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국방과 춘천

고려의 주현군제는 후기로 내려오면서 지방행정단위로서 도(道)의 중요성이 더해지면서 각도를 단위로 해서 중앙과 지방장관의 중간위치에서 군사관계를 담당하는 도순문사가 임명되었는데 충정왕대를 전후하여 제도화되는 도순문사는 전임관은 아니고 임시직이었다. 또 우왕 때에는 각도마다 원수가 있어서 왜구가 있을 때마다 도의 병마를 지휘하여 싸웠다. 이런 도순문사와 원수제는 공양왕 원년에 이르러 도순문사를 도절제사로, 원수는 절제사로 개칭하고 경관으로 구전 임명하였던 것을 바꾸어 정식으로 제수하게 되면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를 통하여 지방군의 지휘, 행정계통이 중앙에서 각도 도절제사를 통하여 각지의 하급군사조직에 이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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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체제는 조선왕조 개창 후에도 계속 유지되어 조선 태조 때에는 경기좌도, 경기우도, 양광도, 경상도, 전라도, 서해도, 교주도, 강릉도의 8도가 지방군의 군사행정 및 전투수향에 있어서 하나의 단위를 이루었다. 그러데 당시 경상도를 비롯한 전라도, 양광도에서는 도절제사가 군적작성의 임무를 맡는데 반하여 교주도, 강릉도 등 나머지 5도에서는 안렴사가 그 임무를 맡고 있었고, 또 8도 편제외에 동북면, 서북면에는 별도로 군사체제가 있었기 때문에 남방지역과 병렬적인 도단위 파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행정구역이 정비되면서 군사체제에도 변화를 가져와 태조 6년(1397) 5월에 이르러 군사단위로써의 도는 폐지되고, 대신에 각도에 2-4개의 진을 설치하여 첨절제사를 두고 부근에 있는 군의 병마를 통할하여 방어하도록 하며, 도관찰사의 감독을 받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강원도에는 삼척과 간성 두 곳에 진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진의 설치는 국방군으로서의 지방군이 보다 확고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후 도절제사도가 복설(復設)된 뒤에도 각도마다 군의 소재지에 약간의 변화는 있었으나 전국적으로 보면 큰 변동은 없었다. 이에 도절제사가 파견되는 영(營)와 첨절제사가 파견되는 진으로 정비되는 동시에 이를 유지하는 군사력을 영진군이라고 하였다.









지방군으로서의 영진군은 주로 마병으로서 지방영진에 부방(赴防)하는 군대였다. 당시 양민이 지는 의무병역은 대개 육수군이나 기선군이었다. 육수군의 범위에 들어갈 수 있는 군사는 번상시위하는 시위패와 영진군 등이 있으나 지방수호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영진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진군을 두어 지방군의 주류를 이룬 지역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4도였고, 강원도는 삼척, 간성 두 곳의 진에 32명의 진군과 25명의 진속방패를 편성하는데 불과하였으며, 그것도 유방은 없고 변고가 있으면 시위패로 충원하는 정도였다.

세종 14년에 편찬된『세종실록』지리지에 기재되어 있는 강원도의 군액총수는 시위군이 2,276명, 선군이 1,384명, 수성군이 11명, 진속방패가 25명이었다. 춘천의 경우는 시위군 298명과 선군 134명이 편제되어 있었는데, 강원도내 주요지역이 병종별 군액(軍額)을 호구수와 함께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7> 강원도내 주요지역 병종별 군액표(세종실록지리지)

조선전기에 있어서 지방군제의 일대 혁신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세조 원년의 일이다. 즉 종래 평안도(서북면)와 함길도(동북면)에 한하여 설치하였던 군익도체제가 전국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는 연해지역에만 설치한 진이 외침을 받아 무너지게 되면 속수무책이 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내륙지방에도 거진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분속(分屬)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국의 각 도는 다시 몇 개의 군익도 나누어 지고, 각 군익도는 중, 좌, 우의 3익으로 이루어졌다. 이 당시 강원도는 강릉도, 원주도, 철원도, 회양도, 고성도 등 5개 군익도로 편제 되었는데 춘천은 양구, 홍천, 인제, 낭천(화천)과 함께 원주도 우익에 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세조 원년의 획기적인 조치는 2년 후에는 다시 진관체제로 개편되게 된다. 이는 주요한 지역을 거진으로 하여 주변지역의 병렬적 제진이 이에 소속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를 보면 종래의 5개 군익도체제를 강릉진, 삼척진, 간성진, 회양진, 춘천진, 원주진 등 6개 진으로 개편하고 주변의 제읍을 분속시킨 것이었다.

