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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육로(陸路) 및 수로교통, 춘천의 역사, 조선시대

1) 역원(驛院)

역로는 조선시대 국가에 의해 특별히 관리된 중앙에서 각 지방으로 연결된 도로망으로 행정과 군사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국가시설 가운데 하나였다. 역(驛)은 각 지방에 이르는 도로에 30리마다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마필(馬匹)과 역리(驛吏), 역졸(驛卒) 등을 두어 중앙고 지방의 공문서 전달, 관물(官物), 공세(貢稅)의 수송, 관료, 사행(使行)에 대한 마필의 급여와 숙식의 제공, 변방의 군정고 그밖의 민정관찰을 담당하였으며, 역로를 이용하는 것은 공용사무에 국한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공용에 준하는 이용을 허가하기도 하였다.

당시는 수도와 극히 일부의 지방행정 중심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도시가 발달하지 못하였고, 국가적인 '무본억말(務本抑末)' 정책은 상공업의 발달을 저해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역로는 사회, 경제상의 의미보다는 주로 군사, 행정상의 의미가 컸다고 할 수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도성내 도로는 대, 중, 소로의 세 종류가 있어 그 넓이가 대로는 광(廣) 56척, 중로는 16척, 소로는 11척으로서 도로의 양편에는 2척 넓이의 수구를 파도록 하였다. 또한 전국의 도로망을 모두 서울로 연결하여 대, 중, 소로로 구분하였고, 역, 원, 참 등의 교통시설도 이러한 도로를 따라 설치되었다.『경국대전』에 보면 대로는 서울-개성(開城), 서울-죽산, 서울-직산, 서울-포천에 이르는 4개 도로이며, 중로는 이 4대로와 연결된 개성-중화(中和), 죽산-상주·진천, 직산-공주·전주, 포천-회양, 서울-양근간이고 이들과 연결된 외방의 각종 도로가 소로였다. 이 규정이 후기의 『속대전(續大典)』에는 대, 중, 소로의 구별이 나와 있을 뿐만 아니라 중로 이상의 도로가 상당히 연장되어 있다.

강원도에는 전국의 9개 도로중 2개의 도로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하나는 제 2로로서 한양에서 철원·김화·금성·회양을 거쳐 함경도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제 3교로서 한양에서 원주·횡성·강릉·삼척을 거쳐 평해에 이르는 길이다. 이 노선 가운데 춘천은 한양·망우리·왕산탄·평구·가평·안보역·덕두원을 거쳐 이르게 되며 소양강을 건너 양구로 이어지게 되는데, 가평에서 춘천에 이르는 길 이외의 경춘간 교통로는 지금의 철도나 도로의 노선과 거의 같다. 춘천을 거쳐 가는 제 3로의 도로망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기록을 바탕으로 그려 보면 다음과 같다.

<제3로>

당시 서울에서 양주·포천·영평·철원·김화·금성을 거쳐 회양에 이르기까지의 거리는 380리이며, 흡곡까지는 470리였다. 또 서울·춘천은 205리, 서울·양양은 545리, 서울·원주는 240리, 서울에서 원주·횡성·강릉·삼척·평해에 이르는 길은 880리였다.

그리고 역을 수개 내지 수십개씩 묶어서 각기 구역을 정하여 '도(道)'로 구분하였어며 각 역로에는 종6품인 찰방, 또는 종9품인 역승(驛丞:중종 30년에 모두 찰방으로 통일함)을 파견하여 도내 역정을 관할케 하였으며, 각 역에는 역장(驛長)과 역리, 역졸을 두어 역의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역승은 취재(取才)로서 임명되는 서리출신이 많았고, 찰방과 함께 무록관(無祿官)이었으며, 역장은 역리 가운데 근실하고 문자를 해독하는 자로 선발하여 임명하였다.

강원도에서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찰방은 없고 역승만 3인 있엇으며(전국 찰방5, 역승 39), 『경국대전』에서는 찰방 2인, 역승 2인으로 2개 역로는 찰방역으로 승격하고 종전보다 1개 역로가 증설되었다(전국 찰방 23, 역승 18). 이는『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그대로 유지되다가 역승은 중종 30년(1535)에 이르러 모두 찰방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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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강원도의 역은 초기에는 3개 역도에 속역이 57개였으나(세종실록지리지), 세조 원년(1455)에 이르러 강원도의 역로가 피폐하고, 역승의 관품이 낮아 역무를 처리하는데 원할하제 못하다고 하여 대창도와 보안도를 합하여 대창도라고 칭하고 찰방을 파견하도록 하였다. 그후 역로는 점차 정비되어 세조 8년(1462) 8월에는 은계도(속역 17, 찰방), 보안도(속역 30, 찰방), 평릉도(속역 15, 역승), 상운도(속역 16, 역승) 등 4개 역로로 개편되었다. 춘천의 관내에 있는 역은 보안도에 속하였는데, 보안·원창·안보·인람·부창의 5개 역이 조선말가지 유지되었다.

춘천의 부내에는 보안역이 있어 중심역 구실을 했고 서울 방면에는 춘천시 서면 안보리에 있는 구역촌 자리에 안보역이 자리하고 있어 경기도 지방과 연결되었다.

