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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1896년 8월 이전의 역사



제 1 절 선사시대

1. 춘천지역 선사유적 분포의 자연환경적 배경

1)자연환경에 대한 인식

오늘날 선사시대의 문화를 연구할때 자연환경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고고학 관련서적 들의 첫장은 역시 자연환경에 대한 서술이며, 발굴현장에서는 고고학적인 발굴조사와 아울러 발굴지역에 대한 옛 자연환경 조사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그만큼 자연환경이 인간이 활동에 미치는 영향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자연환경속에서 인간활동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연환경은 인간생활의 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먹이를 확보해 생존을 유지해 가는 방도, 즉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서 주변 자연환경요소들(예컨대 지형. 기후. 식생 등)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에 선택적으로 적응하는 방법을 효과적으로 익혀야 한다. 이처럼 주변환경에 좀더 효율적으로 적응하기 위해서 인간은 문화를 발달시켜 왔으며, 그 문화는 인간집단과 주변환경 사이의 조종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우리가 어느 한 지역의 선사시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발굴된 유물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자연환경상태와 거기에 적응한 인간의 적응전략을 검토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식량을 획득하여 효율적으로 자신을 보존시키기 위해 주변환경에 대한 정보를 문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음 세대로 전수 시켰기 때문이다. 발굴을 통해 찾아진 유물은 옛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전해주는 것이지만, 자연환경은 그러한 생활상의 배경을 지시해주는 것이기에 그 의미가 크다. 옛 자연환경을 살펴봄으로써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떠한 자연조건 속에서 환경의 제약과 혜택을 받으며 삶을 꾸려왔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2) 춘천지역의 일반적인 자연환경요소

옛 자연환경 연구는 발굴현장에서 채취한 여러 시료들을 토대로 하여 토양분석, 식물자료(꽃가루분석), 동물자료분석 등이 행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춘천지역의 선사유적 발굴조사에서 옛 자연환경을 복원해 보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의 유적 발굴조사에서 옛 자연환경조사도 아울러 진행되기를 기대하며, 여기에서는 현재 춘천지역의 선사유적 분포와 관련되는 자연환경요소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특정한 한 지역내의 주거유형과 생계활동에 영향을 끼치는 일반적인 자연환경요소로는 지형. 기후. 토양. 식생. 하계망 등을 들 수 있다.

(1)지형 및 지세

지형은 한 지역의 기후뿐만 아니라 토양의 특성에도 영향을 끼치며, 거주지를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가장 일차적인 변수로 작용한다. 춘천지역의 지형은 흔히 소쿠리 모양의 분지로 일컬어지는데. 그 분지의 북쪽에는 오봉산줄기가, 서쪽에는 삼악산줄기, 서남쪽에는 봉화산줄기, 동남쪽으로는 대룡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어 이 지역이 방어력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남북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루며 형성된 분지의 중심부에는 춘천지역의 주요한 수자원인 북한강과 소양강 두 줄기가 합쳐 흐르는데, 이 강안을 따라 수많은 선사유적이 분포되어 있다. 또한 분지 내에는 불규칙한 방향의 낮은 구릉지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곳엥서도 선사시대의 취락유적(온의동. 칠전동유적)이 발견된다.

(2)기후

기후는 오랜 기간 동안 관측되어온 기후요소, 예컨대 기온, 강수량, 바람, 습도 등 을 조합하여 그 평균치를 나타낸 것을 말하며, 이들 기후요소의 분포를 결정하는 데에는 위도, 지형, 해류와 같은 기후인자가 작용하게 된다. 특히 강원도 지역은 태백산맥이라는 지형적 조건이 기후요소에 영향을 미쳐 영동과 영서의 기후 차가 뚜렷이 나타나는데, 춘천지역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영서내륙에 위치함으로써 내륙성기후의 특성이 있다. 또한 지역특성에 따라 세분된 기후구로 볼 때는 남북간이 중간적 현상을 보이는 중부내륙형에 속한다. 춘천분지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는 한랭건조하며 여름에는 고온다습한 편이다. 특히 기온의 한서 차가 심하여 연평균기온은 10℃이지만 겨울에는 영하 20℃이하의 혹한을 기록할 때도 있다. 연평균 강수량은 약 1,250mm 이며, 여름철인 7,8월에 집중된다. 바람은 비교적 약하게 부는데,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는 서풍 또는 북서풍이 우세하나 여름에는 동풍이 우세하다.

