여성의 현실이란 바로 여성의 주체적 경험속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소비의 대상으로 만들어진 경험인 셈이다.

여성의 날씬함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뚱뚱한 여성은 대접을 받을까? 아마 그 여성은 '자기 관리에 소홀한 게으르고 미련한 여성'이라고 평가받을지 모른다. 머잖아 그런 평가를 받아 온 여성은 사회에서 비난받진 않고 성공하기 위해서 그러한 압력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돈으로 날씬해지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이다. 여전히 '머리 나쁜 것을 참을 수 있지만 못생긴 것은 용납할 수 없어'라는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가 판을 칠지 모른다. 그러나 여성의 외모가 능력보다 더 중시되는 사회일수록 여성들은 다른 사람의 욕구나 목적에 의해서 자신의 인생을 채우게 될 것이다.

지금 시내 중심지에 나가 보자. 여성들은 많이 있지만, 그들의 이미지는 하나이다. 대다수 여성들의 몸매 가꾸기, 화장술, 헤어스타일, 심지어는 능력 발휘 방법까지도 동일하다. 또 그들이 소유한 여성의 사회적 성공에 대한 신화까지도 같다. 그래서 어떤 뜻있는 여성이 '날씬하기'를 거부하거나, '자신만의 독특한 삶'을 발휘하려 한다면, 그녀는 동시에 '소외'와 '배제'라는 거대한 압력과 싸울 준비를 해야만 한다. 여성의 몸은 돈에 의해서 대상화되고 하나의 볼거리로 한 것 발휘되었다. 그래서 "여성은 외모"라는 기존의 성차별 관념이 더욱 고착되었다. 어떻게 여성은 볼거리

대상으로서의 평가를 거부할 것인가? 주변 여기 저기에서 여성들의 '유리 구두 발맞추기'가 지속되는 한 , 그들이 누릴 삶의 다양성은 오로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외모에 신들린 사회

동화 <백설공주>에 나오는 왕비는 항상 거울에게 확인하였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냐"라고.... "숲속에 사는 백설공주가 가장 예쁘다"라는 정직한 거울의 답변 때문에 결국 백설공주는 왕비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런 후 왕비는 거울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로 찬사를 받게 되었다. 외모 때문에 딸이 새엄마에게 살해당한 내용의 이 동화는 우리에게 하나의 문제를 던져 준다. 정말 우리들에게 외모는 그토록 중요한가?

이러한 의문을 갖고 <백설공주>를 읽을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대체로 우리들은 백설공주는 빼어난 외모를 지니고 있다고 생생할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여주인공은 백설공주에 그치기 않는다. 모든 동화의 여주인공은 아름답다. 그래서 <숲 속의 잠자는 미녀> , <신데렐라> , <인어공주>는 그들의 외모에 끌린 왕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역시 여자는 예뻐야 해"라는 말은 절대적인 상식이다. 우리들은 여자를 보면 쉽게 "아름다운데", "예쁜데", "귀여운데", 또는 "못생겼네", "촌스럽네", "투박하네" 등등의 외모를 기준으로 평가하게 된다. 남자를 평가할 때도 이처럼 외모 지향적일까? 그렇지 않다. 남자들에 대한 평가는 철저히 사회적 능력 위주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나라의 속담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여자 나이 삼십이면 눈먼 새도 돌아보지 않고 여자 나이 사십이면 장승도 돌아보지 않는다.', '여자는 첫째는 인물이요, 둘째가 마음씨다', '여자는 가지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면 예쁘게 될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하지만 젊은 남자는 자기 나이보다 늙어 보인다면 사회적으로 신임을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한다.' 이처럼 외모 지향적인 여성 평가에 대한 사회적 통념 때문에 수많은 여성들은 외모 컴플렉스에 빠지게 된다. 우리 사회에 뿌리깊은 외모에 대한 고정관념은 여성들에게 인생에 있어서 외모가 가장 중요하고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느끼게 한다. 따라서 선망할 만한 아름다운 대상을 설정해 놓고 끊임없이 그것을 추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칫 외모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이 열등감을 둔갑하여 결국 여성 스스로가 자존적 주체로부터 일탈하는 현상을 보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외모 컴플렉스이다. 외모 컴플렉스란 여성을 사회속에서 주체적 자아를 적극 실현시키는 능동적이고 개성 있는 존재가 아니라 순종적이고 의존적인 그리고 남성의 부속물로 평가하는 메커니즘이다. 물론 여성에게만 외모 컴플렉스가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성에게 있어서 외모란 성적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기능적으로 규정되는 남성의 외모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대체로 우리 사회에서 평가되지만 남성은 '여성'을 부양하고 자아를 실현시키는 '유능함'을 기준으로 평가된다. 외모지향 이데올로기는 언제부터 형성되었는가?



