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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지역의 한문학

춘천은 산수향(山水鄕)으로 알려져, 예로부터 별업(別業)을 가릴  만한 곳으로 손꼽혀 왔다. 특히 고려 예종 때 이자현이 청형사에 은거한 이후로 더욱 지식 계층의 관심을 끌어, 한문학 작가등의 유람과 가영(歌詠)의 대상이 되었다. 고려조의 문인 이달충,원천석으로부터 조선초의 김시습,성삼문, 조선중기의 이황,유성룡,신흠,이식,허목,김상헌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인들이 춘천의 경승과 민풍을 소재로 한시를 지었고 또 좋은 글을 남겼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김상헌,김수증의 후손들이 곡운정사(谷雲精舍)를 탐방하면서 남긴 시문, 정약용이 역사학적관심과 일민(逸民)의 꿈을 실현하고자 춘천을 두 번이나 탐방하여 남긴 기행시문집, 신위가 지방관으로 와서 민풍토속을 묘사한 한시 등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다량으로 출현하였다. 뿐만아니라 춘천의 토착 문인들이 지방 고유의 미의식을 담은 한시들도 다수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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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예종 때의 이자현(1061-1125)은 이자겸의 사촌으로, 일족이 권세와 부귀를 누리고 있을 때 홀연히 벼슬을 버리고 춘천의 청평산으로 들어와 은둔하였다. 예종이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37년간이나 은둔하면서 노장사상을 숭상하고 참선을 하였다. 죽은뒤에 진락(眞樂)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이자현이 청평산에 은거한 사실에 대하여는 진정으로 자연에 묻힌 것이라는 평가와 그 반대로 단지 헛된 명성을 낚으려고 해괴한 짓을 한 것이라는 혹평이 이어졌다. 『고려사』는 이자현이 농장을 만들어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혹평을 덧붙였고, 『동국통감』은 이자현의 은거가 이름을 얻으려는 짓이었다고 비난하였다. 이자현 자신은

<낙도음(樂道吟)>이라는 오언절구에서 무위자연의 도를 즐기겠다는 마음을 밝혔다. 이 시는 평성  침(侵)운에 속하는 잠(岑),금(琴),음(音)을 운자로 사용하여 담백하며, 언어를 절제하는 한편으로 빈글자들을 많이 이용하여 소박한 느낌을 준다. 이자현은 자신만이 깨우친 경지를 보금(寶琴)에 비유하여 자부심을 드러내었다.


푸른 산 멧부리에 집지어 살며

보금을 지녀 왔노라.

한 곡조 타볼수도 있겠지만

알아들을 사람 없으려니.


이황(1501-1570)은 재상어사(災傷(御使)의 임무로 강원도에 왔다가 청평산 아래를 지나면서 이자현의 일을 상기하고 <과청평산유감(過淸平山有感)>이라는 시를 지었다.


협곡 죄이고 강 굽이돌아 잔도가 기울더니

갑자기 마주치누나 구름 밖 맑은 시내

지금도 여산의 혜원(惠遠)을 말하는데

이곳이 바로 임이 밭갈던 골짜기로다.

흰 달은 하늘 가득히 소회를 밝혀주고

산 안개 자취 없듯 뜬 영화를 버렸구료

우리나라 은일전(隱逸傳)을 어느누가 엮을건가

작은 티 있다 해서 옥구슬을 버리릿가.   


이 시의 서문에서 이황은 도도한 논의를 전개하여, 『고려사』는 확실치 않은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고, 『동국통감』은 『고려사』의 기록을 그대로 믿어 경솔하게 논평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이자형의 은거가 이름을 구하려는 수작이었다고 비난하지만. 그 비난은 영리를 탐하는 사대부들이 불편한 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반박하고, 또 이자현이 농장을 두었다 하여도 세상 영리를 추구한 것은 아니라고 변론하였다. 이황의 논증은 자연에 동화하여 진정으로 세간의 영리를 초월하고자 하였던 문인 학자들의 공감을 샀다. 심광세는 『해동악부』의 <청평산>곡에서 이자현을 찬양하였고, 이익도 『해동악부』의 <곡란암(鵠卵菴)>에서 그러하였다.

