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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정과 관원, 춘천의 역사, 조선시대

1) 행정구역 및 체제의 변천

조선왕조 건국초기의 중앙의 통치조직과 지방행정제도는 일부의 명칭을 개칭하는데 불과하였을 뿐이며 고려말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그러나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제3대 태종은 중앙의 통치조직을 개혁하여 왕권을 확립하는 동시에 지방 행정제도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이에 태종 13년(1413)에는 서북면을 평안도라고 개칭하고 동북면을 영길도라고 하였다. 이로써 경기와 황해도,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의 5도와 동북면, 서북면의 2면 즉, 경기와 5도양면제는 팔도제도로 정리되었고, 이 조선팔도제도는 고종 32년(1895) 23부제로 개편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조선왕조의 지방제도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군현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나 고려시대와는 달리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한층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편되었다. 즉 고려시대에는 주요 주군에만 지방관이 파견되어 주위의 속군, 속현을 지배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또한 고려시대의 군현제는 행정 외적인 여러 가지 요소에 의하여 결정되었다고 한다면 조선시대에는 주로 호구, 전결수에 의하여 일원적으로 확정되었으며 종전의 임내가 면리제로 점차 개편되어 갔다.

팔도의 도명은 계수관 읍명 위주로 택하였는데 강원도는 강릉과 원주에서 취하여 도명을 정한 것이며, 그 후에 읍호 승강에 따라 도명이 원양도, 강양도, 강춘도, 원춘도 등으로 변천되었던 것으로 볼 때 춘천은 양양과 더불어 강릉, 원주 다음의 대읍으로 꼽혔던 것으로 생각된다.

춘천지역은 건국초에는 대체로 앞서 말한대로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계수관 획정에 의한 체제를 유지하여, 교주강릉도에서는 춘주를 비롯한 원주, 회양, 강릉, 삼척 등 5개 구역이 계수관으로 지정되어 주변의 속군, 속현을 다스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최초의 큰 변화는 태조 5년(1396)에 있었다. 종전의 춘천의 임내였던 가평현에 감무가 파견되고 이어서 태종 13년(1413) 8월 1일에는 경기좌도에 이속된 것이다. 태종대에는 이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행정구역의 개편이 활발히 추진되고, 태종 13년(1413) 10년 15일에는 전국적으로 각 지방의 고을 명칭을 고쳤다. 이때 춘주는 춘천군으로 개칭되었다가 태종 15년 지방관제를 개편하면서 춘천 도호부가 되었다. 세종대에 와서도 계속 행정구역의 조정이 이루어져 세종 6년(1424) 7월 29일에는 춘천 경내에 있던 이포와 회양 경내에 있던 서화는 인제현으로, 회양 경내의 방산과 춘천 경내의 해안은 가까운 양구현으로 이속되었다. 이후 조선전기에 있어서 춘천에는 행정구역상의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조선전기의 춘천에 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세종실록 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는 춘천에 관한 부분과 기타 조선왕조실록에 산발적으로 보이는 기사가 주요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거하여 춘천의 상황을 보면, 당시 강원도는 대도호부 1개, 목 1개, 도호부 4개, 군 6개, 현 11개등 총 21개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었는데 계수관체제를 계속 유지하여 강원도는 다음과 같이 6개 지역으로 나뉘어져 각기 계수관이 군현을 통제하는 체제로 편제되어 있었는데, 이는 <표 2>와 같다.

<표 2>

춘천보호부는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낭천현, 양구현, 인제현 3개현을 통할하는 도호부였으며, 속현으로 기린현이 있었고, 향이 1개소 소속되어 있었다. 중앙관리로서 부사 1명과 유학교수 1명이 파견되었다.

조선후기의 춘천에 관해 가장 상세히 기록한 자료로는 인조 때 편찬된 춘주지와 영조때 편찬된 여지도서를 비롯하여 조선말에 편찬된 읍지가 있다. 춘주지는 인조 26년(1648)에 편찬된 것으로 건치연혁, 산천형승, 누대정사, 관사원우, 불우, 제언, 관방, 총묘고기, 방리, 지계현로, 역원, 토산, 인물, 관가사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특히『춘주지』는 춘천의 행정구역과 각 면리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정리하여 보면 다음의 <표 3>과 같다.

<표 3>

<표 3>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춘천속지에는 춘천이 10개 면과 2개의 속현으로 편제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춘천의 방리에 관한 인조대 이전의 기록이 없었으므로 면리의 변천은 알 수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특수지역인 '향(鄕)'으로 기록되어 있던 '사탄(史呑)' 지역이 '현(縣)'으로 개편되는 변화가 있었다.

그후 춘천의 행정구역상의 큰 변화는 보이지 않고, 다만 그 위상에 있어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즉, 임진왜란 중인 1592년 8월 통정대부 박종남이 춘천부사로서 좌도방어사를 겸한 바가 있으며, 병자호란 후인 1638년 각 지역의 방어체제를 정비하면서 춘천이 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감영과 서로 가까이 있어서 국방상 편의점이 있다고 하여 이전의 춘천영장으로 있으면서 군사를 다스리는데 능력이 있었던 회양부사 권정길을 춘천부사로 방어사를 겸하도록 하였다.

