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민족의 침입과 춘천

고려는 초기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이민족의 침입과 이에 대한 응전 속에서 발전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고구려의 옛영토를 회복하려는 염원하에 추진한 고려 태조 왕건의 북진정책 노선이 좌절 또는 변경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는 고려의 내적인 변화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일반의 고려인들은 전투 수행과 이에 따른 노력으로 인해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감내해야만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도 고려인들은 국난극복을 위해 일치 단결하여 각 시기마다 민족의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면서 자주성을 지켜 나갔다.

10세기 말엽부터 11세기 초엽에 이르는 30여년 동안 동북아시아의 패자인 거란족의 침략을 3차례나 받았으나, 춘천지역에는 이들의 침입이 없었다. 그러나 그 후 고종 4년(1217)에 몽고에 쫓긴 거란 잔여세력이 침입해 들어왔을 때, 춘천은 이들에 의해 함락되었다. 또한 최우 집권기인 1231년에는 몽고의 침입이 시작되어 근 30년 동안 9차례에 걸쳐 침입과 철군이 반복되었다. 이 전란으로 전국토가 초토화되었고 수많은 인적, 물적인 피해와 적지않은 문화재의 손실이 있었다. 그러나 이 때 고려는 몽고의 무력에 굴복하지 않고 끈질긴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도 춘천지역은 몽고의 침입을 받았고 눈물나는 혈전을 벌였다. 그리고 고려말 왜구의 침입 때에도 춘천이 함락되는 피해를 입었다.

1) 거란유족의 침입과 춘천

12세기초 거란족이 세운 요가 멸망하고, 여진족이 세운 금이 만주와 중국 북부지역을 장악하고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금도 13세기초에 이르러서 남송과의 오랜 항전으로 국력이 양화되고 정치기강이 행이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고, 이 틈을 타 몽고족이 일어났으며, 결국 1234년에 이르러서는 금을 멸망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의 변화하에서 요의 멸망 이후 금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거란인들이 요동지역을 장악하여 요를 다시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처음에 이들 거란인들은 몽고와 금의 대결에서 몽고와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대금항전에 나섰으나, 그 뒤 대요수국을 세워 금과 몽고의 지배를 모두 거부하고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금나라는 요동순검사 포선만노로 하여금 이를 토벌토록 하였다. 그러나 포선만노는 대요수국을 두려워 한 나머지 두만강 유역의 간도 지역으로 가 동진국을 세웠다. 이처럼 거란이 대요수국을 세워 위세를 떨쳐나가자 몽고는 포선만노의 동진국과 연합하여 대요수국 토벌에 나섰다.

이에 몽고에 쫓긴 9만 병력의 거란유족들은 1216년 8월 을축일에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침입하였다. 의주에서 평양에 이르는 지역을 유린한 후 서경을 거쳐 강원도의 철원, 원주 일대에까지 침입하여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고려는 고종 3년(1216) 8월 기사일에 노원순을 중군병마사로, 상장군 오응부를 우군벙마사에, 또 대장군 김취려를 후군 병마사로 임명하여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그 해 9월에 대장군 최유공을 동계 겸 춘주도 방호사에 임명하였다. 고종 4년(1217) 거란군이 황해도와 경기도 일원까지 침입해 오자, 다시 5군을 검열하고 상장군 오응부를 중군병마사, 상장군 최원세를 전군병마사, 차장군 공청원을 좌군병마사, 차장군 오인영을 우군병마사, 상장군 유돈식을 후군병마사로 각각 임명한 뒤, 군사를 거느리고 숭인문으로 나가 거란군을 막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해 5월 경진일에 철원이 거란군에 의해 함락되게 되었다. 이에 오응부를 파직시키고, 전국병마사 최원제를 중군병마사로 삼고, 김취려를 전군병마사에 임명하였다. 거란군은 5월 계사일에 원주를 공략했으나, 원주인들이 힘껏 싸워 이들을 물리쳤다. 이에 거란군이 횡성으로 퇴각하여 주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철원과 횡성사이에 있었던 지역은 거란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때 봉의산성에 진을 치고 있던 안양도호부가 거란에게 함락되었고, 안찰사 노주한을 비롯한 많은 관원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또한 그 동안 지속된 거란의 침입에도 용감하게 항전해 오던 원주 또한 이 달 기해일에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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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고려군은 7월 경진일에 이르러, 최원세, 김취려 장군등이 충주와 원주 사이로 거란군을 추격, 맥곡에서 교전하여 적 300여명을 죽였고, 박달현에서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적들이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도망치자, 고려군은 거란군을 추격해 명주 모로원에서 격파하고, 많은 물자와 무기 등을 노획하였다. 그러나 적들이 강릉을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 후군이 미처 도착하지 못해 4군은 적을 추격하지 못하고 강주에 주둔하였다. 우군이 단독으로 안변에서 적과 교전하다 패하고, 진주 오수정이 전사하였다. 이후 동북지역에 있던 적의 일부는 함흥을 거쳐 여진지역으로 들어 갔고, 관군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1218년에 다시 함경도지역에서 평안도지역으로 재차 침입하여 각지에서 노략질을 자행하던 거란군은 고려군의 반격에 밀려 강동성에 웅거하였으나, 여·몽 연합군에 의해 토벌됨으로써 거란의 침입은 끝이 났다.

