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후삼국 통일전쟁과 신숭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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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후삼국 통일과정은 바로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쟁패과정이었다. 신라는 이미 무력해진데다가 견훤과 궁예의 침략으로 인하여 영토가 날로 줄어들어, 이 때에는 나라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후백제와 태봉 사이에는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었으나, 왕건은 한동안 온건한 정책을 취하여 고려왕으로 즉위하던 해(918) 8월에 각처의 세력가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후한 예물과 겸손한 인사로써 화친을 보이는 등 전쟁을 피하려 하였다. 이에 견훤도 호응하였다. 이리하여 왕건은 즉위한 후 충돌없이 일시적인 평화를 이룩하였다. 이 시기 견훤은 신라에 대한 공격도 삼가고 있었다.

그러나 견훤이 신라에 야심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려에 대해서 평화를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신라를 정벌하려 도모하였다. 태조 3년(920) 10월 신라의 대량(협천), 구사(경산)의 두 군을 점령하고, 또 태조 8년(925) 11월에는 고려와 볼모를 교환하여 평화조약을 맺고, 동 12월에 거창등 신라의 20여 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태조 9년(926)에 견훤이 볼모로 보낸 진호가 고려에서 병사한 것을 트집잡아 견훤은 고려도 공격하는 등 신라와 고려에 대한 공격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이로부터 고려와 후백제의 두나라는 쉴새없는 교전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의 세력권인 안동으로부터 상주를 거쳐 협천(합천), 진주에 이르는 낙동강 서부일대에 전선이 형성되어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고려의 남진정책과 후백제의 동진정책이 이 시기에 서로 충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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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공주, 합천, 진주로 연결되는 경상도 서변을 확보함으로써 후백제의 공격으로부터 신라를 보호하고 고려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이려 하였고, 후백제는 상주, 안동으로 진출하여 고려의 남진을 물리치고 신라를 후백제의 판도를 끌어들이려 하였다. 이 와중에서 후백제의 견훤은 태조 10년(927) 9월 신라의 경주에 침입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김부를 왕으로 세운 뒤,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 등을 포로로 하고 병기와 보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왕건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친히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대구의 공산에서 견훤과 일전을 벌였다. 그러나 전세가 태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마침내 견훤의 군대에게 포위되어 사태가 매우 위급하게 되었다. 이때 기병대장이었던 신숭겸 장군은 원보, 김락 장군과 함께 힘을 다해 적과 싸워 태조를 단신으로 피신시키고 자신은 장렬하게 태조 대신 전사하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태조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시호를 장절이라 했다. 그리고 지묘사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와 같이 후삼국 통일전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신숭겸 장군은 자신을 던져 왕건의 목숨을 구함으로써, 936년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역사의 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