춘천의 여러 누정 가운데 소양루는 이미 고려말부터 경승으로 알려져, 그 판상(板上0에는 7언 15언(30구)가행(歌行)의 작품들이 줄이었다. 최초의 작품이 누구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름난 차운(次韻)으로는 이달충의 <차춘일소양강행(次春日昭陽江行)>, 이직의 <차춘일소양강정판상운(次春川昭陽江亭板上韻)>,성현의 <차춘천봉의루운(次春川鳳儀樓韻)>, 이우의 <소양정운(昭陽亭韻)>, 이황의 <과소양강차운춘일소양강행(過昭陽江次韻春日昭陽江行)>등이 있다. 한편 세조의 찬탈에 울분을 느끼고 방랑생활을 한 김시습은 별도로 오언율시인

<등소양정(登昭陽亭)>3수를 지어 방외(方外)에 노니는 뜻을 담았는데, 그 가운데 다음

제1수는 특히 절창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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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나는 저 밖으로 하늘은 다하고

시 읊은 끝에도 한은 그치지 않아라.

겹겹 산은 북쪽에서 꺽어들고

강물은 유유히 서쪽으로 흘러가는데

아득히 모래톱에 기러기 내려앉고

그윽한 엣기슭에 조각배 돌아나간다.

어느 때나 세상 그물 벗어나

흥겨워 여기에 다시 노니랴.   


 김상헌은 이시에 세상 밖으로 벗어나려는 뜻이 있다고 논평하면서, 자신이 조선의 여러 누정을 두루 다녀보았지만, 소양루만큼 정신적인 안정과 낭만적인 꿈을 꿀 수 있는곳이 다시 없다고 하였다. 소양루에 관한 기(記)로는, 이천보의 <소양루중수기(昭陽樓重修記)>, 홍양호의 <소양루중수기>등이 명문으로 꼽힌다.

문소가(聞韶閣)은 효종 초에 부사(府使) 엄황이 봉의산을 배경으로 소양강과 장양강을 굽어보는 곳에 개설한 이후 부임 관리들의 여흥지로서 이름이 높아, 역시 많은 시문을 낳았다. 박태보의 <문소각>시가 저명하다. 이민구의 <문소각기>는 누각 경영의 전말을 밝히고 주변경관을 아름답게 묘사하였고, 오수채의 <중수문소각기(重修聞韶閣記)>는 중수의 전말을 밝혀 물화의 드러남은 그 시기가 있음을 논하였다.

 춘천에는 많은 유배객들이 다녀갔지만, 그 가운데 춘천에서 특별히 학술사상을 심화시킨 인물로는 신흠을 들수 있다. 신흠(1566-1628)은 상월계택(象月溪澤)의 한 사람으로서 조선 중기의 문학의 정종(正宗)이며, 31수나 되는 시조를 남긴 시조작가인데, 47세 되던 광해군 5년(1613)에 계축옥사가 일어나,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 하여 김포로 쫓겨나 있다가, 광해군9년(1616)레 인목대비가 폐위되고 김제남에게 가죄될 때 연루되어 이듬해 봄에 춘천에 부처(付處)되었다. 신흠은 광해군 13년(1621) 5월에야 사면받았는데, 춘천 유배중에 현옹(玄翁)이라는 호를 사용하면서 많은 시문을 남겻고 자신의 학술사상을 정리한 에세이집인『구정록(求正錄)』을 완성하였다. 신흠은 춘천의 소양강을 중국호남성에 잇는 상수에 견주고, 자신을 한나라 조정에서 방축되어 장사왕태부가 되었던 가의나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억울하게 죄명을 입고 상수에 투신한 굴원의 처지와 같다고 여겼다. 신흠은 춘천 적소(謫所)에 칩거하여야 하였으므로 주변 경색을 구경하러 다니지 못아여 춘천에 크게 정을 붙이지는 못아엿다. 그래서 춘천을 산수향이라고 부르는 것은 명실상부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신흠은 욱기의 <탄서부(嘆逝賦)>에 차운하여 세속을 미워하는 심경과 도가의 청정담박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뜻을 담았다. 또 둔갑하는 여우를 소재로 삼아<유호행(有狐行)>이라는 오언고시를 지어 소인배의 적넌(作亂)을 경계하였다. 그리고 도연명의 시에 차운한 시를 102수나 지어 고표청절(高標淸節)을 추구하였다. 이 화도시(和陶詩)에서 신흠은 "바깥 어지러움이 몸체에서 떠낫음을 기뻐하녀, 내면정신을 지켜 안색을 안온케 한다."는 마음자세를 가졌다. 문장으로는, 자조섞인『현옹자찬(玄翁自贊)』에서, 세간 영욕에서 초월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었다. 또 적소에 새로 우물을 파고 지은 <천정기(穿井記)>에서는 『주역』정괘(井卦)의 뜻을 취하지 않고 용장(用藏)이 천운에 달려 있다는 뜻을 진술하였다. 춘천 유배 중에 신흠은 역학(易學) 가운데 소옹(邵雍)의 상수학(象數學)을 연구하여 단편 논문과 시문으로 연구성과를 발표하였다. <전유(前有)>라는 오언고시에서 신흠은 소옹의 상수학에따라 당시를 양(陽)의 소멸시기로 규정하고, 어진이들이 핍박을 받을 수밖에는 없는 때이므로 천운에 내맡겨 성쇠화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체념하였다. 신흠은 춘천의 경관을 두루 환상할 여유를 갖지 못하였고, 기층민들의 삶을 차근차근 관찰하지도 못아였다. 그래서 민가층의 죽지가(竹枝歌) 양식을 빌어 지은 연작시<소양죽지가삼장(昭陽竹枝歌三章)>에서는 춘천의 주변 경관을 인상적으로 묘사하는데 주력하였다.