춘천에서 서울로 통하는 길은 칠송동 소리개 앞에서 북한강 나루를 건너 덕두원에서 삼악산 북쪽 석파령을 넘어 마당골을 빠져 안보리로 가는 길이었다. 이것은 신연강 좌우안이 암벽으로 험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강을 건너 바로 강촌 방향으로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춘주지』에 의하면 석파령이 매우 위험하여 인마(人馬)가 미끄러져 추락하거나 다치는 사고가 종종 일어나 통행하는 자가 큰 불편을 겪었는데 명종 13년(1558) 봄에 우두사의 승 지희가 민간에 권유하여 약간이 미포를 얻어 석공과 야장을 불러 도로를 정비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인조 25년(1647) 보수한지 오래되어 통행이 불편한자 부사 엄황이 다시 인력을 동원하여 보수하였다.

또 낭천으로 가는 역은 사북면 인람리에 자리한 인람역이 있었고, 금강산 방향과 속현인 기린 방면으로 가는 역은 북산면 초입에 있던 부창리의 부창역이 이를 담당하였으며, 홍천, 원주지방으로 가는 남행은 원창역이 있었다.

또한 당시 각 역에는 역의 규모에 따라 역리나 역노비, 역마를 배속하였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당시 강원도의 역리는 총 5,721명, 노(奴)가 4,380명, 비(婢)가 2,097명, 말은 총 515필로 되어 있는데, 춘천에는 5개 역에 대마 4필, 기마 6필, 복마 11필과 역리 46명, 노 154명, 비 71명이 배치되었다.


원(院)은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기타의 여행자들에게 숙식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요로에 설치한 일종의 공공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역과 관련을 가지고 설치된 것이지만 원은 사적(私的)인 이용도 있는 만큼 국가에서는 원보다도 역에 비중을 두고 관리하였다.

원은 점차 발달하면서 공적인 성격의 기관으로 개편되어 태조 6년에 편찬된『경제육전(經濟六典)』에는 원에 관한 규정이 기재되었고, 세종조에는 원주에게도 역리, 진척등과 함께 봉족을 지급하였으며, 동왕 27년(1445)에는 대, 중, 소로의 원에 따라 대로의 원에는 1결 50부, 중로에는 1결, 소로에는 50부의 토지를 지급하였다. 이는『경국대전』에 와서 개정되어 대로 1결 35부, 중로 90부, 소로 45부의 원위전을 지급하였는데, 이 토지는 모두 자경무새(自耕無稅)였다. 또 원주에게는 보 3인을 배정하였는데, 보인에게는 다른 역을 부과하지 않도록 하였다.

성종조에 편찬된『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강원도의 원은 총 59개소이며, 이는 중종 25년(1530)에 증보된『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64개소로 5개소가 증설되었다. 원은 그 후 점차 감소하여 조선후기에 와서는 23개소(『여지도서』소재)에 불과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춘천의 원은 약사원, 요장원, 청평원, 덕두원 등 4개소가 있었으나 조선후기에 와서 사회, 경제적 변화와 함께 주점, 여점 등이 설립되어 여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게 됨으로써 원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이에 『여지도서』에는 2개(原昌院, 仁嵐院) 『관동지』에는 3개(原昌院, 仁嵐院, 富昌院) 였다.

2) 조운(朝雲) 및 수로 이용

조운이란 현물로 거두어들인 각 지방의 조세를 선박을 이용하여 수도까지 운반하는 제도로 조전, 혹은 조만, 해조라고도 한다. 또 내륙지방의 수로를 이용하는 경우는 수운, 또는 참운(站運)이라고 하여 해로를 이용하는 것보다 편리한 점이 많았지 때문에 일찍부터 운송수단으로서 발달하였던 것이며, 특히 중앙집권적인 왕조지배체제하에서 지방물자의 중앙조달은 필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조운은 대단히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였다. 이에 국가에서는 지방의 세곡을 수송하기 위하여 수로의 요충이 되는 강변에는 수운창을, 해변에는 해운창을 설치하여 육로를 통하여 세곡을 모으고 선박을 항상 준비하였다가 매년 일정기간을 정하여 수도의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한편 창고는 3년, 5년 또는 10년마다 이를 감독하는 감독관이 물품조사를 하였으며, 세곡을 안전하게 수송하기 위하여 모든 조선은 600석을 한도로 하여 싣고, 조운을 시작할 때는 30척을 1종(綜)으로 하여 순차로 운항하도록 하였다. 또 읍계나 서초 등에 표지를 하고 수로에 익숙한 자를 승선시켜 안내하도록 하였으며, 만일 조운선이 난파하게 되면 그곳 지방관은 지체없이 이를 구제하고 선적미곡을 건조해야 하였으며, 난파가 된지 2일이 지나도 현지에 나타나지 않거나 부하관원을 보낸 지방관은 처벌하였다.

조운으로 운송된 세곡은 한양 한강변에 설치된 군자창, 풍저창, 광흥창등 경창(京倉)에 저장되었다. 즉 해운을 통하여 한강 하류에서 거슬러 올라온 황해도, 충청도, 전라도의 세곡은 광흥창과 충저창에 수납되었고, 수운을 통하여 한강 상류에서 운송해온 세곡은 군자창에 수납되었다.


