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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헌적 검토

삼국사기에는 맥국관계 기록이 몇 군데 나오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맥은 오직 우리 민족 구성체의 하나로서 고구려, 부여 등의 국명이 나타나기 전 북방의 맥을 생각하는 고정관념으로 말미암아 경시되어 왔다. 또한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불신으로 소홀히 취급되거나 무시되어 왔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맥국관계 기록을 들어 삼국사기 지리지에 실려있는 춘천 맥국설의 문헌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한다. 필자는 삼국사기의 내용에 있어서 항상 문제가 되는 상고대의 기록이라 해도 그것이 갖는 사료적 한계성은 부인할 수 없지만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고자 한다.

맥국관계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 유리왕(A.D. 40)조에 처음 보이고 있다. 유리왕 17년 추(秋) 9월조에는 화려(華麗), 불내(不耐) 2현인이 연모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경을 침범하였는데 맥국의 거수가 병으로서 곡하의 서쪽에서 이를 막아 깨뜨리니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관계를 맺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려와 불내는 낙랑(樂浪) 동부(東部) 7현(縣) 중의 2현으로서 화려는 지금의 영흥, 불내는 지금의 안변(安邊)이다. 화려와 불내는 일찍이 한사군(漢四郡)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비교적 일찍이 한(漢)의 선진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병으로 조직된 이들의 침략을 막아낼 정도면 하나의 정치조직을 갖춘 상당한 세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곡하의 위치가 어디인지 궁금하다.

"요곡하서패지(要谷河西敗之)"를 이병도는 곡하의 서쪽에서 가로막아 이를 깨뜨렸다고 해석하고 있다. 곡하에 대한 해설을 붙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불명(不明)의 지명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한편, 김종권은 하서(河西)로 보아 하서를 강릉으로 비정하고 있다. 또 천관우는 이병도와 같이 강원도 방면이라고 하여 정확한 위치를 말하지 않고 있다. 필자 역시 이병도의 설을 따라 곡하로 보고자 한다. 이것이 강릉이든 강원도의 어느 방면이든 아직 고대왕국으로 성장하지 못한 A.D. 40 년경의 경주를 중심한 사로국을 생각할 때 이 기록은 언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즉 영흥, 안변, 춘천, 경주를 연결하는 거리가 과연 침략하고 막아줄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양 지역과 경주의 거리가 너무 먼 느낌이다. 이것 이외에도 신라 초기 기록에는 경주를 중심한 신라를 생각할 때 도저히 이해되지 않은 기록이 많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대해 천관우는 그의 삼한고(三韓考)에서 신라가 경주방면에 있었다고 해야 문맥이 자연스러운 기사와, 신라가 한반도 중부에 있었다고 해야 문맥이 자연스러운 기사를 구분하고 있다. 그는 이 두 계열이 하나의 편년사 속에서 연대순으로 교차배열된 이중 구성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신라본기의 초기기록은 경주 중심의 원사로(原斯虜)세력과 한반도 중부에서 다시 남하하는 구진국 세력이 사실이 경주세력의 1왕계와 연대를 기준으로 한단일 편년사 속에 교차배열된 이중구성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천관우는 이병도의 한반도 중부로 비정한 진한(辰韓)설을 발전시켜 진국이 한때 한반도의 중부에 자리잡고 있다가 계속 이동하여 구진국계의 진한세력이 경주지역에 내도정착(來到定着)한 것을 늦어도 벌휴(伐休)왕 즉위 이전(A.D. 184) 혹은 아달라왕 14년(A.D. 167)이후로 보고 있다. 천관우의 이 설은 타당성 있는 것으로 본다. 이 설을 따르면 유리왕조의 맥국 관계기사는 춘천으로 비정된 맥국의 위치에 무리함이 없으며 오히려 춘천 맥국설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유리왕조의 맥국관계 기사는 중부지방에 있던 신라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진국과의 관계로 보고자 한다. 다시 삼국사기 유리왕 19년 초 8월경에는 맥국의 거수가 금수(禽獸)를 사냥하여 왕에게 바치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 기록은 역시 맥국과 신라와의 거리가 짐승을 사냥하여 바칠 수 있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을 알 수 있다. 이 기록 역시 한반도 중부에 위치했던 신라의 전신인 진국과 맥국과의 관계기록이다. 위와 같이 맥국과 신라와의 관계는 유리왕 17년(A.D. 40)과 19년(A.D. 42)조에 기록되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 책계왕(責稽王) 13년(A.D.297) 추(秋) 9월조에는 "한과 맥인의 내침으로 왕이 나가 막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고 죽음을 당하였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은 한의 군현인 대방과 낙랑(樂浪)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대방은 백제의 책계왕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고, 또한 고구려가 대방을 침략하자 책계왕이 군사를 내어 구원하고 있는 것을 미루어 맥인과 더불어 백제를 친 한은 낙랑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맥인을 맥국인으로 봄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A.D. 5C에 이르러 고구려를 맥으로 본 기록이 하나 보인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웅략(雄略)천황기에는 개로왕 21년(A.D. 475) 겨울에 맥의 대군(大軍)이 대성을 내공하여 7일 7야(夜)에 왕성이 함락되므로 드디어 위례국을 잃고 왕과 태후,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몰하였다고 되어 있다.