외모 컴플렉스로 인하여 이데올로기가 시작된 것은 아마도 분업 현상이 뚜렷해진 원시 공동사회 말기부터인 듯싶다. 생물학적 조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별 분업이 이루어진 윈시공동 사회에서는 적어도 남녀간의 '사회적 차별'은 존재하진 않았었다. 이 시기의 이상적인 여성상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성이 아니라 풍요로운 물질을 생산하고 생명을 생산하는 주체적 존재, 그리고 그것을 통해 생계 유지를 가능케 하는 건강하고 풍만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원시시대 말기 생산력의 발전과 사회적 잉여의 발생으로 인하여 남녀관계의 구도는 크게 변하였다. 여성의 역할 역시 새롭게 구성되었다. 가부장제의 남녀관계는 남성에 의한 여성노동력의 지배를 말한다. 이러한 지배는 여성이 경제적으로 필요한 생산 자원에 다가가는 것을 배제한다. 따라서 가부장제에 기발한 노예제. 봉건제사회의 여성의 지위는 남성의 사회. 정치. 경제적 지위를 통해서 규정되었다. 이 시대의 여성의 최대의 역할은 아들을 낳고 정숙하게 가사일을 담당하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서 여성들은 서서히 사회적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공적인 임무 대신 사치와 외모 치장 등에 관심을 돌이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여성들의 신분상승 기회는 공적인 사회활동보다 오히려 사적인 외모가꾸기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회에서 가장 환영받는 여성상은 '꽃과 같은 아름다움'이며 이것은 남성의 권력과 권위에 버금가는 상징이었다. 이 시대의 미인이란 장식물처럼 작고 연약한 인형처럼 여린 외모를 지닌 여성이었다. 이러한 미인은 마치 남성의 소유물처럼 보호받고 동시에 남성의 권력과 권위(능력과 성공)를 빛내 주는 부차적인 도구이며,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권위와 부차적인 도구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권위와 지배에 수반되는 종속의 산물이었다. 이렇게 미에 대한 기준은 사회의 변모에 따라서 그리고 지배 이데올로기 형태에 따라 변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 역사 이전 사회의 신화나 전설속에서 미인이란 생명의 생산자, 풍요의 여신, 우주창생의 어머니로서 풍만한 여성의 모습이었다.

조선 시대에서 미인은 '난초', '모란' 과 같은 꽃에 비유되었다. 특히 고전소설에 등장하는 미인들은 하나같이 '보름달 같이 둥글고 흰 얼굴', '작고 가는 눈', '앵두처럼 붉고 탐스러운 입술', '버들가지와 같은 가는 허리', 그리고'꽃같이 아름다운 자태'를 지녔다. 동시에 이같은 외면적인 특징뿐만 아니라 순종이라는 전통적인 여성상의 기준을 설정하고 이것을 사회적 규범으로 여성들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20세기 초 서구 문물의 도입과 여성의 교육 기회의 확대는 우리의 미적 기준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아름다운 여성이란 서구식으로 갸름한 얼굴, 쌍꺼풀진 눈, 늘씬한 키 등을 소유해야만 했다. 이러한 미는 전통적인 여성의 기준과 판이하게 다른 양상이다. 미의 이러한 기준은 특정 계층의 여성들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보편화되었으면 산업화 이후 이같은 미의 판단 기준이 더욱 본격화되었다. 그 결과 여성들을 겨냥한 외모가꾸기 산업은 거대하게 확장되었고 외모 컴플렉스를 더욱 강화시켰다. 여성들의 외모 컴플렉스는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여성억압 이테올로기로 구축되었다. 시장경제 원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가치를 규정하는 외모를 컴플렉스는 곧 이러한 컴플렉스를 극복하려는 욕구를 자극하는 자본과 결합하여 엄청난 미 산업을 창출함으로써 여성억압 기제로 괴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렇듯 원시시대부터 초기 자본주의 시대까지 미인의 기준은 그 사회의 상황변화에 따라 변화하지만 이것이 남성 중심 사회가 설정한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그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역사적으로 미인이란 '사고력이 없는 아름다운 외모의 순응적 성격의 여성'이었으며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아름다움이 것이다. 가부장제도 즉 남성지배 이데올로기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여러가지 모습을 띠고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 아직도 신데렐라를 꿈꾸고 있는가

