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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호구, 전결 및 토산, 진공: 춘천의 역사, 조선시대

1) 호구

조선시대 춘천부의 호구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고, 또 기록이 상당한 시차를 가지고 있는 것 몇 개에 지나지 않으며, 정기적인 변천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따라서 조선시대 춘천의 호구상황에 대한 것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몇 개의 지리지 내용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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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춘천은 1,227호에 구수는 2,201명(속현인 기린현 108호, 251명 포함)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호구통계와는 상당히 다르다.

즉 당시는 대가족제 사회였으므로 지금의 호수 파악 개념과는 당연히 차이가 있고, 인구수에 있어서도 대개 군정을 중심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16세 미만이거나 여자인 경우는 파악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호구통계는 지금과 같이 체계적으로 실시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호구의 증가는 그 지역의 국역 내지는 세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적극적일 수 없었다. 이에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호적에 기록된 자가 겨우 열 중에 하나, 둘' 이라고 그 통계의 부실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구수는 조선후기도 대략 마찬가지지만 당시의 기록보다 훨씬 많았다고 보아야 한다.

한편 조선후기에 편찬된 지리지에 수록되어 있는 춘천부의 호구수는 제 1편의 <조선후기 춘천부 호구수 비교 통계표>를 참고하기 바란다.

2) 전결

조선시대 춘천의 전결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 '간전(墾田)이 5,737결이다' 라고 간략히 기재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수전은 1/10이 조금 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비교적 상세한 내용들이 실려 있는 여러 종류의 지리지가 있다. 우

『춘주속지』를 보면 이 자료에는 전결과는 별도로 '교야광무'라는 항목에서 춘천일대의 교외에 형성되어 있는 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북중평 : 둘레가 30리로 을사년 수해(水害)때 토사가 더욱 심하게 뒤덮였다.

경작하지 않는 곳이 거의 1/3이다.

북내평 : 둘레가 30리이며, 마위전이 1/4이다.

고산평 : 길이가 8리 정도이고, 폭이 겨우 4리이다. 척박한 곳이 1/4이다.

부창평 : 길이가 15리, 폭은 겨우 100보(步)정도이다. 경작하는 곳이 반 정도이다.

학곡평 : 길이가 10리, 폭은 겨우 2리 정도이다. 사석지가 반이다.

부내전평 : 길이가 15리 정도이며, 폭은 고작 5리이다. 논이 반을 넘엇으나 대룡산의 벌 목을 금지했던 때는 수목이 우거져 샘이 그늘짐으로써 계곡의 물이 풍성하여 관개에 여유가 있었다. 근래에는 전자 : 밭을 경작하는 사람, 즉 화전하는 사 람을 말함)가 거의 베어내 버리니 비탈과 계곡이 모두 민중산이 되어버려 천 원이 말라 수세가 빈약해진 까닭에 가뭄을 만나면 전평의 사람들은 더욱 심 하게 피해를 당한다.

대부내평 : 길이가 10리 정도이며, 폭이 5리이다. 척박한 곳이 1/3이다.

서오지평 : 길이가 10리 정도며, 폭이 5리이다. 비옥한 땅과 척박한 땅이 서로 반반씩이 다.

위에서와 같이 당시 춘천 교외지역의 들은 모두 8곳이 있었는데, 임진왜란의 심각한 피해가 채 복구되기도 전인 선조 38년(1605) 강원도 지역은 참혹한 수해를 당하였다. 당시 강원도 각 지역에서는 관사, 창고, 향교 건물이 부서지고 떠내려담곳이 부지기수였으며 농작물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히 춘천의 피해 상황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 (전략) 또 춘천부사 최철견의 첩정에는 '이달 20일 밤 산에서 급류가 The아져 내리면서 소양강가의 정자를 휩쓸어 무참히 부수어 버렸는데 보기에 참담하였다. 그리고 물이 범람하여 사람들이 휩쓸려 가기도 하고 집채는 전부 파손되었으며, 백곡은 매몰되어 모래와 자갈로 뒤덮여서 살아 남은 풀푸기가 하나도 없고 휩쓸려 둥둥 떠있는 집채가 부지기수였다. 상류지역의 수재도 필경 이와 같을 것이다. 물에 떠있는 집채 속에서 닭이나 개가 우짖고 칼을 쓴 죄인이 익사한 채 떠내려오기도 했다. 갈매기는 날개가 처져 날지 못하고 멍하게 앉아 있거나 거꾸로 처박혀 있어 매우 측은한 모습이었다.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곡성이 가득하였다. 이번 수재는 경오년보다 만 배나 참혹하다' 했고(하략) "

라고 그 참혹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 대수해로 국가에서는 휼전을 시행하고, 구제미 지급, 공물 감축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한편『춘주지』에 기록되어 있는 전결의 내용을 보면 이는 계묘년의 장적을 기준으로 기록한 것이데, 당시 춘천은 전답이 총 3,097결(結) 24복(卜) 2속(束)이었으며, 이 가운데 논이 425결 74복 3속이고, 밭이 2,671결 49복 9속이었다. 이 외에 진전답은 모두 2,028결 77복 4속이었는데 이 중 실제 논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곳은 214결 18복 8속이고, 밭은 854결 28복이었다. 또한 제반복호 전답이 모두 967결 18복 3속이었으나 실제로 쓸 수 있는 땅은 841결 82복 4속이었다.