조선후기 문화사상에서 춘천 일대는 정신적 에너지의 충전소 같은 구실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김수증이 화음동정사(華陰洞精舍)와 곡운정사를 경영한 일과 정약용의 춘천 여행을 들 수 있다. 화음동정사의 유지는 현재 화천군 사창면 삼일리에 있으나,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춘천도호부에 속하였다. 김수증의 조카로서 당대의 대문호인 김창협과 김창흡이 그곳에 노닐면서 많은 시문을 남겼고, 츤천에도 발길을 옮겨 여러 시문을 남겼다. 김수증과 자질(子姪)들이 남긴 곡운구곡가(谷雲九曲歌)와 후손들이 의작(擬作)한 고운구곡가는 노론문인들의 자연미 감상의 높은 수준을 잘 말해준다. 뒷날 정약용도 곡운구곡을 새로 선정하고 곡운구곡가를 지은 것이있다.

젊어서부터 북한강과 그 유역의 자연을 폭넓게 인시하는 공간적 사고를 지녔던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 열수,산수(汕水),습수(濕水)를 비정(比定)하는 문제와 춘천과 맥국,낙랑과의 관계를 고증하는 문제에 대하여, 실지 답사를 통해 정론을 마련하겠다는 의도를 지니고 두 번이나 춘천을 찾았다. 이 두 번의 여행에서 정약용은 일민으로서의 꿈을 실현하는 한편 학문에 정진하는 자세를 더욱 다잡았다. 순조 20년(1820)여름의 첫 두 번째 춘천여행에서는 시집『천우기행권(穿牛紀行卷)』을 엮었고, 순조23년(1823)의 두 번째 춘천여행에서는 기행시문집『산행일기(汕行日記)』와 북한강 하천지인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를 였었다. 정약용은 첫 번째 춘천여행 때 소양정에 올라서 회고시를 지어, 춘천이 백국이 아니라 낙랑의 남부지부였다고 한 『아방강역고』의 주장을 재차 확인하였고, 두 번째 여행길에는 춘천을 맥(貊)이라고 부르는 석은 전혀 오해라고 하여 <맥론(貊論)>이라는 논문을 남겼다. 『천우기행권』에 들어있는 <소양정회고(昭陽亭懷古)>시는 다음과 같다.


어부가 수원찾아 계곡에 들어서더니

붉은 누각이 만정봉 앞에 솟아있다.

궁준(弓遵)과 유무(劉茂)할거하던 자취는 없어졌고

진한과 맥국싸우던 일이 가련키만하다.

우수주 옛밭에는 봄풀만 아스라하고

인제에서 흘러오는 물에 낙화가 어여쁘다.

깁 등롱에 하늘거리는 소매가 무슨 관계 있으랴

모래톱 버들에 석양 비칠 때 홀로 배를 푸노라  


다산은 "조위(曹魏) 정시 연간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바다를 건너와 땅을 차지하여 , 북으로 고구려에 저항하고 남으로 진한을 공격하여 진한 여덟 나라를 취하였다 . 이 때 낙랑이 근거로 삼은 곳이 실은 춘천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두 번째 춘천 여행 때에는 두보(杜甫)의 <성도부(成都府)>라는 시에 운자를 맞추어 오언고시 <우수주(牛首州)>를 지으면서, 춘천이 맥국일 수 없다는 주장을 다시 담았다. 『삼국사기』『고려사』『동국통감』『신증동국여지승람』등 우리 역사서에 의하면 춘천일대는 본래 맥국이었다가 신라 선덕여왕 때 우수주로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한서』에 보면 맥땅은 나무껍질이 세 치나 되고 얼음이 여섯 자나 된다고 하였고, 『맹자』에는 맥땅에 오곡이 자라지 않고 기장만 난다고  하였는데 , 이러한 지적은 춘천의 사정과 전혀 다르다. 그래서 다산은 춘천이 맥국일 수 없다고 하였다. 반면에 우두산에 한나라 사신인 팽오(彭吳)가 세운 통도비(通道碑)가 있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우두주는 본래 한나라 낙랑의 지부가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정약용은 우리 민족의 주체를 한(韓)으로 보고 기자조선 이후 문명국이 되었다는 전제하에 , 춘천 지역이 낙랑의 남부도위로서 일찍부터 우리 민족사에서 주요한 역사무대가 되어 왔다고 추정하였다.