역사와 문화에 대한 책모음

그러나 고구려에 있어서의 맥은 건국 초기에 고구려라는 이름이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이전의 얼마간의 기간이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를 맥이라고 한 기록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일본서기의 이 웅략천황조 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고구려를 맥이라고 하여 위 책계왕조의 맥인을 고구려로 비정할 수도 있으나 고구려, 낙랑과의 관계가 적대관계였다는 점과, 맥의 명칭은 고구려 건국초기에 불려졌고 이미 A.D. 297년경에는 고구려라는 이름이 통용되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으므로 맥인을 고구려로 볼 수 없다고 본다. 아울러 삼국사기 기록에서 고구려를 맥으로 본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책계왕조의 맥인은 역시 춘천지역의 맥국인으로 보고자 한다.

또한 책계왕 13년조의 기록은 이미 이 당시에는 중부지방 진국세력이 경주지방의 사로국에 내도한 시기이다.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13년조는 "8월에 마한에 사신을 보내 천도를 고하고 강역을 획정하였는데 북은 패하(예성강)에 이르고, 남은 웅천(공주), 서는 대해에 이르고, 동은 주양에 다다랐다."고 하고 있다. 주양은 춘천이다. 이 온조왕조의 강역은 백제가 후대에 진국의 영역을 차지한 후 그 선대인 온조왕대에서부터 마치 그들이 이 땅을 일찍부터 소유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삼국초기인 신라 유리왕대(A.D. 6C)에는 중부지방의 진국과 맥국이 근접하고 있었는데 책계왕대(A.D. 3C)에 이르러서는 백제가 이미 진국의 영역을 차지하여 맥국과 근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위 기록에서 한과 맥과의 관계에 주목하고자 한다. 정약용은 그의 강역고에서 "한지의 주에 소명현은 남부도위의 치소(治所)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춘천이다."고 하였다. 춘천을 낙랑군 남부도위 소명현으로 보고 있음을 알수 있다. 그는 또한 신라와 백제사에서 하나 둘 보이는 맥국은 모두 낙랑의 별칭으로서 두 나라가 아님을 논하고 있다. 낙랑과 맥국을 동일하게 보고 있다. 그리고 맥국의 호칭문제에 대해서는 "서한 말기(B.C. 262-8)에 동국지방의 사람이 낙랑의 땅이라고 일컫고 춘천에 웅거하였으니 혹시 그 추장이 맥국인 까닭에 그대로 맥국이라고 한 것이 아닌가"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 문장을 어디서 보았는지 그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있다. 정약용은 예맥을 원래 북적지종으로서 우리나라 영토내에는 본래 그 이름이 없다고 하고 있다. 그는 역시 예맥을 만주예맥으로만 보아 만주 예맥의 한반도내 이동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필자는 정약용이 낙랑과 맥국을 동일시 보는 데에는 찬성할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 기록은 춘천이 처음에는 낙랑군에 소속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문헌비고는 맥국과 낙랑을 동일시 하는 견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개 춘천은 낙랑군 소명현으로 남부도위의 다스리는 땅이 되었으니, 춘천 한 고을이 이미 낙랑에 속하였는데 또 무슨 남의 땅이 있어서 맥국을 용납하겠는가. 춘천이 백제와 경계가 밀접하였는데 백제의 사기에 한 번 맥국의 자취가 보인 것 외에는 도무지 교섭이 없고 다만 낙랑이 여러번 침범한 것이 있으니, 이로써 상고하견대 낙랑을 맥국이라고 이른 것이 분명하다. 정약용의 설이 확실할 것이다."

