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려시대 지방제도의 개편과 춘천

고려시대에 체계적인 지방제도가 마련된 것은 성종대이다. 성종 2년 (983)에 12목이 설치된 것이 고려 최초의 체계적인 지방조직이었다. 최승로의 건의에 의해 양주, 광주, 충주, 청주, 공주, 진주,상주, 전주, 나주, 승주, 해주, 황주의 12주에 외관이 처음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강원도 지역에는 목이 설치되지 않았다. 다만 명주에 하서부가 설치되었을 뿐이다.

일찍이 태조 23년(940) 3월에 주, 부, 군, 현의 명칭을 개정하였는데, 이때 광해주가 춘주로 개명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외관은 파견되지 못하였고, 각 지역의 유력자에게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춘주는 비부였던 박유나 토성으로 분정된 세력에 의해 운영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태조대에는 이전의 궁예 통치시부터 시행된 경략지역에 대한 통치방식, 이를테면 자진해서 귀부해 오거나 협조한 지역은 주로 승격시켜 주고, 그곳의 유력자에게 자치권을 부여해 주는 간접적인 통치방식을 취하였다. 이때의 지방 호족들은 아래와 같이 당대 등을 수반으로 하여 그 아래에 병부와 창부를 둔 독자적인 관부를 마련하고 해당 지역을 통치하였다.

360 VR AR & MR

그리하여 국초에는 각 지방의 금유와 조장을 파견하여 조부를 수납케 하였고, 각 도에 전운사를 파견하여 수납된 조세를 점검하고 중앙으로 전운토록 하였다. 그러나 성종 2년 (983)에 향리제가 정비됨에 따라 호족들은 당대등체제는 아래와 같이 호장 - 부호장 체제로 전환되었고 금유와 조장도 혁파되었다.

그리고 전운사는 현종 20년(1029)까지 존속되었지만, 이들은 모두 지방에 상주한 외관은 아니었다. 다만 태조 때부터 군사적인 목적하에 설치한 도호부나 도독부, 진, 그리고 정치적인 목적하에 경영된 서경고 같은 특정지역에만 군사 지휘관과 행정관이 파견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한 성종 2년(983)의 12목 설치가 고려에서 체계적으로 마련된 최초의 지방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춘천지역이는 외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기록상 춘천지역에 처음으로 외관이 파견된 것은 성종 14년(995)에 단행된 지방제도의 개편때로부터이다. 이 개혁은 외관을 대폭적으로 늘려 설치하고 12목이 있었던 주에는 12절도사를 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 밖의 주에는 크기에 따라 7개의 도단련사, 21개의 방어사, 15개의 자사를 설치하였는데, 군사적인 성격을 띤 지방제도의 개편이었다. 또한 전국을 10도로 나누어 행정구역 체계를 정비하였다.

이에 춘천은 10도의 하나인 삭방도에 속하게 되었고, 화주에 있던 안변도호부, 계수관인 도호부사의 지휘를 받는 단련사가 파견되었다. 삭방도는 모두 7주 62현을 관할구역으로 하고 있었다. 그후 목종 8년(1005)에 도단련사, 단련사, 자사 등의 외관이 없어지고, 12절도, 4도호와 동서 양계의 방어진사, 현령, 진장만이 남게 되었다. 이는 군사적인 지방체제에서 점차 일반 행정중심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 뒤 현종 3년(1012)에 다시 12절도사마저 폐하고, 5도호, 75도 안무사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당제를 모방한 군사적인 절도사체제는 완전히 혁파되게 되었다.