2) 몽고의 침입과 춘천

8세기부터 흑룡강 상류, 실카강 남쪽의 삼림지대에서 수렵과 어업을 주로 하면서 씨족 또는 부족단위의 생활을 하던 몽고족은 9세기 후반에 오르흔, 도라, 세렝게의 세 하천이 합류하는 곳으로 이동하여, 유목생활로 전환한 이후부터 12세기 말엽까지 분열과 대립의 혼란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1205년 칭기즈칸에 의해 전 몽고족이 통일된 이후 주변의 제 민족에 대한 정복사엽이 전개되면서 마침내 고려에까지 그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고려가 처음으로 몽고와 접촉을 가지게 된 것은 몽고에게 쫓겨 고려 영내로 들어온 거란인을 협공하면서부터이다. 거란은 금이 망할 무렵 독립하였다가 다시 몽고에게 쫓기어 고려로 들어와 강동성에 웅거하였는데, 고려가 몽고군과 함께 이를 협공하여 함락시킨 일이 있었다. 이후 몽고는 고려에 대해 은인으로 자처하고 고려에 대하여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였으므로, 고려와 몽고의 사이는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몽고사신 저고여가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살해된 일이 있었는데, 이를 구실로 몽고는 고종 18년(1231)에 제 1차 침입을 감행하게 되었고, 이후 30년동안 6차례의 침입이 더 있었다. 이 과정에서 춘천지역이 몽고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은 것은 몽고의 5차 침입때인 고종 40년(1253) 이후의 일이다.


이전 몽고의 4차례 침입에 대해 고려는 그 때마다 무력항쟁과 외교적인 교섭을 병행해 가면서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였다. 몽고는 이 과정에서 고려의 국왕이 강화도로부터 출륙할 것과 국왕의 입조를 요구 조건으로 제시하였고, 고려는 몽고군의 철병을 전제로 한 강화를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와 몽고의 교섭은 교착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고종 38년(1251) 6월에 몽고는 정종의 사후 5년간의 혼란을 극복하고 툴루이의 장자인 몽케를 제 4대 황제로 선출하였다. 몽고의 헌종은 즉위한 후 1251년 10월 고려에 사신을 보내 출륙환도와 국왕의 입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헌종이 보낸 몽고의 사신 도케와 아투 등이 당면 현안들을 타결하지 못한 채 귀환하자 헌종은 고려에 대한 무력침공을 결심하였다. 헌종은 고려에 대한 재침공을 단행하기에 앞서 1253년 4월에 요양에 주둔하고 있던 아무간과 쑹주의 군대를 고려 서북계 방면으로 진출시켜 고려에 대한 무력시위를 벌이도록 하는 한편, 5월에는 당시 강화도에 있던 고려 조정에 출륙환도와 국왕의 입조가 이행되지 않을 경우 전면적인 공세를 취하겠다는 최후통첩을 전달하였다. 고려는 이러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몽고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몽고는 고종 40년(1253) 7월에 황족 예구를 고려 원정군의 원수로 임명하고 아무간과 홍복원을 부장으로 삼아 고려를 침공하였다.

