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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에서의 의병투쟁



1. 구한말 의병의 봉기와 춘천의병

1876년 병자조약으로 국가를 개방한 조선은 열강의 침략을 당하게 되었다. 그중 일본의 침략은 악독하고 잔학하여 집요하게 한국의 식민지화를 추진하였으니,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을 통하여 한국에서의 일본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한국의 병합을 노골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의 의도에 방해되는 것은 무자비하게 제거했던 것이니, 1894년의 갑오경장과 1895년의 을미사변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을미사변은 왜인이 대권에 난입하여 민비를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니, 일국이 정상적인 외교관계에 있는 나라의 왕비를 시해한 일은 일찍이 역사상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은 전국민을 격분케 하였고, 특히 개항 자체를 반대하고 그동안 외국과의 비정상적인 관계에 대하여 끈질기게 비난해 오던 유림들은 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한국인의 자존심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단발령을 내리자, 드디어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적에 항전하게 되었다.

한말의병으로서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1895년 10월 11일경에 보은에서 문석봉이 의병을 모집하여 거의토적한다고 한 것인데, 그는 얼마 후 관에 체포되고 말았으므로, 실제로 의병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가장 먼저 의병이 일어난 것은 강원도와 그에 인접한 지평이었는데, 강원도에서는 춘천 원주 강릉을 중심으로 봉기하게 되었다. 원주의병은 원래 지평의 이춘영, 안승우, 김백선 등이 본군에서 의병을 일으켜, 원주로 들어와 군기를 거두어 가지고, 단양, 청풍 등지를 공격한 것으로, 음력 11월 하순에 기병하였다. 강릉의 의병은 여주의 유생 민용호가 음력 12월 초부터 원주, 평창, 횡성 등지에서 군사와 참모를 모집하여 15일경에 강릉으로 들어간 것인데, 강릉에서도 이 때에 이미 의소를 설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음력 11월 17일에 춘천부를 점령한 춘천의병이 가장 빠른 의병으로서, 이는 한말의병의 가장 첫 행동이었던 것이다.

『개벽』지에 기재한 차상찬씨의 경험담에도 춘천의병이 한말의병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이라고 하고, 그 거사일이 단발을 강행하기로 한 음력 11월 17일(양력 1896년 1월 1일) 새벽으로서, 그들은 춘천관찰부와 군아를 점령하고, 먼저 단발을 한 초관 박모를 군전에 잡아내어 목을 쳐서 홍문위에 매달았다고 한다. 또 전춘천유수 민모가 재임시 탐학하고 국사를 그르쳤다 하여, 읍내에 있는 그의 생사당에 불을 질렀다고 하였다. 그리고 군아에 의병소를 설치하고 각처에 고시를 부쳐 민병을 모집하니 불과 수3일 사이에 5-6천명이 모여 들었는데, 이때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그 중에 도포유건의 유생과 패랭이를 쓴 부상패와 노망태를 질머진 산렵포수와 목창을 가진 농민 등이 있었다고 한 것이다. 여기에 거사일에 앞장섰던 군인들까지 합하면 춘천의병은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일으킨 의거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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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의암이 성재를 따라 제천으로 간 후, 춘천에서 가장 명망이 있던 이소응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군고를 열어 일반민병에게도 무기를 나누어 주고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왜인의 앞잡이 조인승이 춘천부 관찰사가 되어 단발을 하고 부임하다가 가평과 인접된 마장리에서 머무니, 춘천에서 의병을 보내어 잡아다가 포살하므로써 크게 기세를 올렸다.