(3) 토양

춘천지역은 북한강과 소양강유역의 저지대를 제외하고는 대개 산악지형이어서 전체적으로 토양발달이 미약한 편이다. 하지만 북한강과 소양강유역에는 상유지대의 화강암이 침식되고 부서져서 하류로 운반되어 퇴적된 충적대지가 발달되어 있는데, 이곳이 토양은 부식함유량이 높은 모래질 향토로 이루어져 잇다. 주기적인 홍수 때문에 이루어진 모래질 충적토양은 배수가 용이할 뿐만 아니라 강 제방의 수생식물에서 얻어지는 상당한 양의 비옥한 부식토를 함유하고 있어서 농작물 재배에 매우 유리하다. 중도를 비롯하여 북한강과 소양강줄기의 사질충적대지에 수많은 선사유적이 분포하는 것도 이러한 토양조건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4) 식생

식생은 지표 상에서 생육하고 있는 식물의 집합체를 말하며, 기후대에 따라 규칙적으로 변화한다. 인간은 각종 식물을 먹을거리로 삼거나. 연료, 건축재료, 생활필수품의 원료 등으로 활용하며 삶을 꾸려왔다. 따라서 식물은 인간에게 중요한 천연자원의 하나인 셈이다. 자연적인 색생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는 앞서 지적한 기후, 지형, 토양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상호간에는 밀접한 인과관계가 있다. 춘천을 비롯한 북한강유역의 삼림지대에는 생장과 재질이 뛰어난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 분비나무 등의 침엽수와 물참나무, 물푸레나무, 서어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등의 활엽수가 분포하고 있다.

(5) 하계망

춘천지역의 선사유적분포와 그 배경이 되는 자연환경 사이의 상관관계는 기본적으로 북한강과 소양강이라는 주요한 두 강의 위치와 그 대소지류들에 의해 형성된 하계 망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북한강본류와 설악산에서부터 내려오는 소양 강은 춘천분지의 중심부에서 만나 하류로 흘러가는데, 북한강유역에는 지촌천, 월송천, 금산천 등의 소지 류가 유입되고, 소양강유역에는 추곡천, 부귀천, 지내천, 만천천, 공지천 등의 소지 류가 유입되어 하계 망을 구성한다. 두 강유역에는 홍수기에 상류로부터 부유물을 많이 포함한 퇴적물을 신속히 운반시켜 이루어진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하여 있는데, 이곳에 오늘날뿐만 아니라 선사시대에도 대규모로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춘천지역의 선사유적 조사 및 연구

1)일제강점기의 유적조사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 나라 근대고고학의 시작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고고학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려고 할 때 빠뜨리지 말고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일제강점기에 행해진 연구들이다. 이시기에 춘천지역의 선사유적 및 유물들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글은 없지만. 강원도내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유물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한 아리미쓰의 글이 주목된다. 물론 이 글의 대부분은 지표 채집된 유물을 소개하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오늘날 강원도 선사고고학의 배경을 살펴볼 수 있는 '강원도 선사고고학 연구의 첫 단추'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그가 이 글에서 다른 한강 상류지역, 즉 춘천지역의 선사유적은 천천리. 퇴계동. 거두리. 추전리유적이다. 소양강 줄기에 있는 천전리 고인돌 및 돌무지무덤은 일찍부터 주목되어 온 편인데, 1931년에 춘천고등보통학교의 나가오까가 조사한 고인돌 1기에서는 적갈색의 민 무늬 토기조각 여러 점과 반달돌칼 1점, 간돌검조각 1점이 나왔고, 또 다른 1기의 돌무지무덤에서는 간 돌검 1점, 간 돌화살촉 11점, 대롱옥 7점이 나왔다. 이것은 계획된 전식발굴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 아니라 내부 꺼묻거리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에서 마구잡이로 파헤쳐진 일례로 보인다. 따라서 유구의 구조와 정확한 유물 출토상태 등은 알 길이 없고, 다만 아리미끄의 손길이 닿아 유물에 대한 설명만이 이제 기록으로 남겨진 셈이다. 그는 또한 춘천중학교 수집품 중 퇴계동에서 나온 반달돌칼, 간돌검, 홈자귀, 대패날, 거두리 에서 나온 간 돌화살촉, 추전리에서 나온 간 돌검 등을 소개하였고, 춘천 부근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비파형 동검 2점이 도면으로 제시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그 밖의 다른 자료에 의하면 석사 동에서 고인돌 1기와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고, 학곡리에서도 고인돌 7기와 빗살무늬토기가 조사되었다. 율문 리에서도 고인돌이 조사된 바 있다. 이렇듯 이 시기의 유적조사란 것은 대개 눈에 뛰기 쉬운 고인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아리미쓰가 소개한 춘천중학교 수집 품들도 고인돌에서 나온 껴묻거리가 한군데 모아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본다면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려니와 춘천지역의 선사유적 조사가 출발점부터 제 길을 바로 찾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체계적으로 계획된, 그리고 그 과정이 꼼꼼히 기록으로 남겨진 유적조사란 처음부터 기대하기 어려운 듯 한데, 다만 호기심 많은 이들의 손에 의해 유구가 들추어져 그 기대치에 상응하는 각종 유물만이 덩그러니 남은 셈이다. 이러한 유물들은 당시에 호사가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자극제가 되었을는지는 몰라도 , 오늘날 주어진 자료로부터 최대한의 정보를 얻어내려고 노력하는 고고학 연구 자들에게는 더 많은 궁금증을 남겨두었다.