이후 영조 21년(1745) 조덕중이 방어사로 오기까지 춘천부사는 방어사를 겸하게 되었으나, 영조 23년(1747) 전해에 강원도 심리사로 파견되었던 구택규의 보고에 의하여 춘천의 방어사영이 철원으로 옮겨가고 춘천에는 부사겸좌영을 두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영조 31년(1755) 5월 역모사건 수습을 축하하기 위한 춘당대시를 보는 중 과지(과거시험의 답안지)에 임금을 비방하는 심정연의 글이 발견되어 새로운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이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난 강몽협, 봉성 등이 춘천 태생이라 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0년 후인 영조 41년(1756)에 복구되는 일이 있었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인조대의 춘주지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지리지 편찬이 활발하여 춘천지역의 면리, 호구 등을 알 수 있다.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여지도서는 대표적인 지리지로, 그 내용은 제 1편의 < 조선후기 춘천부 면리 호구 통계표 1 >을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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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8세기 중반에 와서 춘천은 종전의 10면과 2개 속현 체제가 대체로 유지되면서 남부내면이 신설되고, 2개 속현이 면으로 개칭되면서 사탄이 외면과 내면으로 나뉘어져 총 14개 면, 114개 리로 편제되었다. 1871년에 만들어진 춘천부 읍지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을 보면 일부 리(理) 명칭의 한자 표기가 바뀐것과 호구수 상의 변화를 제외하고는 『여지도서』에 수록되어 있는 춘천의 행정체제는 19세기 후반까지 거의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호부 체제로 유지되어 오던 춘천은 고종 25년(1888)에 그 격을 높여 유수부로 개편되었고, 2년 후에는 춘천유수였던 민두호가 왕명에 의하여 현재 강원도청 자리에 조정이 위급할 때 피난하기 위해 2년에 걸쳐 이궁을 짓기도 했다.

고종 32년(1895) 5월(칙령 제98호 : 1895. 5. 26. 공포)에는 갑오개혁의 추진에 따라 지방제도 역시 8도제 체제에서 23부 336군 체제로 개편되었는데 이때 강원도는 강릉부와 춘천부로 개편되고, 원주, 영월, 평창, 정선 등 4개 지역은 충주부로 이속되었으며, 원주 감영을 폐지하고 춘천과 강릉에는 관찰부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춘천부는 춘천군, 양구군, 홍천군, 인제군, 횡성군, 철원군, 평강군, 김화군, 낭천군, 회양군, 김성군, 양근군, 전평군 등 13군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편은 인위적인 획정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1년 2개월만에 폐지되고 13도 1목 7부 331군 체제를 유지하게 되었고, 춘천에는 춘천군, 원주군, 강릉군, 회양군, 양양군, 철원군, 이천군, 삼척군, 영월군, 평해군, 통천군, 정선군, 고성군, 간성군, 평창군, 김성군, 울진군, 흡곡군, 평강군, 김화군, 낭천군, 홍천군, 양구군, 인제군, 횡성군, 안협군 등 26개 군을 관할하는 치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2) 관원(官員)

조선초기에는 고려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여 지춘주사가 파견되었으며, 태종 13년에 춘천군으로 개칭되면서 지춘천군사가 임명되었다. 그후 2년만인 태종 15년 춘천도호부로 개편되면서 춘천에는 도호부사가 파견되어 왔다.

당시 지방관아의 직제는 그 격은 다르지만 대개 중앙의 행정체제와 유사하여 부사아래 이(吏), 호(戶), 병(兵), 형(刑), 예(禮), 공(工)의 유강이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부사 이외에 중앙에서 유학교수 1명이 임명된 것을 알 수 있으나 그 외의 하급관원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어떤 관원이 얼마나 춘천도호부 청내에서 근무하고 있었는제 알 수 없다.

조선후기에 와서는 춘주속지에 비교적 자세하게 춘천도호부에 속한 관원 및 관속에 대하여 기록해 놓고 있다. 이를 보면 당시 품관수는 모두 132명(향내 76명, 향외 56명)이라고 하였으나 다음의 도표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명확히 어떤 직종의 사람들이 품관에 속하였는지 불분명하다.

<표 4>춘천도호부 관내 관원·관속수

이들의 총수는 문무관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506명에 이르며, 또한 위의 도표인원에다 군사로 충순위 8명, 충익위 2명, 충찬위 2명, 충장위 1명, 정로위 6호, 갑사 5호를 청내에 속한 인원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 기병, 보병, 초군 등 군역인원과 역종사자, 그리고 각면에 권농이 12명, 이정이 10명,산직이 12명, 착호장 10명, 감고 26명, 도로감고 18명, 제언감고 10명, 목감고 2명, 양강포감고 4명, 선감고 2명, 삼진사공 10명, 유하사공 13명, 역인구 366명이 있었다.

이후 여지도서, 관동지 및 읍지에 기록되어 있는 관원의 수를 정리하여 보면 다음 도표와 같다.

<표 5> 여지도서, 관동지, 춘천읍지 소재 춘천의 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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