그후 춘천의병은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출발하였는데, 그 행렬이 50리에 뻗쳤었고, 가평읍에서 토벌군과 접전하다가 패하여 춘천으로 돌아왔는데, 얼마후에 토벌대가 춘천으로 들어왔으므로 춘천의병은 사방으로 분산되게 되었다. 이때 이소응은 춘천을 떠났는데, 그는 가평 양평을 거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경기의병들과 함께 경성의 점령을 시도하는등 기세를 올렸으나 실패하여 흩어졌다. 이소응은 제천으로 가서 의암진에 합류하였고, 한편 춘천의병은 이소응의 종제 이경응이 지휘하다가 역시 춘천을 떠나 강릉진을 거쳐 제천으로 가고 있었다. 이로써 전기의 춘천의병활동은 시들해지고 말았는데, 정미년에 이르러 다시 거국적인 의병이 일어날 때, 춘천에서는 의암의 재종형인 외당 유홍석이 중심이 된 의병이 일어나, 다시 한번 치열한 의병전을 벌이게 되었다.

2. 춘천의병과 화서학파와의 관계

한말의병이 처음 일어날 때에 그 의병의 대부분은 화거학파에 속하는 유생이 중심이 된 것이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위정척사 사상으로 무장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의병활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이 사상은 의병의 기본이념이 되었다. 그런데 이 위정척사론은 화서학파에서 정립한 이론이었다. 화서학파는 화서 이항로가 창립한 학파로서 화서로부터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를 거쳐 의암 유인석으로 이어지는 학파였다.

화거는 양평의 벽계를 중심으로 후진을 양성하였으므로 춘천의 유력한 중생들이 많이 화서에게 가서 수학하였으며, 또한 화서의 수제자인 김평묵은 원래 포생들이 많이 화거에게 가서 수학한후 춘천과 가평에서 후진을 양성하여 춘천에 그의 제자가 많았다. 또한 화서와 중암에게 수학한 성재는 워래 춘천출신으로 가정서사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으므로 그의 재자와 친족이 춘천에 많았다. 이어 성재의 수제자라할 의암도 춘천출신이었기 때문에 춘천은 화서학파와늬 관계가 가장 깊은 곳이었고, 따라서 위정척사의 사상도 가장 투철한 지방이었다. 이리하여 춘천에서는 의암이 제천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전국최초로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3. 춘천의 의병장들과 그들의 활동

1)의암 유인석과 춘천의병

유인석은 춘천 남면에 집단 거주하고 있는 고흥유씨집안 출신으로서 화거학파의 3대학통인 성재 유눙교와 종숙질관계이며, 또한 의암은 성재의 제자로서 성재 제자의 대표처럼 인장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재의 손자 유제함을 의암이 자기의 양자로 삼았기 때문에 성재와 의암과는 이중 삼중의 밀접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재가 중년에 더 많은 유생을 교육시키기 위해 재천 장담으로 이거할때에 의암이 따라간 것은 당연한 것이며,이리하여 의암은 그곳에서 성재를 도와 기반을 닦고 인재를 양성했던 것이다.

을미년에 의병이 일어날 때에 의암이 제천,충주,단양등지를 중심으로 해서, 충북,강원,경기 3도의 접경지역을 활동범위로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그것은 그를 대장으로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그것은 그를 대장으로 추대한 화서학파계 출신의 유생들이 모두 이부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의암이 직접 의병활동한 지역은 제천 충주 쪽이었지만 의암과 춘천의병과는 뗄 수 없는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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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의암은 춘천출신으로서 그가 제천네 거주하거나 의병을 하러 돌아다닐 때에도 그의 종족들은 춘천 가정리에 살고 있었으며 또 그의 친척중 다수가 춘천의병에 가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춘천의병에 가담한 유생들 모두는 화서,중암,성재,의암으로 이어지는 화서학파에 속하는 인사들로서, 이념적으로 의암과 연결되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한말의병의 기본이념이 위정척사였으며, 이 위정척사론은 화거학파가 정립한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기의병의 대장으로 추대되었던 이소응이나 추기의병의 ei장인 유흥석이 모두 성재,의암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으며, 또 춘천의병의 핵심인물들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에 모두 wcjs으로 가서 의암에게 합류했던 것으로 보아 이점은 분명하다고 할수 있다. 따라서 의암이 비록 춘천의병에 직접참여하여 지도하지는 않았지만 춘천의병은 이념적으로 의암의 지도하에서 활동했다고 할 수 있다.