2) 1960년대의 유적조사 및 연구

광복이후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춘천지역의 선사유적 조사 및 연구는 진행되지 못하여 공백기로 남아있다. 이는 광복후의 사회적인 혼란, 6.25동란 등을 거치면서 우리 나라의 고고학 조사 및 연구가 가장 침체되었던 시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후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지역의 선사유적조사는 다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김원룡은 1961년에 일제강점기부터 주목받아왔던 소양강변의 천전리 고인돌 떼를 답사하여 이 지역 특유의 분포상황 및 구조를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였다. 이 글은 뒤에 국립박물관에서 실시한 천전리 고인돌 및 돌무지무덤 발굴의 기초자료가 되었다. 한편 우리들에게 비교적 널리 알려진 교동동굴유적 이 발견되어 보고된 것은 1962년의 일이다. 신석기시대의 특이한 동굴유적이라는 점과 풍부한 유물, 교동토기라고 명명된 납작밑 계통의 토기, 사람 뼈의 발견 등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정식 발굴에 의한 조사가 아니라 선심여대건물 신축공사중에 우연히 발견되어 스습된 점과 다소 생소한 유물양상으로 인해 앞으로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를 안겨주었다. 1966년과 1967년 두차례에 걸쳐 국립박물관이 드디어 천전리 고인돌 및 돌무지무덤을 정식 발굴하였다. 춘천지역 선사유적 발굴사의 첫 장이 열린 셈이다. 발굴을 통하여 이 지역 고인돌의 형식이 돌무지를 하부구조로 하는 새로운 것임을 밝혀내었다. 비슷한 시기에 춘천을 중심으로 한 북한강 유역의 선사문화에 대한 최초의 선행연구가 조동걸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는 <춘천지방의 선사사회 고찰>이란 글을 통하여 북한강 상류-소양강줄기에서 발견된 고인돌 유적의 분포를 소개하고, 이를 맥국의 옛터라는 문헌자료와 접목시키고 있다. 그의 주된 관심은 선사사회에서 초기국가단계로 이어지는 시기에 대한 것인데, 체계 적인 발굴자료가 모아지지 못했던 시기이므로 춘천일대 선사문화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3) 1970년대의 유적조사 및 연구

1970년대 초에는 소양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는 지역에 대한 집중적인 선사유적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대곡리에서 거인돌 2기, 추전리에서 고인돌 1기, 내평리에서 고인돌 3기와 신석기시대의 돌깐집터 1기 청동기시대의 집자리 1기가 발굴되었다. 이 때의 발굴조사는 역시 고인동레 집중되어 있으며, 작업도중 우연히 신석기시대의 돌깐집터가 발견되어 또 하나의 새로운 자료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아무튼 댐건설로 유적이 파괴될 위기에 놓인 경우에 긴급구제발굴이 이루어진 최초의 선례가 된 셈이며, 선사문화에 대낳 이해가 좀더 성숙된 사회분위기를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소양댐 수몰지구 유적 발굴조사의 기초자료는 이미 조동걸과 강인구에 의하여 마련되어 있엇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주러 북한강과 소양강줄기에 분포되어 있는 대고리. 추전리. 내평리. 발산리. 지내리. 금산리. 현암리 등지의 고인돌을 소개하였다.