문헌비고는 춘천이 본래 낙랑군 소명현임을 전제하고 있다. 춘천은 이미 낙랑에 속하여 맥국이라고 부를 땅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백제와 맥국의 교섭이 한 번 밖에 없음을 들고 있다. 반면 낙랑이 여러 번 침범한 것을 들어 낙랑을 맥국으로 보고 있다.

상기한 양서는 모두 춘천을 낙랑군 소명현이라고 하고 있으나 그 기록의 출처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다만 문헌비고는 " 지금 춘천에 소양강이 있는데 소양이라고 이르는 것이 어찌 소명의 남쪽에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춘천에 있는 소양강이 소명현의 남쪽에 있는 강이라는 뜻이라고 하여 낙랑을 맥국으로 보는 자료로 삼고 있다. 아울러 정약용과 문헌비고는 '국가동유낙랑'과 '욕습우두산성'이라는 삼국사기의 두기록을 통하여 낙랑을 맥국으로 보는 근거로 삼고 있다. 즉, 백제 온조왕 13년 5월조에는 온조가 신하들에게 하남으로 천도할 뜻을 밝히면서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백제의 동쪽을 춘천(맥국)으로 보아 그 동쪽에 있는 낙랑을 맥국과 동일시 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다시 온조왕 13년 11월조에는 백제가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고자 했으나 대설을 만나 돌아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것은 동왕 17년조의 낙랑의 위례성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백제의 동쪽을 꼭 춘천으로만 비정할 수 없으며 '낙랑우두산성' 역시 낙랑과 우두산성을 동격시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우두산성의 위치도 꼭 춘천으로만 볼 수 없다. 이병도는 이 우두산성을 황해도 우봉으로 보는 것 같다. 이 우두산성을 춘천으로 보더라도 '낙랑우두산성'은 부속관계나 동맹관계에 있었던 이원적인 낙랑과 우두산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두산성을 춘천의 맥국으로 본다면 공격을 당하는 백제 측에서 보아 낙랑세력이 맥국세력보다 훨씬 컸으므로 낙랑에 부속되는 맥국의 우두산성으로 기록할 수 있다고 본다.