2)습재 이소응과 그의 의병장들

이소응의 본관은 전주이니 철종 임자년에 춘천 남면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기,호는 습재이다. 성재 유쥬교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위정척사사상에 투철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재의 아들인 입헌 유의석은 이소응의 매부가 되었고, 또 입헌의 큰 아들 유제함이 의암 유인석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이소응의 부인과 며느리도 모두 남면의 큰 씨족인 고흥유씨였다. 이와 같이 이소응은 공적으로는 화서학파 학톤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사적으로는 인맥이 좋았으므로 지역에0 있어서의 인망도 좋았고, 또 선조대왕의 9남인 경창군 주의 증손 화평군 빌의 6대 종손으로 재력도 있었으므로 1895년에 춘천에서 처음 의병이 일어날 때에 대장으로 추대되었던 것이다.

이소응은 춘천부를 점령하여 군아에 의병본부를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하니 그 수가 수천명에 달했다.그는 왜적의 앞잡이로 단발을 하고 부임해오는 춘천부관찰사 조인승을 가평에서 잡아다가 포살에 처하는등 기세를 올렸으며 또한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가평까지 행군하여 벌업산에서 토벌대와 대진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큰 비가 와서 의병의 화승총이 발사되지 않으니 패하여 춘천으로 돌아왔다. 그후 토벌군이 춘천으로 진격해오자 의병이 약사원 뒷산에서 접전하였으나 패전하였으므로 춘천의병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이소응 대장은 이를 만회하고자 포수를 많이 거느리고 있는 지평군수 맹영재를 쁹아가 함께 항쟁하자고 협상하다가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제천으로 가서 의암의 의병진에 합류했다. 이후 의암을 따라 요동으로 들어가는 등 의암과 함께 행동하며 항쟁을 계속하다가 1930년에 돌아갔다.



정인회는 처음 춘천의병이 일어날때의 발기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에 27세의 선비였는데 시국이 그릇되어 감을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킬 뜻을 가지게 되었다. 단발령이 내리자 그느 군인대표 성익환과 상인대표 박현성과 함께 모의하여 각자 포섭하기로 하고 그는 유림측의 연락을 맡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단발을 강행하기로 한 음력 11월 17일(양력 1896년 1월 1일)에 의거를 일으켜 춘천부를 점령하였다. 이소응이 대장으로 추대된 후 정인회는 성익호나 박현성과 함께 참모가 되어 대장을 도왔는데, 춘천의병이 분산된후 정인회 등은 영동 충청지방으로 가서 그곳 의병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성익환은 춘천의 군인이었다. 당시 춘천에는 재래식 군대 300명과 포수400명등 약 700명의 군인이 있었다. 그런데 초관 박모는 평소 군인들 사이에서 인심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단발을 하였기 때문에 군인들사이에 신망이 있었던 성익환이 중심이 되어 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소응을 대장으로 하여 춘천의병이 조직된 후 성익환은 그 참모가 되었고, 또 가평으로 진격할 때에 성익환이 선봉되어 벌업산 전투를 전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벌업산 전투가 실패로 돌아가고 춘천에서 패전한 후 춘천의병이 흩어질 때에 성익환은 영동지방으로 가서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강릉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했던 민용호의 관동창의록에 보면 '춘천병정초장성익현'이란 인물이 나오는데, 이가 성익환과 동일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부하 500명을 거느리고 여러 번 적과 싸워 공을 세웠다고 했고, 이때(1896년 4월 19일) 통천으로부터 고성군으로 진격하여 군수 홍종헌을 죽이고, 또 양양군수 양명학도 죽인 후, 배를 타고 남하하여 강릉에 들어와 있는 토벌군을 협공하기로 하였다. 이때 강릉부관찰사와 참서관 및 토벌군 중대장등은 모두 놀라 밤에 양양읍으로 도망하였으므로, 민룡호의 의진도 다시 강릉으로 진주하는 등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박현성은 춘천읍의 상민으로서 용력과 담략이 있으므로 그를 중심으로 춘천읍의 상민등 시정인을 병에 가담시키게 되었다.

