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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춘천 고대사회의 고고학적인 성격과 지명 및 전승

춘천지역 일대에는 산실된 고인돌 유적을 제외하고도 현재 63기의 고인돌이 보고되어 있다. 그 자체가 보수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묘제는 한 시대의 문화적 성격을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한 성격 중의 하나이다.

지석묘(支石墓)는 일인 학자에 의하여 북방식(지석식)과 남방식(무지석식, 개석식(蓋石式))으로 분류되어 일반적으로 쓰여왔다. 이 구분은 한강을 경계로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분류하여 한강 이북은 북방식 지석묘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았으나 남방식 지석묘로 분류하여 한강 이북은 북방식 지석묘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았으나 남방식 지석묘로 분류되었던 개석식이 한강 이북지역에서 다수 발견되므로써 지역적 분류로 본다면 개석식은 전국적으로 분포하여 전국식으로 볼 수 있다. 춘천지역은 북방식인 지석식과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개석식 지석묘가 있다.

지석묘는 산동을 포함하여 요동과 한반도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함경북도에는 전혀 분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만약 석재를 구할 수 없는 조건이 아니라면 주민계통의 이중성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묘제는 강한 보수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다른 묘제로 변화하는데는 짧지 않은 기간동안의 사회적인 변화를 필요로 하게 된다. 또한 동일한 묘제는 계통을 같이하는 동일한 주민으로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인 지석묘는 그 지역적 분포로서 구조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즉 탁자형인 북방식 지석묘는 산동, 요동을 거쳐 주로 반도의 북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이 북방식 지석묘의 남방한계가 춘천과 묵호이다. 춘천지방에서는 남방식 지석묘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북방식과 개석식(전국식)뿐이다. 이것은 춘천지방 주민계통이 북방계였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사실로 볼 수 있다.



춘천지방 북방식 지석묘의 담당주민은 삼한과는 그 계통을 달리하는 예맥계통으로 보인다. 일찍이 김상기는 한, 예, 맥의 이동을 3단계로 보았다. 이 한, 예, 맥을 우리 민족의 주체적 구성체로 보고 있다. 주로 남만주와 동북지방인 함경북도에 지석묘 분포가 희박함에 주목하고자 한다. 원래 예(濊)는 남만주(부여)와 함경남북도, 강원도 동해안 지방에 주로 분포하였다. 맥(貊)의 주지를 산동, 요동과 한반도의 서북부 지역으로 보앗을 때 맥의 분포가 북방식 지석묘의 집중적 분포와 일치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따라서 춘천지방이 북방식 지석묘의 남방한계인 점에 주목하여 춘천지방 지석묘의 담당주민이 요동 및 서북지방 맥족(貊族)의 일지파가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물론 예와 맥은 같은 계통의 종족이지만 그 분포에 있어 지역적인 차이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청동기시대로부터 초기철기시대의 기원을 전후한 장구한 기간동안 존속해온 지석묘의 담당주민은 한(韓)을 포함한 예맥(濊貊)족으로 보인다.

춘천 일대에서 발굴된 고인돌 가운데에서 연대가 측정된 것은 중도 고인돌 한 예이다. 이 고인돌의 측정연대는 A.D. 115년으로 나온 바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보통 고인돌의 축조시기를 기원전으로 보고 있다. 중도와 천전리 지석묘는 지석묘 주위에 적석되어 있다는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적석지석묘와 적석지석총과의 어떤 연관관계를 시사해 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적석지석묘에서 적석총으로의 묘제변화를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중도 적석총은 B.C. 3C에서 기원전후에 걸쳐 축조된 고구려 적석총의 초기 형태인 무기단식 적석총에 가깝다. 중도 적석총은 그 편년을 A.D. 1-2C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앞서 나온 중도 지석묘와 적석총의 추정년대를 신뢰한다면 이러한 적석총은 묘 주위에 돌을 쌓은 북방식 지석묘에서 변화 발전했다는 추측도 가능할 것이다.