"나갈 데가 있으면 좋겠어. 잠이나 자야겠어. 눈을 감고 있으니까 좋아. 꿈이나 꾸고 있겠어"

이것은 광고 카피가 아니다. 최근에 방송되었던 MBC-TV<길위의 여자>라는 아침 드라마 속의 의사부인(김청 분)이 자신의 삶을 한탄하면서 읊조린 대사다. 이 여성은 한마디로 말하면 '신데렐라 컴플렉스'에 빠진 주부이다. 콜레트 다울링은 여성이 한 개인으로서의 욕망과 창의성을 계발되지 않는 상태로 묶어 두려는 심리 상태를 '신데렐라 컴플렉스 '라고 정의하였다. 그런데 특히 이런 증세는 억압된 태도와 불안에 뒤얽혀 있는 여자들에게서 쉽게 나타난다고 한다. 이러한 상태에 빠지게 되면 당사자는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 혹은 해야만 할 때 일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감을 느끼게 되어 그 일을 쉽게 포기해 버린다. 다시 드라마 <길위의 여자>의 의사 부인으로 되돌아가 보자 이 여성은 혼자서 무엇인가를 시도하고 할 때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다. 또한 이 여성은 자신의 일에 대하여 무력감이나 공포감을 갖고서 오직 남편의 보살핌을 통해서 자아를 완성하고자 한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는 '여자 팔자 뒤웅박'이라고 고장 관념에 깊숙히 빠져 우리 주변에는 신데렐라 컴플렉스에 함몰된 여성들이 유난히 많은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사회가 유난히 여자들을 순종과 의존을 미덕으로 삼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사회화시켜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여성다움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흔히 우리 사회와 같은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는 사회적으로는 비주체적이고 부수적인 존재로, 개인적으로는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성격을 가진 여성상이 가장 바람직하게 수용되곤 한다. 이같이 가부장적인 틀로 짜여진 사회에서 여성들이 이러한 성격과 역할을 갖는 것은 당연할 결과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남성들은 표면적으로는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하면서도 내면으로는 순종적이고 의존적이기를 바라게 된다. 이러한 여성에 대한 이중적인 가요를 눈치챈 여성들은 스스로 '여성다움'을 선택하게 된다. 아마 이 사회에 쉽게 적응하는 현명한(?) 여성일수록 이렇나 선택에 탁월할지 모른다. 대체로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면 여성들은' 성공한 개인으로서의 삶'과 '여성으로서의 행복한 삶'속에서 방황하게 된다. 여성들은 개인이 추구한 성공과 성취에 대하여 끊임없이 불안감을 느끼게 되며 심리적인 압박감 속에서 결국 의존적인 삶을 걷는다. 우리는 남편을 통해서 성공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여자들, 혹은 남편(또는 남성)의 도움을 통해서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공을 얻는 여자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들이 바로 신데렐라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여성들이다. 이 시대의 많은 여성들이 언제까지 이같은 신데렐라를 꿈꾸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신데렐라처럼 자신의 삶을 바꿔 줄 그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면서....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 이제 우리 사회는 여성 스스로가 자립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만큼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이제 사회는 변했다. 타인을 통해서 성공할 만큼 세상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어느 누구든지 이제는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자립심을 키워야 한다. 그것이 세상을 따라 잡는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

아마도 <길위의 여자>의 의사 부인과 같은 신데렐라형은 머잖아 '사랑스러운 여자'가 아니라 '쓸모 없는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로 방치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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