한국의 병사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초기의 병의 구성이 거의 유생을 중심으로 하고, 농민을 가담시켜 활동한 것으로 파악하여 왔으나, 토기 춘천의병의 경우, 유생은 물론 군인과 포수, 상인과 농민이 모두 참여하고 있음을 볼 때에, 앞으로 의병사연구에 새로운 시각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밖에도 『소의신편』에 보면 춘천의 병이 일어날 때에 감역 홍시영 , 유생 이면수. 이수춘.민영문 등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고, 또『관동창의록』에는 춘진순무장 장한두와 춘천의병장 이경응이 보낸 사인 유명하가 나타나고 있다.

또한 춘천의병이 가평전투에서 실패하고 토벌군의 춘천읍 공격으로 의병이 흩어진 후 이소응이 춘천을 떠나게 되자, 춘천의병은 이소응의 종제인 이경응이 거느리게 되었다. 이진응, 이만응, 이경응 3인은 모두 이도빈의 아들인 바, 이도빈은 이소응의 아버지 이도재의 아우로서 이진응은 이소응보다 5세위고, 이만응은 이소응보다 5세 아래, 이경응은 이소응보다 13세 아래였다. 이들 세사람은 처음 춘천의병이 일어날 때에 이소응을 도와 활동하였는데, 특히 이진응은 1895년 음력 12월 25일 싸움에서 피살되었다.

이소응이 춘천을 떠난 후 춘천의병은 이경응이 지휘하게 되었는데,『관동창의록』1896년 음력 정월 10일조에 "춘천의병장이경응전보왈…"이라 한 것을 보면 이보다 앞서 이경응이 지휘를 맡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춘천의병은 그후에도 활동이 뜻대로 되지 않았으며, 2월 15일에는 춘천의병장 이경응의 사인 유명하가 강릉 민용호에게 가서 원병을 청하고 있다. 이때에 민용호는 이 청을 거절하였는 바, 3월 29일 이경응이 춘천의병 200명을 거느리고 민용호에게 합류하였으며, 4월 12일에는 이경응이 제천 의진으로 가기 위해 출발하고 있다. 초기 춘천의병 본진의 활동은 이로써 대체로 끝나고 후기 외당 유홍석의 활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3) 외당 유홍석과 그의 의병장들

유홍석의 자(子)는 효백, 호는 외당이니, 본관이 고흥이다. 그는 춘천 남면 출신으로서, 화서학파의 3대학통인 성재 유중교의 종자인데, 10세 때부터 작은 아버지 성재를 따라 화서 이항로에게 글을 배워 누구보다도 위정척사사상이 투철하였다.

즉, 18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의복제도를 변개하는 령이 내리자, 그는 크게 분개하여 세 수의 시를 지어 이를 성토하니 성재가 이에 감하여 화답하는 시를 지어보낸 일이 있었다. 1895년에 왜인이 대궐에 침입하여 민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니 전국민이 분개하여 들끓게 되었는 바, 더구나 왜인이 강요하여 단발령을 내리고 강제로 사람들의 상투를 자르게 되니 국민의 감정이 폭발하여,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항쟁하게 되었다.

처음에 춘천에서 의병이 일어나 이소응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활동을 벌일 때, 유홍석도 이에 참가하여 함께 싸웠는바, 이는 유홍석과 함께 활동한 며느리 윤희순의 <의병가>등 글중에 '을미년 십이월 십구일' 또는 '병신춘작'으로 된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증명된다. 그러다가 춘천의병이 패전하여 흩어지게되자 외당은 제천으로 가서 재종제인 의암 유인석의 의병에 가담하여 의암을 도와 크게 활약하였다.