B.C. 3C에서 기원(紀元)을 전후한 시기는 동아시아에 있어서 전국시대의 혼란, 진시황의 역(役), 고조선의 멸망,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멸망과 한사군의 설치등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방이 다변화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정세는 한반도 남쪽으로 향한 수많은 유이민 집단을 상정할 수 있다.

춘천 맥국의 주민구성은 지석묘나 적석총을 통해 북방계 종족임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필지는 춘천지방에서 발굴 조사된 유물유적의 성격이 서북계통 문화를 가진 고구려 계통의 맥족과 연결된다고 본다.






춘천지방에는 맥족, 맥국과 관련한 지명, 전설 등이 전해 온다. 맥국 관계 지명과 전설은 춘천이 맥국의 옛 땅임을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 삼악산성은 덕두원의 남방에 위치하고 있다. 천험의 지리를 이용하여 돌을 쌓은 산성으로서 맥국산성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 산성의 서남단 가까이 왕대라고 칭하는 곳에서는 와편이 산재해 있었다. 이 와편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산성부근에서 마제석검이 한 점 수집되었다. 이 석검은 길이가 약 15㎝ 가량 되는 작은 단검이다. 그 외에 석창(石槍)을 주웠다는 주민들의 이야기는 들었으나 석창은 찾지 못했다. 산성은 유리한 지형조건을 찾아 구축하는 것이므로 옛 성을 다시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산성이 현재 석성이고 고려시대의 와편이 보인다고 하여 이 산성을 고려시대 이후에 쌓은 산성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더구나 이 산성 부근에서 채집된 마제석검은 이것을 사용하던 시대에도 산성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서울의 남한산성에 비유되는 이 삼악산성은 이 지역 주민들에게 강릉 예국(혹은 신라)의 공격을 받고 맥국이 최후를 마친 맥국산성으로 전해오고 있다. 공격군은 성이 함락되지 않자 현재 의암댐이 위치하는 바위에 군사들의 옷을 빨아 널어 놓고 현재의 마곡(馬谷, 말골)에 말을 매어놓고 칼봉에서는 노병들을 조련하는 것처럼 하여 맥국군사를 안심시킨 후 북쪽절벽에 위치한 북문과 서문 앞에는 군사를 매복시킨 후 왕녀의 부탁이라고 속인 박물장수 할머니가 군사를 속여 문을 열게하자 일제히 북문과 서문을 통하여 공격하여 맥국을 멸망시켰다고 한다. 군사들의 옷을 널어 놓았던 바위는 의암(衣岩), 박물장수 할머니가 들어간 문은 할미문이 되었으며 삼악산 성내의 맥국인이 쌀을 씻고 설거지를 한 물이 등선폭포로 흘러 지금도 이 지역 노인들은 등선폭포를 시궁치(시궁창)라고 부르고 있다.

당시 산성내 궁궐이 있었던 곳을 지금도 대궐터라고 부르고 있으며 현재 그 유래를 알 수 없는 흥국사(興國寺)는 맥국이 멸망한 뒤에 맥국의 재건을 위해 지은 절이라고 전한다.