한편 1977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하여 북한강줄기의 선사유적에 대한 지표조사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중도 및 신매리. 지내리. 등기에서 유물 산포지가 확인되었다. 이는 1980년대에 중도 및 그 인근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연차적으로 이루어 져 춘천지역의 선사문화에 대한 연구가 고조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강변의 사질 충적대지가 아닌 온의동의 한 구릉지에서 구멍무늬 토기. 덧띠토기. 간돌도끼. 간돌화살촉. 반달돌칼 등의 유물이 채집되엇다. 이 유적은 그릉지라는 입지조건, 구멍무늬토기와 덧띠토기가 동시에 발견된다는 점 등이 주목된다.

4)1980년대의 유적조사 및 연구

1980년대는 춘천지역의 선사유적조사 및 연구가 가장 활기를 띠고 신행되엇던 시기인데, 주러 중도 및 그 인근지역에 대한 발굴이 집중적으로 이루어륵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중도의 선사유적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77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의 북한강 유역 지표조사 과정에서 찾아진 이후 그 유적의 방대한 규모와 중요성에 따라 1980년부터 연차적으롤 발굴이 진행되면서부터이다. 첫 해에는 중도에서 초기철기시대의 집자리 1기 (중도 1호)가 발굴되었고, 다음해임 1981년네는 신매리에서 청동기 시대 후기의 집자리 2기(신매리 1.2호)가 발굴되었다. 이러 1982년에는 중도에서 또다시 초기철기시대의 집자리 1기(중도2호)가, 1983년에느 고인돌 2기(중도 1.2호)가 발굴되었다. 1984년에는 신매리에서 두번째 발굴이 진행되어 집자리 1기(신매리 3호)와 고인돌 3기(신매리 1.2.3호)가 발굴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연차 발굴은 일단락되었다.

한편 1981년에는 중도 선사유적발굴조사단이 구성되어 중도내의 돌무지무덤 1기와 고인돌 2기 가 발굴되었고, 1983년에는 다시 강원대하詢 박물관에 의해 중도 고인돌 1기가 발굴 조사되었다. 또한 1984년에 한림대학교 박물관은 신매리에서 고인돌 5기와 파괴된 주거지 1기를 발굴하였다.

이렇듯 춘천지역 선사유적의 대표격인 중도 유적은 그 분포범위가 넓다는 것 뿐만 아니라. 신석기시대부터 초기철기-원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동안의 연속된 분포시기를 보이는 취락유적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따라서 1980년대에 발표된 춘천지역 선사문화에 관한 글들은 모두 중도유적 발굴결과와 지표조사 내용을 토대로 하여 이루어진 것들이다. 중도에서 지표조사를 통하여 채집된 유물들을 소개한 글은 여러 편 되며, 이를 종합화한 성격의 글은 강원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간한 [중도유적 지표조사보고]이다. 또한 춘천지역의 선사유적중 수습조사나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비교적 널리 알려진 교동동굴. 온의동. 중도. 신매리. 천전리유적 등을 소개하념서 그 중요성을 강조한 글도 있다.

한편 북한강 유역의 중도. 신매리. 천전리 등지의 고인돌 발굴결과를 토대로 하여 이 지역 고인돌구조에서 돌무지가 필수적인 요소임을 밝히고 '적석부가지석묘'하는 새로운 유형을 서러정한 글이 있다. 이것은 그동안 북한강 유역의 춘천일대에서 여러 차례 진행된 고인돌 발굴을 통하여 자료들을 쌓아가고, 이에 대한 분석작업이 치밀하게 이루어륵음을 보여즈는 상당히 돋보이는 글이다.

이제까지 정리한 바대로 1980년대에는 발굴건수만도 8차례에 이르고, 그에 따라 모아진 자료들을 토대롤 춘천지역의 선사유적을 정리한 그도 상당수 발표되어 이지역의 선사문화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지역 선사유적조사가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과 같은 외부기관에서 주도하여 이루어지다가, 강원대학교 및 한림대학교 박물관과 같은지역연구기관이 참여하는 방향으로 전이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와 아울러 중도 및 그 인근지역에 대한 발굴이 여러 기관에 의해 분산되너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를 종합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과 유적보존의 문제가 중요한 과제로 남게 되었다.

5)1990년대의 유적조사 및 연구

1990년대로 들어서서는 발굴이 활발히 진행되기보다는 지난 80년대의 유적발굴에서 얻어진 자들을 모아 춘천지역이 선사문화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글들이 여러편 발표된다. 이처럼 미시적으로 특정한 한 지역의 고고학적 자료를 종합하여 나름대로 그 문화의 특징을 밝혀보려는 비슷비슷한 성격의 글들이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발표될 수 있을 정도로 이 지역에서의 선사유적조사느 그동안 비교적 활발히 진행되어온 편이다. 하지만 이 글들이 춘천을 중심으로 한 북한강유역 선사문화연구의 완결편은 아니며, 오히려 앞으로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를 제사한반드시 것이기도 하다.