상기한 책계왕조의 기록과 더불어 맥국과 낙랑은 동맹관계나 부속관계에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책계왕조에 보이는 한과 맥인은 부속관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가 초기 현도군에 소속되어 있었듯이 맥국이 낙랑에 소속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상기 두 기록과 책계왕시 한과 맥의 공동작전은 그럴 가능성을 짙게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현도군에서 떨어져 나가듯 맥국 역시 일시 낙랑군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독립된 집단세력으로 보아야 한다. 맥과 한군현의 관계가 적어도 책계왕대에는 동격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의문스러운 점은 A.D. 297년이면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해 가는 시기로 볼 수 있는데 과연 이 시기에 맥국이 독립된 국가단위로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미 이 당시에는 맥국이 국가형태를 상실하고 있어서 맥인으로 기록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후술할 삼국사기 지리지가 보여주는 춘천을 포함한 인근지역의 연혁과 수서 백제전의 맥국기록과 더불어 춘천의 지형 조건이 책계왕대 뿐 아니라 그 이후의 어느 시기 까지도 맥국이 존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춘천이 처음 삼국 가운데 1국으로 편입되는 기록은 신라 선덕왕 6년(A.D. 637)에 우수주로 삼아 군주를 두었다는 기록이다. 그런데 춘천과 인접한 홍천, 횡성은 본시 고구려의 벌려천현과 횡천현으로 기록되고 있다. 뿐만아니라 더 남쪽인 원주는 고구려의 평원군으로, 가탐이 예국으로 비정한 강릉은 고구려의 하서량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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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삼국시대에 먼저 고구려령에 편입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춘천은 삼국시대 말기인 A.D. 637년에야 처음으로 신라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것은 춘천의 남쪽인 홍천, 횡성, 원주, 가평, 강릉 등이 고구려령일 飁에도 춘천은 고구려령에 속하고 있지 않다. 삼국사기 지리지는 각 지역의 연혁을 적어도 삼국시대에서부터는 그 지명과 소속을 모두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춘천은 선덕왕 이전의 어는 시기까지는, 적어도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여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함경남도 지역까지 북상했던 진흥왕 이전까지는 삼국가운데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춘천이 갖고 있는 요새로서의 지형조건과 더불어 이 사회를 독립적이고 방기된 사회로서 적어도 비교적 늦은 시기인 6C까지는 존속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성호(星湖)는 그의 성호사설에서 춘천의 지형을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가령 참화가 일어나 전쟁이 계속될 경우에 자체를 방어할 곳을 물색한다면 춘천 한 곳이 있을 뿐이다. 춘천은 곧 옛 맥국이다. 내가 박천집을 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었다. '지금 비유하자면 서울은 낙양과 같고 관동은 관중과 같고 춘천은 관중의 장안과 같다. 중첩한 산이 사방에 둘러싸여 옹호하였고, 두 강물이 후면에서 합류되었고 비옥한 들판이 열려서 주위가 수백리에 달한다. 삼면을 막고 지키는데 한 사람이 관문을 막고 있으면 만 명도 뚫고 나가지 못할 것이니 정말 난공불락의 유리한 지리적 조건이다. 3면에 병영을 설치해야 하는데 김화의 길목은 서도로 통하는 요충이요, 홍천의 길목은 북도로 통하는 요충이어서 명령을 사방으로 전달할 수 있다. 혹은 깊은 시내 오목한 골짜기에 돌층계를 놓고, 혹은 산맥이 끊어진 곳, 산길이 험한 요지를 이용하여 병영을 설치하여 문에 빗장을 걸어 놓는다면 안방에 들어앉은 것처럼 안전감을 잦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요새와 같은 산악을 둘러싸인 춘천은 지금 그 지세를 둘러보아도 가히 방어하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풍부한 수원과 농토는 사람이 살기 좋은 자연적인 조건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춘천의 자연조건은 맥국이 삼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선덕왕 이전의 어느 시기까지 거의 고립적이고 방기된 사회로 존속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와같은 사실은 의문을 가지고 보아온『수서』백제전의 맥기록이 근거있는 기록임을 말해주고 있다.『수서』백제전은 "백제의 서쪽으로부터 3일을 가면 맥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백제의 서쪽 국경 어느 지역으로부터 3일을 가면 맥국에 이른다는 말일 것이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 지리지의 춘천지방의 연혁 및 이 지역의 지세와 더불어 춘천지방이 선덕왕 이전의 어느 시기, 적어도 수나라 飁까지는 방기된 소국가로서 존속하였음을 입증하는 사료로 볼 수 있다.『수서』백제전의 말미에 실려 있는 이 기록이『수서』에 실리게 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이것이 한반도 중부지방에 위치한 맥국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기본적인 문헌기록인 삼국사기와 수서를 신뢰하는 입장을 취하여 춘천지방의 맥국이 선덕왕 이전의 어느 시기, 적어도 수나라 때까지는 방기된 상태로 삼한의 소국과 같은 상태로 존속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