의암의 의병부대는 제천, 충주, 단양, 평창 등지에서 크게 활약하여 친일관리인 충주부관찰사 김규식, 제천군수 김익진, 단양군수 권숙, 청풍군수, 서상기, 평창군수 엄문환 등을 죽이고, 또 조령 아래 안보참(수안보)에 있는 병참을 습격하여 크게 승리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적의 공격이 점차로 강화되면서 의암 휘하의 이춘영, 주용규, 안승우, 홍사구 등이 전사하는 등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의암은 용맹하고 날랜 인사들이 많은 서북지방으로 가서 다시 거의하기로 하고 출발하였으나 중도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으므로, 드디어 요동으로 망명하여 의병을 다시 일으키기로 했다.

1896년 8월 20일에 의암, 외당 등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의 사첨에 도착하였다. 이때 청나라의 관리가 무장입국을 금지하므로 할 수 없이 그곳까지 따라간 219명의 의병을 해산하고 재종형인 외당 이하 21명과 함께 심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만주에서의 의병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으므로, 의암과 외당은 1897년에 귀국했다. 이리하여 유홍석은 춘천 남면 발산리 항곡으로 돌아와 그후 한동안 종족과 후진들을 계몽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후 정미년에 해아밀사 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의 책임을 추궁하여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키는 한편, 정미칠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어 일본의 한국통치를 확실히 하기 위해 구한국 군대를 해산시키니, 이에 해산된 군대가 의병을 일으켜 왜병과 전투를 벌이게 되어 전국에서 정미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에 외당 유홍석도 또한 통분함을 참지 못하여 족속인 항와 유중악, 오천 유중락, 족제인 경와 유봉석 등과 모의하고 유영석, 유제곤, 박선명, 박화지 등과 함께 의병 600여명을 모아 가정리 '여우내골'에서 의병훈련을 한 후, 춘천 진병산과 의암소, 가평 주길리 등지에서 왜적과 싸우는 등 치열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에 부근의 종족과 마을 주민들은 남녀노소없이 나서서 군자금과 군량을 거두고 화약과 탄환을 만들어 외당의 의병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러나 유영석이 패하여 전사하고, 또 외당도 부상을 입었으므로 나머지 의병을 정비하여 김로수에게 인계하고 제천 장담으로 가서 상처를 치료하며 군사를 모아 의병을 일으키려 했지만 강력한 왜병의 공격으로 각처의 의병이 모두 흩어져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후 1910년에 국치를 당하자 외당은 "원수 오랑캐의 통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하고 가족과 함께 요동으로 망명하여 광복을 도모하다가 1913년 12월 21일에 만주 회인현 대아하 춘유두 남산의 거저에서 돌아가니, 향년 73세였다.

항와 유중악은 외당의 종숙으로 자는 백현, 헌종 계묘년 생이다. 화서 이항로,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 세 선생에게 학문을 배워 문장과 덕행이 출중하였다. 처음에 이소응을 중심으로 춘천의병이 일어날 때에 항와도 참가하여 격문을 짓는 등 크게 활약하였고, 정미년에 외당이 가정리에서 의병을 일으킬 대에 함께 의논하였으며, 농우 한 마리를 내놓아 군자금으로 쓰게 하는 등, 적극 협조하였다.


오천 유중락 역시 외당의 족숙으로 자는 토원이고, 헌종 임인년(1842) 생이다. 이소응 중심의 초기 춘천의병에 참가하여 싸웠고, 정미년에 외당이 가정리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에 참가하여 함께 활약하였다. 일제시대에는 서당을 열어 후진들에게 학문과 애국정신을 교육했다.