그런데 이시기에 있었던 지방제도의 개편과정에서 춘천에 파견된 외관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현종 9년(1018)에 도안무사 체제가 폐지되고 4도호, 8목, 56지주군사, 28진장, 20현령이 설치되면서 외관의 실체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飁의 지방제도 개편으로 남도는 완전하게 목, 지주군사, 현령체제, 즉 일반 행정중심체제로 개편되고 변경지역에만 방어사, 진장체제가 유지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안변도호부 관할구역내 북쪽지역에 있었던 교주나 화주에는 방어사가 파견되고 있었으나, 이들 지역보다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철원에는 지주사가 파견된 점으로 미루어 춘천에도 이때 지주사가 파견된 것으로 사료되며, 실제는 현종 9년(1018) 이전에 이미 지주사가 파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종 9년 (1018)에 개편된 지방제도는 이후 고려 외관제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데,『고려사』지리지도 현동 9년을 기준으로 그 이후의 외관제의 변화과정을 담고 있다. 현종 9년을 기준으로 하여 고려 전기의 지방지배체제인 계수관체제하에서 춘천의 위치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춘천은 등주에 설치한 안변도호부에 속한 영지주이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2개의 속군과 9개의 속현을 거느리고 있었던 영지주였다. 속군으로는 가평군과 낭천군이 있었고, 속현으로는 기린현, 조종현, 인제현, 횡천현, 문등현, 방산현, 서화현, 양구현이 있었다. 후에 횡천현은 원주에, 문등현, 방산현, 서화현은 회양으로 이속되었다. 다시말해 춘천은 다음과 같이 3층으로 구성된 지방 지배체제하에 놓여 있었다.

고려 전기에 중앙정부의 정령은 도를 거치지 않고 지방관이 파견된 주, 군, 현에 직첩되어 시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또 지방관이 없는 고을은 독자적인 영역과 지배기구를 가지고 있었고, 향리가 업무를 보았지만 중앙과는 직접 연결되지 못하였고, 주현의 외관을 통해 지배받았다. 이는 고려의 중앙정부가 외관이 파견된 주현을 통해 외관이 없는 속현을 통치하는 간접적인 지배장식을 취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외관이 파견된 주현도 경, 도호, 목의 주목과 주, 부, 군이 현의 영군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실제 경, 도호, 목의 장관은 3품 이상이었고, 방어진과 주, 부 군, 현의 수령은 5품이상이었으며, 7품 이상의 수령이 파견된 현과 진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외관의 구성도 경, 도호, 목에는 지주부군과 방어진에 없는 사록, 장서기, 법조가 있었고, 방어진과 지주부군에는 7품 이상의 수령이 파견된 현과 진에는 없는 판관이 있었다. 이같은 주현간의 차이는 주목과 영군간의 역할 구분과 차별을 가져오게 한 조건들이었다.

먼저 주목의 계수관들은 왕의 생신이나 팔관회 등과 같은 경축일에는 표를 올려 축하를 하였고, 계내의 각 주현에서 천거되어 과거시험에 응시할 인재들을 시험을 통해 선발하여 서울로 보내며, 계내에서 일어난 장형 이상의 형벌을 감독 관장하고 중앙에 보고하는 역할을 하면서 일정부분 영군이 하는 일을 감독 대행하였다. 그러나 주목의 계수관도 이외의 것은 영군의 주, 부, 군, 현의 수령과 마찬가지로 본읍과 속현을 통치하는 수령의 고유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그러므로 춘천의 지주사는 위에서 열거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중앙에 보고하는 것이 제약되거나, 계수관인 안변도호부사에게 간섭받지 않고 중앙과 직접 연계되면서 2개의 속군과 9개의 속현을 통치하였다.

그 뒤 정종 2년(1036)에 삭방도를 동계로 칭하였고, 문종 원년(1047)에 동북계로 불리면서, 춘천은 동계 병마사의 관할영역이 되었다. 당시 동북계에는 6삭 임기의 병마사와 감창사가 파견되어 있었다. 병마사는 계내의 군사업무 뿐 아니라 일반행정까지도 관장하면서 여러 주진을 통할하고 수령을 감독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감창사는 계내의 소도의 민사와 경제문제만을 관장하여 관할 소도의 조세와 창름을 감시하고 조세의 감면과 진휼을 행하였다. 또한 권농사가 되어 농상을 권장하고 도내의 수령들을 포폄하였다. 감창사가 파견된 도로는 춘주도를 비롯하여 여러 도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춘천은 감창사도의 중심지로서 감창사가 파견되었다. 문종 22년(1068)에 춘천에 춘주도 감창사로 인주 이씨의 일족인 이의가 파견된 사례가 있다.