한편 1994년 가을 한림대 박물관은 쁁鱁전동 택지개발지구내에서 시굴조사를 통해 덧띠토기. 검은간토기. 쇠뿔모양손잡이.화살촉. 가락바튀 등을 찾아 청동기시대 후기의 취락유적을 확인하였고, 다음해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1995년 여름 한림대 박믈관은 다시 신매대교 건설지역내에서 청동기시대 집자리 여러 기를 찾아 현재 발굴이 진행중이다. 이처럼 신매리와 칠전동에서 이루어진 발굴은 각각 청종기시대 전기의 구멍무늬토기문화와 후기의 덧띠토기문화를 살펴보는데 주요한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표 1> 춘천지역의 선사유적 발굴사

연도

유적명

시대

발굴기관

발굴기간

참고문헌

1966

천전리고인돌

청동기

국립박물관

(윤무병)

8.3-8.17

김재원,윤무병,<천전리유적>, 『한국지석묘연구』국립박물관. 1967

1967

천전리고인돌

청동기

4.7-4.13

1971

대곡리, 추전리, 내평리 고인돌, 내평리 돌깐집터 및 움집터

신석기∼청동기

국립박물관(한병삼),서울대(최몽룡), 문화재관리국(이호관)

5.8-6.3

한병삼외, <소양강수몰지구유적발굴조사>, 『팔당, 소양댐 수몰지구 유적발굴 종합 조사보고』,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4.

1980

중도집자리

초기철기

국립중앙박물관

(이건무)

7.11-8.3

이건무외,『중도:진전보과자1』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제 12책,

1980.

1981

신매리집자리

청동기

국립중앙박물관

(이건무)

6.3-6.29

이건무외,『중도:진전보과자2』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제 13책,

1981.

1981

중도 고인돌 및 돌무지무덤

청동기∼초기백제

강원대박물관

(박한설)

10.12-12.2

박한설, 최복규, 노혁진, 최은주,『중도 발굴조사 보고서』,중도 선사유적 발굴조사단, 1982.

1982

중도집자리

초기철기

국립중앙박물관

(지건길)

5.20-6.19

지건길, 한영희,『중도:진전보고3』,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제 14책, 1982.


3. 춘천지역의 선사사회와 그 문화

1)공백으로 남아있는 춘천지역의 구.중석기 문화:유적의 발견 가능성

춘천지역에서 인간생활의 최초 증거인 구석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잇다. 하지만 북한강 사류의 내육 깊숙한 산악지애인 양구 상무룡리에서 대규모 구석기유적이 발견디어 1987년부터 89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발굴된 바 있고, 북한강으로 유입되는 한 지류인 홍천강줄기에서는 지난 1991년에 하화계 1리의 '사둔지'라는 곳에 서 중석기유적이 발굴되어 다량의 흑요석제 세석기가 드러났다. 4薡한 1995년에 하화계 2리의 '도둔'이라는 곳에서도 중석기유적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상무룡리와 하화계리의 주 지점에서 나타나는 우적분포 입지를 고려해 볼 때, 춘천지역에서도 북한강 줄기를 따라 고토양층을 포함하고 있는 하안단구 지점드렸을 조사할 경우 이와 유사한 구. 중석기 시대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2)신석기 시대의 사회와 문화

(1)교동동굴유적: 제기되는 문제점

교동동굴유적은 1962년에 성심여대 신축공사중 우연히 발견된 이래 비교적 널리 알려지그런데 춘천지역의 신석기 유겆이다. 교동동굴유적이 많이 알려진만큼 역설적으로 우리는 교동동굴 유적의 많은 부분을 앙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교동유적은 우리에게 해결해다 할 많은 과제를 안겨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영서내룩지역에서 교동유적과 동일한 유형의 유적이 다시 발견된 예가 없는 유일한 것이기에 더욱 생소한 느낌을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서는 교동동굴유적에서 제기되는 AAUX 가지 문제점을 짚어보려고 한다.