후에 이는 다시 개편, 정비되면서『경국대전』에 규정된 진관체제로 정착되었는 바, 춘천은 원주진관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 전국의 군사조직이 진관체제로 체계화되었지만 진에는 항상 무장된 군사가 상주하는 것은 아니었다. 각읍의 군정은 징발되면 중앙에 번상하거나 혹은 특수지대에 부방하고, 평시에는 각종 군사가 비번(非番)인 상태로 거주지에서 자기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변방에 있어서 전략상 요충이 되는 특수지대가 설정되어 이곳에는 항상 일정한 군사가 체류하였는데 이른바 유방군이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강원도에는 강릉과 삼척 두 곳에 각 1여(旅)씩 250명의 유방군이 있었을 뿐 춘천에는 따로 유방군이 편성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후기에 있어서 춘천지역의 군사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춘주속지』에 기록되어 있는 관원,관속 가운데 중군 (1명), 파총(2명), 초관(5명), 방어가군관(58명), 출신(24명), 무학(21명)등을 비롯하여 충순위 8명, 충익위 2명(모두 보인(保人)이 없으며 매년 상번(上番)한다), 충찬위 2명, 충장위 1명, 정로위 6호(매년 상번하며 보인이 14명), 갑사 5호(매년 상번하며 보인은 12명)가 청내에 속한 군사로 기재되어 있으며, 그외 기병 130호(매년 2개월간 상번하며 보인이 383호), 보병 39호(보인이 63명이며, 매년 가포를 납부한다), 취갑 22호(매년 상번하며 보인이 56명), 포보 104명(매년 가포를 납부한다), 어영군 81호(매년 달을 나누어 상번하며 양인은 보가 44명이고 사천은 보가 없고 급복한다)가 있었다. 또 속오오초군 504명(이 가운데 기총 15명, 대총 45명, 화병 45명)과 사복제원 27명 등이 별도로 편성되어 있었다.

한편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진영군관 50명을 비롯하여 군병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적인 복무를 하지 않는 보인이 대부분이었다.

<표 8> 군병표(여지도서)

그런데 춘천의 특이한 점은 다른 군현과 같이 읍성을 쌓아 진을 이루고 방비하는 것이 아니라 읍성은 없고 산성이 있었을 뿐이다. 이는 관아 자체가 봉의산 아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산성으로는 일찍이 삼악산성, 봉산성(봉의산성) 등이 있었으나 이는 조선시대 전에 사용하엿던 것이며,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조선초기의 춘천도호부에는 용화산석성만 있었다. 그러나 점차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퇴락되어『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는 16세기 초가 되면 이미 군사시설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후 임진왜란과 정묘, 병자호란을 거치며 이에 대한 수리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자료가 될만한 기록이 없다. 다만 실행되지는 못하였지만 숙종 원년(1675)에 이르러서는 춘천이 전란시 임금 피난처로 검토되어 김석주가 직접

춘천에 와서 지세를 살피고 숙종에게 보고하기도 하였다.

한편 춘천지방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난 다음에 병란을 교훈삼아 방어살鱁 설치하고 방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인조대에 춘천에 방어영을 설치하였으나 당초의 방침대로 일관서있게 시행되지는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강원도의 군사는 원주진의 6개 지역은 남한산성에, 영동의 9개 지역은 삼척영장에, 회양진의 10개 지역과 춘천부의 군사는 철원영장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에 춘천부사의 방어사 겸임은 큰 의미가 없었다. 이에 숙종은 18년 강원병사의 설치가 건의되기도 하였으나 갑자기 병사를 둘 수는 없다고 하여 춘천방어사를 문관과 무관으로 교대로 임명하지 말고 항상 종2품의 무관을 보내되 명망있고 장수가 될만한 사람을 선임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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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시 춘천방어사는 강원도병사와 같은 직임을 맡도록 하였으나 춘천부의 경제력이 여의치 못하여 방어영 운영에 문제가 있고, 또 도내의 각 지역을 순회하는데 많은 시일이 소요됨으로써 춘천부사의 업무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남구만의 말에 따라 전처럼 방어사를 겸직하되 평시에는 부사의 직무를 수행하고 전란이 발생하게 되면 영동, 영서의 영장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이에 반드시 종2품을 임명하도록 한 종래의 방침을 바꾸어 정3품당상관도 임명하도록 하였으나 종전과 같이 반드시 명망있는 무신을 임명하도록 하였다. 이후 영조 21년(1745) 조덕중이 방어사로 오기까지 춘천부사는 방어사를 겸하게 되었으나, 영조 23년(1747) 전해에 강원도 심리사로 파견되었던 구택규의 보고에 의하여 춘천의 방어사영이 철원으로 옮겨가고 춘천에는 부사겸좌영을 두게 되었으며, 이러한 체제는 대체로 조선 말까지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