경와 유봉석은 외당의 재종제이며 의암의 종제인 바, 자는 여상이고, 철종 정사년 생이다. 초기 이소응 의병에 참가하였고, 정미년 외당 의병에 참가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유영석은 외당의 의병에 참가하여 가평 주길리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유제곤은 외당의 족질로서, 자는 성우이고, 정축년 생이다. 정미년에 외당의 의병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박선명은 춘천 남면에 거주하던 포수이다. 정미년에 외당의 의병에 참가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또 외당과 별도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왜병의 전선을 절단하는 등 투쟁을 한 일이 있다. 박화지는 춘천 남면 사람으로, 정미년 외당 의병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는데, 왜적의 추적으로 참살되었다.

한편 외당의 의병활동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외당의 며느리인 윤희순이다. 윤희순은 해주윤씨로서 철종 11년(1860)에 한양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품성이 명민하고 언행이 씩씩하였는데, 16세되던 해에 외당의 외아들인 항재 유제원 공에게 시집와서 집안의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적극적으로 처리하였다. 1895년에 춘천에서 처음 의병이 일어나 친척과 향리사람들이 이에 참여하여 싸울 때에 윤여사도 적극 호응하여 부녀자들과 함께 군자금을 모아 의병을 돕고, 또 '방어장', '병정노래' 등 의병가를 지어 남녀노소 없이 부르게 하여 국민의 사기를 높이고, 특히 청년들의 의병 가담을 권고하였다. 그리고 의암의 부인 등과 함께 남장을 하고 타지로 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고, 또 타처의병이 들어오면 밥을 해서 먹이는 등 뒷바라지를 하기도 했다.

그후 정미년에 외당이 가정리에서 의병 600여명을 모아 다시 의병을 일으킬 때에 윤여사는 주민 남녀노소와 함께 이에 참여하여 '여우내골'에서 의병훈련을 하고, 또 화약 탄환 등을 만드는 등 적극 후원하였다. 그러나 가평 주길리 전투에서 외당이 부상을 입자, 외당은 의병 지휘를 김로수에게 맡기고 제천 장담의 성재댁으로 가서 치료를 했다. 그후 외당이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각처의 패잔병과 청년들을 모집하던 중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었다. 외당은 이때에 전 가족을 데리고 요동으로 들어가니, 윤여사도 만리타국의 험한 고생을 하게 되었다. 외당은 만주의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추진하였으나,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드디어 1913년에 외당이 73세를 일기로 돌아가니 윤여사 일족은 기둥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윤여사의 부군 유제원이 돌아갔으므로 윤여사 일족은 더욱 어렵고 외롭게 되었다. 그러나 아들 돈상등이 독립단을 조직하여 왜적과 싸우므로 광복의 희망을 가지고 어려움을 이겨 나가고 있었으나, 1935년에 돈상이 왜병에게 체포되어 고문당해 죽으니 3대에 걸친 의병투쟁의 뒷바라지로 일생을 보낸 윤여사의 인내력도 한계에 이르러 그 해 8월 1일에 만주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4) 기타 병장들

김경달은 춘천 남면 가정리 재궁동 집실에서 태어난 포수였다. 그는 춘천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유중락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그 후에 지평진 등과 함께 양평 전투에서 왜병의 공격을 받고 흩어지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도망하지 않고 끝까지 총을 쏘며 싸우다가 생포되었다. 이때 그의 용감함을 본 적병은 의병을 포기하고 자기네에게 가담하면 죽이지 않겠다고 회유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1896년 3월 2일에 총살당하였다. 그의 장한 기개는 당시 춘천의병의 모범으로서 의암은 『포수 김경달전』을 지어 그의 훌륭한 행동을 찬양하였다.

지용기는 본명이 지홍민인데 춘천군 서기였다고 한다. 1907년에 일어난 외당의 의병이 뜸해진 후, 1908년에는 지용기가 많을 때에는 800명, 적을 때에는 35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춘천 화천 양구를 넘나들며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1908년 11월 2일, 그는 38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춘천 서상면 방동으로 와서 포진했는데, 다음날 새벽 왜병의 습격을 받아 자신과 이하 14명이 장렬히 전사했다.

이밖에 지용기의 아버지 지명좌와 최영석, 최천유, 인찬옥 등의 활동도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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