첫째, 유적의 성격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 유적은 과연 주거용 공간인가 아니면 무덤유적인가. 그도 아니면 애초에 주장된대롤 주거용으로 쓰이다가 폐기된 후 무덤으로 재사용된 것인가? 이것은 풍부하게 발견된 신석기 유물이 실생활용품인가 아니면 부장품인가 하는 문제화도 연결된다. 부덤으로 여겨지는 것은 발견 당시 3 구의 인골이 내부 중앙쪽으로 발을 모은 상태로 누워있었다는 즈민들의 제보를 토대로 한 것이고, 주거용으로 쓰인 흔적은 천정에 남아 있는 그을음을 바창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무덤으로 보는 데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그것는 인골이 점문연구자에 의해 진행된 발굴을 통해서 알려진 것이 아니고, 공사중 우연히 발견되어 썻어진 다음에 주민들잉 증언을 통해 밝혀진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인골이 신석기 유물과 동시기의 것인지, 후대의 매장인지 하는 의문점이 제기 되기도 한다. 아무튼 이 유적이 주거용이든 무덤이든 간에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주거형과 무덤연구에 독특한 자료를 제공한 것은 틀림없다.

둘째, 유적의 연대에 관한 것이다. 교동유적은 신석기시대 전기유적인가, 후기유적인가? 당초에 이 유적은 토기의 무늬가 축소된 점, 납작밑인 점, 바탕흙이 찰큪질인점, 그리고 석기가 상당히 발달되어 있는 점 등을 들어 민무늬토기문화와 접촉된 신석기 최말기 유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산리유적 발굴결과 입술부에만 국한된 무늬, 토기손잡이, 납작밑이란 요소가 오히려 오산리 하층의 이른 시기 토기형태와 휴사하다는 점이 제기된다. 특히 오산리에서 많이 나오는 결클衁 낚시가 교동에서도 1점 나타났기 때문에 더욱 오산리 유적과의 관련성이 부각되어 상호 이동경롤까지 추정한 연구도 있다. 아무튼 이제까지 영서내륙지역에서 발견된 후기 신석기시대의 토기는 퇴화된 물고기벼무늬를 새긴 뾰족밑토기가 대부분인 점을 고려할 때 교동동굴에서 나온 납작밑토기의 연대됴 재교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퍼럼 교동동굴유적의 연대를 올려보는 경향이 강한 추세에서도 길다란 간돌도끼류가 많이 나온 울진 후포리 유적과 교동동굴 유적과의 관련성을 들어 싱석기 후기로 편년하는 연구자도 있다.

셋째, 교동동굴 유적에서 전개된 신석기시대 사람의 생활과 관련된 문제이다. 교동에서 나온 결합식 낚시가 오산리의 그것과 같은 용도로 사용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산중턱에 인공적으로 판 동굴에서 나온 결합식 낚시와 바닷가에서 살림을 꾸려간 오산리의 결합식 낚시가 동일한 삶의 행위를 보여즈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교동유적에서 멀지 않은 행동반경내에 현재 춘천옥광산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 교동동굴에서 나온 백옥의 산지를 추정하는데 어떤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싶다.





(2)내평리 유적

내평리유적은 춘천지역에서 유일하게 발굴된 신석기유적이지만, 이 뉴적 또한 발견 예가 많지 않은 특이한 유형의 주거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동서 12.3m, 남북 약 4m 에 걸쳐 돌을 깔아 만든 타원형의 집터로서 발굴당시 '부석주거지'로 명명되었다. 바닥에 25-30cm의 작은돌을 황갈색 모래질 생토위에 정연하게 깔았으며 돌과 돌 사이에는 잔돌을 끼우거나, 돌을 깨서 물려 놓아 그 위치를 고종시키고 있다. 동쪽의 깐돌밑에는 동서 1.5m, 남북 1.3m의 타원형 불땐자리가 있었다. 그 주변에서는 크고 작은 8개위 야외용 불땐자리가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대부분 빗살무늬토기조작이 찾아졌고, 석기는 출토량이 빈약한 편이다. 간돌도끼 8점, 숫돌 1점, 석영제 긁개 1점, 뗀돌도끼 등이 출토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조작들은 서해안지역의 신석기시대유적에서 흔히 발견되는 생선뼈무늬가 대부분이며, 덧띠를 돌리고 상하에 빗금을 새긴 것, 짧은 빗금무늬, 구멍무늬, 세줄의 선을 돌린무늬 둥도 있다. 입술부에서 몸통까지만 무늬를 새기고 바닥부분에는 무늬를 넣지 않았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의 무늬는 금탄리 1.2문화층과 비교하여 신석기시대의 후기유적으로 편년되고 있다.


3)청동기시대의 사회와 문화, 4) 초기철기 - 원삼국시대의 사회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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