그런데 문종대에는 양계지역이 병마사 관할체제였고, 서해도 지역은 안찰사 체제, 산남제도는 계수관체제, 동남해도 지역은 도부서가 안찰사 기능을 수행하는 등 지방의 지배체제가 다변화되면서 계수관체제에서 점차 안찰사체제로 전환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계의 남쪽지역은 일반행정구역으로 전환되어 갔고, 춘주도 또한 남도화되었다.

예종대에 춘천에는 부가 설치되었고, 예종 2년(1107)에는 양광충청주도, 경상진주도에 3도 안무사가 파견되기도 하였다. 그 뒤 인종대에 이르러 양광충청도, 경상진주도, 전라주도, 서해도, 춘주도의 5도 안찰사제가 정착되어 춘주도는 감창사도가 아닌 안찰사도로 성립되었다. 그 결과 5도 안찰사제가 정착되는 인종대 이후부터는 춘천에 안찰사가 정무를 보는 안찰사영이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의종 17년(1163)에도 안찰사도인 5도에 춘주도가 들어 있었고, 명종 3년(1173)에 7도 안찰사제로 확대되었을 때나, 동왕 17년(1187) 5도 안찰사제로 환원되었을 때도 춘주도는 안찰사 도로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신종 6년(1203)에는 춘천이 안양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처럼 춘천은 계수관체제하에서 안찰사체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안찰사도의 중심이 되었다. 안찰사는 부임하여 본영에 도착한 후, 도내를 순행하고 돌아와 6삭 동안 본영에서 업무를 관장하였다. 이때 안찰사는 도내에서 일어나는 민생과 관련돤 제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수령의 자질이나 업무능력을 평가하여 출척한 뒤 중앙에 보고하였다. 또한 수령이 행한 송사의 공정함을 살피고 장형 이상의 형벌의 경우 직접 관장하여 처리하였다. 그리고 수령과 함께 도내의 공부를 관장했고, 때에 따라서는 도내 군사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도 안찰사제는 이전의 계수관체제와는 달리 중앙과 도내의 각 주현의 중간기구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수행하는 제도로 전환되어 갔다. 그후 창왕 즉위년(1388)에 5도 도관찰출척사제가 성립되면서 도는 완전한 중앙 행정단위로 자리잡게된다.

그런데 고종대에 외침이 시작되면서 지방제도 또한 변모되어 갔고, 춘천에도 많은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고종 4년(1217) 5월 안양도호부 안찰사 노주한이 거란족에게 패하여 전사하였고, 고종 40년(1253)에는 안찰사 박천기가 문학 조효립과 함께 춘주성을 포위한 몽고군과 항전하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또한 춘주성민이 몽고병에게 무자비하게 도륙당하는 등 춘주가 폐허화 됨에 따라, 안찰사 도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는 동안 도명의 개칭과 안찰사 본영의 이동이 있었다. 고종 4년(1217) 5월 춘주가 함락된 이후, 춘주도가 일시 교주도로 개명되고, 안찰사 본영의 이동이 있었다. 그 뒤 다시 춘천에 안찰사의 본영이 설치되었으나, 고종 40년(1253)에 다시 춘주성이 몽고에 의해 함락되자, 고종 41년(1254)에 도명을 동주도로 개명하였다.

그후 원종 4년(1263)에 다시 교주도로 고쳤다. 그리하여 교주로 안찰사 본영이 옮겨가고, 춘천은 교주도에 속하게 되면서 지사가 파견되었다. 교주는 충렬왕 34년(1308)에 회주목으로 승격되었다가, 충선왕 2년(1310)에 전국의 목이 폐지됨에 따라 회양부로 되었다. 그리고 충숙왕 원년(1314)에 일시 교주도가 회양도로 개칭되었다. 또한 충렬왕 2년(1276)에 안찰사의 명칭도 안렴사로 고쳤고,충선왕 즉위년(1298)에 제찰사로 개칭되었으나, 충숙왕 후년에 다시 안렴사로 칭하였다. 공민왕 5년(1356)에는 존무사도인 강릉도가 안렴사도로 전환되어 6안렴사, 양도순문사제로 되었다가, 창왕 즉위년(1388)에 5도 도관찰출척사제로 변하게 되었다. 이때 교주도와 강릉도를 합쳐 교주강릉도라 하였고, 춘천은 이 도에 속하게 되었다.

360 VR AR & M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