동국여지승람 춘천도호부조에는 춘천시 우두동에 위치하는 우두산에 우두산성이 있어 맥국 때에는 성(城)으로 지칭했다고 한다. 이 우두산성은 지금은 많이 변화되어 토성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일제시대에 하야만세가 쓴 춘천풍토기에는 춘성군 동면 월곡리에 맥국왕 자손의 묘라고 전하는 능산이 있다고 한다. 한편 평창과 횡성에는 태기산(太岐山)을 놓고 각기 다른 전설이 전해 온다. 태기산은 평창과 횡성 양 지역에 걸쳐있는 산이다. 횡성지방에는 진한의 마지막 왕 태기가 신라군에 붸겨 신라와 마지막 전투를 한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평창지방에는 이 동일한 지역의 전설내용이 횡성의 전설과는 달리 태기가 맥국왕으로서 예국에게 붸겨 멸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태기산 전설이 양 지역에서 다르게 전해지고 있는 것은 횡성이 삼한(三韓)의 영역이었고 평팡이 예맥계통의 영역이었음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전설 그 자체는 신뢰할 수 없더라도 이 지역이 예맥계통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지역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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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시 신북면 발산1리는 맥국의 왕궁터가 있었던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 발산1리는 우연의 일치로 보기 어려운 맥국관계 지명을 갖고 있다. 맥국의 왕궁터로 전해오는 이 발산1리 지역의 후면은 큰 산들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발산리 지역의 앞은 천전리·산천리·유포리·발산리의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지고 있다. 이 바리산 밑 동네를 지금 왕뒤라고 부른다. 왕뒤로부터 동북쪽으로 약 600m 가량 떨어져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는 산 아래에 궐터(대궐터)라고 하는 지역이 있다. 이 왕뒤로부터 궐터에 이르는 지역 즉 발산1리 지역을 바리미(발의뫼)라고 부르고 있다. 궐터에서 300m 가량 앞쪽을 장시본이라고 부르며 이 장시본의 조금 앞쪽은 맷뚝(맥뚝)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아직 위와 같은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발산1리 전체를 지칭하고 있는 '바리미'는 '바리뫼' 즉 '발의뫼'로 볼 수 있으며 이것은 곧 '발의 산', '발족의 산'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에서 맥(貊)이 음사(音寫)인 발(發), 박(憎)으로 쓰여 왔음은 밝힌 바와 같다.

발과 박은 우리말 '밝다''밝음'을 의미하는 음사이다. 그러므로 발산1리의 바리뫼, 바리산은 발족의 산 또는 발국의 산을 지칭한다고 본다면 발(發)과 박(憎)은 맥(貊)의 음사(音寫)로 바리산은 맥의 산 또는 맥국의 산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 바리산을 한자어화 하여 발산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춘천풍토기는 이 바리산을 맥국산 또는 왕대산, 속칭 발산(發山)으로 칭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궐터는 대궐터를 의미한다고 생각되며, 바리산 밑인 왕뒤는 왕대(王臺)로서 왕이 거처하던 곳, 또는 왕궁의 뒤가 아닌가 생각된다.

맷뚝이라고 부르고 있는 곳은 논으로 흘러드는 작은 물이 흐르고 있는 곳이며 지금은 다른 논뚝과 구별되지 않는 평범한 논뚝에 불과하지만 이 맷뚝이 원래는 맥뚝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이 맷뚝과 연결되는 약 10m 내외의 앞에는 삼한골에서부터 흘러내리는 하천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하천 안쪽으로 돌과 흙으로 쌓여있는 다른 곳보다 지대가 좀 높은 지역을 마을 노인들은 맥국산성의 잔여 형태라고 말하고 있다. 원래 이 위치가 왕궁을 둘러싸고 있는 성지(城地)자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춘천풍토기는 이 바리산의 후방 산정으로부터 우두산 사에네 토석(土石)을 축성한 흔적이 남아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는 그 축성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이곳 노인들에 의하면 약 65년전에도 발산리 오동국교 부근에는 인공이 가해진 대들보와 같은 석괴들이 드문드문 있었다고 하나 공사중에 전부 없어졌다고 한다.

또한 발산리 뒷편의 화천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는 삼한골에는 맥국시대의 사지(寺址)가 있다고 전하며 바리미의 북쪽 수리봉 밑 동쪽 서덕골에는 풀도 없이 둥근 묘같이 생긴 것이 있는데 이것이 맥국와의 묘라고 전한다. 위와 같은 지명과 전승은 이 지역이 맥국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시사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역의 지명은 맥국의 왕궁터로 전해 오는 것과 우연의 일치로 볼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또 일설에는 기자가 조선에 봉해지므로 단군(檀君)의 자손이 옮겨와 동족인 맥종족이 맥국을 건설했다고도 한다. 이 지역은 아직 고고학적인 발굴 및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이다.

앞으로 고고학적인 발굴성과 따라 맥국사의 실체가 규명될 것이다. 아울러 맥국사의 실체규명과 더불어 초기삼국사의 일부 복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상기한 바와 같이 이 지방의 전설과 지명은 춘천과 맥국과의 어떤 관계를 상정해 주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나타난 춘천지방의 유물, 유적과 지명 및 전설은 후술할 삼국사기에 보이는 맥국의 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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