조선시대 강원도 지방의 세곡은 일시적으로 영길도(함경도)로 옮겨져 군자로 사용되거나 혹은 지역에 따라서 서울로 운송하지 않고 현지에서 군량, 혹은 기타 관수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경국대전』에 세곡 운송에 관한 규정이 생기면서 원칙적으로 세 경로를 통하여 경창으로 집결되었다. 하나는 경창으로 직접 납부하는 것이고, 또하나는 춘천의 소양강창에 집결시켜서 북한강을 따라서 경창으로 납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원주의 홍원창에 집결시켜 남한강을 이용하여 운송하는 것이었다. 그 수송로 구분을 보면 첫째 경창직할구역으로는 회양·금성·김화·이천·평강·안협·철원이고, 둘째 소양강창구역으로는 춘천·홍천·인제·양구·낭천·흡곡·통천·고성·간성·양양이며, 셋째 홍원창의 구역으로는 원주·평창·영월·정선·횡성·강릉·삼척·울진·평해 등이었다. 경국대전의 규정이 있기 전에는 횡성·원주·영월·평창·정선·강릉·삼척·울진·평해 등 9개 지역은 원주 홍원창을 통하여 납부하였고, 양양·간성 등 강원도의 나머지 17개 지역은 경창에 납부하였는데, 경국대전이 만들어지면서 강원도의 세곡운송을 원주 홍원창 구역과 춘천 소양강창 구역으로 양분되게 되었다. 그러나 철원·이천을 비롯한 강원 북부의 7개 지역은 춘천으로 옮겼다가 경창으로 운송하는 것이 오히려 인력과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되거나 별 차이가 없다는 관찰사의 건의에 따라, 성종대에 경국대전이 개정 보완을 거쳐 완성될때에 강원 북부의 7개 지역은 경창에 직납하도록 규정된 것으로 보인다.

소양강창이 설치된 춘천의 소양강은 화천쪽에서 흘러오는 지류와 인제쪽에서 흘러오는 지류가 합류하는 곳이며, 흥원창은 충주(평창, 영월, 정선을 흐르는 강이 모두 이와 연결)쪽에서 흘러오는 남한강 줄기와 횡성, 원주를 거치는 섬강이 합류하여 여주로 흐르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모두 수로의 요충지로서 주변지역의 세곡을 효과적으로 집적시키고 이를 다시 서울로 운송하기에 가장 편리한 지점에 조운창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동해안 지방은 형식적으로 세곡운송구역이 획정되어 있었지만 구분만 되었을 뿐이지 실제로는 고려시대처럼 대부분 군사용으로 충당되거나 아니면 주로 해로를 이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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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강원도의 수로와 해로를 이용한 운수는, 내륙수로를 이용하는 영서지역과 해로를 이용하는 영동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영동지역은 선박을 이용할 만한 하천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지만 영서지역은 남한강과 북한강, 임진강의 줄기, 혹은 그 지류가 접해있는 지역이 많아 수로를 통한 운수에 있어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남한강과 북한강 줄기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수로로, 평창·정선·영월·원주·횡성은 남한강이 이용되었고, 인제·양구·낭천(화천)·춘천·회양지역 등은 북한강이 이용되었다. 특히 춘천·원주지역은 수로가 합류되는 지역으로 타지역보다 수로의 이용에 편리한 곳이었다.

춘천은 타지역보다 수로를 이용하기가 편리한 지역 가운데 하나로, 특히 수로를 통한 운수에 있어서 세곡의 운반 이외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물자는 목재나 기타 토산물의 수출과 소금의 수입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목재는 주로 뗏목을 이용하거나 목재를 그대로 방류하여 특정지역에서 수거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소금은 배를 이용하여 수로를 따라 각읍의 나루까지 운반하여 공급하고, 수로가 닿지 않는 지역은 가장 가까운 읍의 나루까지 운반하고 그곳에서 육로로 통하여 운반하였다.

『세종실록』을 보면,

"강원도의 백성들이 매년 농한기에 목재를 베어내 뗏목을 만들어 아래로 흘려보내 서울의 한강에 도착하여 매매하는데, 혹 이것을 전업으로 하는 자도 있다."

라고 하여 일찍이 강원도에서는 북한강과 남한강을 이용한 목재의 운송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북한강을 이용할 경우는 춘천의 모진강(춘천댐 방향)과 소양강(소양댐 방향) 두 강을 통하여 서울로 수송되기 때문에 춘천부에서는 포구에 양강포감고를 배치하여 이를 감독하고 수세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또한 각지의 육로가 이어지는 강에는 폭이 좁고 다리 설치가 가능할 경우에는 다리를 놓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나룻배를 비치하여 사람과 물자를 운반하였다. 특히 교량이 설치회어 있다고 하더라도 여름철에 범람하여 교량이 유실되었을 때는 대부분이 나룻배를 이용하였다. 춘천에는 춘천댐쪽의 모진과 지금의 칠송동 강가에 신연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