 조선시대의 춘천은 도호부였는데 , 도호부사로 상관(上官)한 이들 가운데 문인-학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유명하고 조선조 오백년의 최고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 신위(1769∼1847)는 순조 18년 (1818) 3월부터 순조 19년 8월까지 춘천부사로 있으면서 청평 문수사에서 익재 이제현이 지은 <시장경비(施藏經碑)>를 발견하고 상세히 고증하는 등 우리 사적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춘천에서 약 300여수의 시를 지었다. 춘천에서 지은 시들을 엮은 『맥록』의 서문에서 신위는, "시를 지명에 연계시키고 , 지명을 다시 갑자(해)에 연계시키는 것이 내 시집의 체제이다. 그러니 어찌 맥이란 이름을 첫머리에 두지 않겠는가? 그러나 뗏목을 타고 동이에 거처하겠다고 하신 공자님의 한탄을 어찌 내가 참람되게 원용할 수 있겠는가? 오랑캐의 땅에 가더라도 말은 충신(忠信)하고 행실은 독경(篤敬)해야 한다고 하신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고자 하니, 그 말씀을 공자님의 제자 자장(子張)처럼 옷띠에 적는 대신에 표제로 삼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엣날 오랑캐인 맥족의 땅이라는 춘천에 와서도 목민관으로서 충신(忠信),독경(篤敬)의 인정을 베출겠다는 뜻을 시집 제목에 밝힌 것이다. 과연 신위는 춘천의 민풍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아, 시로 풍속을 기록하고 풍광을 찬미하였다. 그 가운데 <맥풍(貊風)>12장은 춘천에서 나는 보리,밀,귀리,메벼,기장,수수,메밀,콩,팥,조,면화,삼,들깨,담배 등 농작물을 대상으로 농작방식이나 작황등을 노래하였다. 메밀을 읊은 시는 이렇다.  


절기가 중복의 허리를 마악 돌자

고추잠자리가 석양에서 나와 들끓는다.

흰꽃이 눈처럼울을 에워 향기롭군

열매는 그 사이 50일이면 익겠지.


신위는 여름날 소양정에서 강물이 불어나는 것을 구경하면서 느낌을 장시로 적었는데, 그 시에서 "장양강과 소양강이 백로주를 끼어선, 두 흐름이 만든 고운 모래밭이 들판에 서려 있다."라고 하여 백로주 주변의 명미한 풍광을 묘사하였고, "눈빛을 멀리 우두벌까지 뻗어보매, 고운 저 빛은 인제(기린 발굽의 람)의 산인지아닌지" 라고 하여 우두벌의 공활한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리고 소양강에는 선준석(仙樽石)이 누워있고, 봉의산 중턱에는 승려들이 대죽을 기르는 죽동이 있다고 하였으며, 춘천부 서북쪽에 40리에 있는 고산은 일명 부래봉이라 한다고 적어두기도 하였다.