3) 토산·진공

토산이란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말하며, 토공은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을 중앙에 바치는 것으로 세금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토의와 토공, 약재, 토산 등을 수록하고 있는데, 토의란 그 지역의 풍토에 적합한 식물이나 농작물을 말하며, 여기서 토산물로 '금(金)'만을 기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토산은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광물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춘천 뿐만 아니라 강원도 전지역이 공물로 바치는 삼(蔘)에 들어가는 비용이 과다하여 백성들의 큰 고통이 되고 있었다. 광해군 원년(1609) 11월 강원도관찰사 이형욱이 영동 아홉 고을의 풍수재변에 대하여 보고한 기사에 대해 사신이 논하기를,

"사신은 논한다. 강원도 전 도민이, 재산은 공삼하는 폐단으로 털리고 힘은 벌목의 역사에 지쳐서, 떠돌어다니며 원망하고 고달파하는 형상은 참혹하여 차마 말할 수 없었으니, 하늘이 경고를 보임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라고 하는 것에서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 또한 숙종 19년 춘천부사 이현석이 올린 상소문에

"영서의 17고을은 모두 하지하의 전품이라고 공공연히 일컫는데, 결(結)의 전세가 단지 4두(斗)의 쌀만을 바쳤으나, 대동미에 이르러서는 매결마다 반드시 16두를 징수하니, 실로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16두 안에 10두는 중앙에 상납하고, 6두는 본 고을에 그대로 두고서 진상하는 각종의 수요에 충당합니다. 춘천 한 고을을 가지고 말한다면 여러 가지 진상을 여기에서 취하여 장만하지 때문에 원가가 부족하여 더 보태야 함을 면하지 못하여 다방면으로 거두어 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진상하는 인심이 가격은 애당초 상정하여 1냥마다 쌀 12두 남짓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본부에서 봄, 가을로 바치는 인삼의 통계는 5근(斤) 13냥이며, 6두의 미(米)고 그 가격을 적당히 감한 것이 77석 남짓합니다. 그 뒤로 인삼의 품귀현상이 날로 심해져, 인삼 1냥은 동전으로 12냥으로 환산되는데, 본부에서 인삼값으로 민간에게 거두어 들이는 것이 1천 1백 20냥 이상에 이르게 됩니다. 비록 일이 상공하는데 관계되기는 하지만 함부로 거둬들이는 것이 이와 같으니 간신히 남아 있는 백성들이 어떻게 착취당하는 것을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최하등의 전지에 가장 무거운 세금을 물게 된다면 조세의 법이 지나치다고 말할 만하며, 일정하게 정해진 액수외에 갑절이나 징수하는 폐단이 있다면 백성들의 괴로움이 또한 심하지 않게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즉시 백성들을 구제하는 계책을 강구하시어 초미지급(焦眉之急)을 구원하게 하소서."

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공삼(貢蔘)으로 인한 백성들의 과중한 부담과 지방 수령들이 이를 처리하는데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민의 부담은 방납하는 상인들의 횡포로 더욱 가중되었고, 또 그 폐단은 지적되었으면서도 제대로 시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위의 춘천부사 이현석의 상소에 대해 조정에서 논의하는 가운데 숙종의 지시에 따라 비변사에서 보고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전략) 진상하는 인삼은 일찍이 본도의 감사 이유가 진계하기를 '본도의 인삼을 경상이 방납하기 때문에 요구하는 가격은 점점 높아지고 그 품질은 점점 낮아집니다. 만약 원주 고을 부근의 인삼장수에게 영구히 담당하게 하되, 1냥마다 쌀 12두를 지급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캐어다 바치게 하기를 경중의 공물주인이 하는 것처럼 한다면 인삼의 품질은 뛰어나게 좋아져서 일이 매우 착실해 질 것입니다.'고 하였기 때문에, 본사에서 복계하여 정식으로 시해하도록 하였습니다. 경중의 공물의 가격은 본래 일정한 법식이 있으므로 물품의 귀천 때문에 늘려주거나 감해주지 않으며, 원주의 인삼장수들이 애당초 자원에 따라 가격을 결정하여 담당하기로 하였다면, 지금 어찌 감히 마음대로 조등 할 수가 있겠으며, 수령이 된 자도 또한 어찌 감히 마음대로 백성들에게 세금 부담을 가중시켜 인삼징수의 욕심을 채워줄 수 가 있겠습니까? 이 뒤로 만약 이러한 폐단이 있으면 인삼징수 등은 엄중한 형벌로 죄를 정하고, 수령은 계문하여 파직시켜 내쫓는다는 뜻을 청컨대 본도의 감사에게 엄격히 밝히고 신칙하도록 하소서(하략)."

즉 방납의 폐단을 막기 위하여, 방납을 장악하고 있는 경상들에게 맡기지 말고 감영의 가까이에 있는 원주의 상인들에게 대납토록 하는 방안을 강구하여 공삼에 들어가는 비용을 안정시키도록 하였으나 이것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방의 영세한 상인들은 자본력과 전국적인 유통망을 가진 경상들만큼 무난히 방납을 수행할 수 없었고, 특히 전국적으로 삼의 채취가 원활하지 못할 경우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폐단은 거듭 시정의 지시가 있기는 하였으나 쉽게 개선되지 않았으며 춘천은 강릉과 더불어 수량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타지역에 비해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춘주지, 여지도서, 관동지에 실려 있는 토산물, 진공(進貢)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6> 조선시대 지리지 소재 토산물, 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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