춘천은 또한 조선중기 이후 문향(文鄕)으로서 재지사족(在地士族)가운데 학문과 문학적 성취가 높았던 이들이 있었다. 대략 조선 중기부터 사마계회(司馬喥會)와 계첩(喥帖)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어, 이경석의 서문이 붙은 계첩이 있었다고 하나 현전하지 않고, 다만 정조 4년(1782)의 시계(詩喥) 뒤에 엮은 춘주사마계첩(春州司馬喥帖)이 현존한다. 이 '춘주사마계첩'에는 모두 14명의 문소각(聞韶閣)시가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는 성삼문의 후손으로 정조 7년(1782) 문과급제하여 홍문관응교/이조참의를 역임한 성덕우(1732-1807),영조 39년(1763)대증광멸시의 표(表)에서 장원하고 사간/동부승지/북청부사/총송부사를 역임한 홍언철(1729-1796), 영조 35년(176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장릉참봉을 지냈고 정조 17년(1793)에 관동지방 유생가운데 경공생을 대상으로 하였던 조문(條問)에 답하여 우수한 성적을 얻어 영서분교관에 임명되었던 박사철(1728-1806)등의 이름이 보인다. 박사철은 춘천의 대표적 호수궁경지사(皓首窮經之士)로서,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하였으나 초야에 자적하면서 정주학설을(程朱學說)을 독실하게 연찬하였다. 정조는 1792년 6월에 강원감사 윤사국에게 관동의 유생가운데 공령생(功令生)과 경공생을 추천하도록 하였는데, 윤사국은 공령생74인과 경공생 8인을 추천하였고, 경공생은 12월에 감사를 통해 어제(御製)의 조문(條問)을 전달받고서 1794년 3월5인이 총9책의 답면을 올렸다. 여기서 박사철의 조대(條對)는 특별히 추장되어 뒷날『홍재전서』에도 수록되게 된다. 춘천에 거처하던 궁경가의 학문 수준이 이렇게 높은 만큼, 사장의 수준도 높았으리라 짐작된다.

 춘천은 또한 정약용에게 천주교 교리를 전해준 이벽의 형인 이격의 지암정자(芝巖亭子)가 있던곳이고, 그 일문인 경주이씨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경주이씨들은 일찍부터 샘밭 <천전리>에 정착하여 있었는데, 정약용은 손자며느리를 경주이씨에게 구하러 오면서, 샘밭에 거처하던 호수궁경지사인 이목(李悰) 참봉을 만나보거나 안부를 묻는 시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목(1749-1833)은  이벽의 족형제로 정조 19년(1795)의 진사시에 합격한 뒤 참봉 벼슬을 하였고 순조 28년(1828) 80세때에 노인우대책에 따라 첨추(僉樞)의 직에 승자(陞資)되었다. 정약용은 <증이목참봉장(贈李悰參奉丈)>과 <간기춘천이참봉목(簡寄春川李參奉悰)>의 시를 남겼는데, 이목도 화답시가 있었겠으나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춘천은 험준한 산하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인데다 우두주의 곡창이 있어 자급자족이 가능하다고 여겨져, 우리나라의 성도(成都)라고 불리워 왔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춘천은 국가가 위난을 당했을 때 사직을 보존하고 국면을 전환시킬 중요한 보루라고 논한 일이 있다. 또 숙종 때의 이옥은 춘천에 제 2 의 행도를 두어 국난에 대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약용도 『산행일기』에서 춘천을 조선의 성도라 하면서 , 국가 위난의 보루가 되어줄 춘천이 지방 아전의 농간과 관리의 잦은 교체로 피폐되어 있는 현실을 마음아파한 바 있다.  구한말의 지식인인 강위는<등봉의산절정(登鳳儀山絶頂)>이라는 칠언율시를 지어 춘천을 국난에 대비하는 요새지로 삼자고 주장하였다.

 

 아득한 하늘은 봉황이 비상할 듯한데

 시야는 진한과 삭방을 다 볼 수 있구나.

 종일 맑은 햇빛이 강물과 수풀을 감싸고

 하늘 가득한 기운이 금성탕지를 보호한다

 구체적인 시정 건의는 이옥만한 이가 없다.

 이제부터  대신들이 이 요새를 방비하겠지

 깊은 근심이 바다에만 있지 않으니.


한편 춘천과 인근 지역에는 명망있는 이들의 묘택이 많아, 그와 함께 금석문(金石文)도 다수 전한다. 서면의 신숭겸 묘·윤금손 묘·신북면의 박항 일가묘·조만영 묘·신헌 묘·남면의 유몽표 일가묘, 동면의 민영휘 묘·김경직 묘· 사북면의 송의 묘·정운호 묘·등에는 신도비나 묘비명이 남아 있어, 한문학의 주요 문체인 비지류(碑誌類) 산문의 다양한 발전상을 살 필 수 있다. 특히 남면 박암리에서는 정조 때의 검서관(檢書官)으로서 문명이 있었던 이서구의 비석이 발견되었는데, 그 묘비는 역시 정조 때의 명문장가인 남공철이 지은 것으로서 , 정조 때 고문의 높은 수준을 잘 말해 준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구한 말에 이르기까지 춘천은 경승지로서 뿐만 아니라 국난의 보루로서 한시문의 가영의 대상이 되어 왔다. 또한 묘택이 많아 비지류(碑誌類)의 금석문을 상당수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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