몽고군은 7월 3일 고려 서북계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여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7월 15일 서경에 도착한 몽고군은 군대를 동군과 서군으로 양분하여, 동군은 쑹주의 지휘하에 고려의 동부내륙지역을 종단하면서 유린토록했다. 그리하여 쑹주의 동군은 1253년 7월 15일 서경에서 동북계의 화주로 향한 수, 화주 - 안변 - 철원 - 춘천 - 광주를 잇는 통로로 척후기병대를 진출시켜 서북계로부터 남진하고 잇는 원수 예주의 서군과 연락을 유지하도록 함으로써, 춘천을 포함한 강원도 지역이 몽고의 침입 이후 처음으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동군의 주력부대는 척후기병대의 뒤를 따라 8월 14일 화주를 함락시킨후, 별동대를 편성하여 안변 - 통천 - 고성 - 간성 - 양양 - 강릉에 이르는 지역을 약탈토록 했다. 그리하여 동군의 별동대는 8월 중순부터 안변을 공략했고, 10월 하순에는 양양을 거쳐 강릉까지 진출하였다. 쑹주의 동군 본대는 안변에서 선봉 척후부대가 남하한 경로를 따라 남진하여 8월 하순에 철원 근교에 도착하였다. 당시 철원에는 방호별감 백돈명이 부사, 판관 및 인근 금성, 김화 등지의 수령들과 합께 산성으로 피신한 군민들을 지휘하고 있엇다. 그런데 당시 방호별감 백돈명과 현지의 수령들 사이에 추수문제를 놓고 의견이 대립되어 있었고, 또 몽고군의 공격에 대한 대응전략 문제를 갖고 논란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백돈명은 몽고군이 포위망을 구축하기 전에 선제공격으로 적의 예봉을 꺾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예군 600명을 성밖으로 출진시켜 철원성의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적을 물리치자는 현지 수령들의 건의를 무시하였다. 그 결과 평소 백돈명의 독선적인 지휘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병사들도 성밖으로 나오자 모두 흩어져 달아나 버렸고, 성안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몽고군은 이 틈을 이용해 철원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그리고 이어 춘천을 향햐 남진하여 8월 말경에 춘천을 포위하였다. 이 때 춘천성에는 안찰사 박천기와 문학 조효립이 춘천과 인근의 군민을 거느리고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몽고군은 춘천성을 포위한 후 사자를 보내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안찰사 박천기와 성내에 있는 춘천민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항전할 것을 결의했다. 9월 초부터 몽고군은 포로로 붙잡은 고려인들을 동원하여 춘천성 주변에 2중의 목책을 구축하고, 목책 둘레에 한 길이 넘는 참호를 파서 고려군이 성밖으로 출진하여 반격을 가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와 동시에 보름에 걸쳐 춘천성에 대해 파상적인 공격을 가함으로써 고려군의 전력을 소모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성내의 고려군민들은 군량과 방어용 시석이 모자라 더 이상 수성전을 계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구나 성내의 우물이 모두 말라 식수가 고갈됨에 따라 말과 소의 피를 내어 마시는 상황이었다. 군졸들의 피로가 극에 달하자, 조효립은 성을 지킬 수 없음을 알고 그의 처와 함께 불속으로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또한 안찰사 박천기도 더 이상 대책이 없자 성안의 재물과 양곡을 불사르고, 9월중순에 600여명의 결사대를 거느리고 성밖으로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박천기의 조치는 몽고군이 구축한 목책을 파괴하고 포위망을 돌파함으로써 외부와의 통로를 확보하려는 마지막 방책이었다. 성밖으로 출진한 결사대는 몽고군이 설치한 목책을 파괴하고 넘었으나 참호를 돌파하지 못한 가운데, 몽고군의 집중적인 반격으로 박천기를 비롯한 군사 전원이 춘천성 밖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몽고군은 춘천성의 동문과 남문 방면으로 그들의 공격력을 집중시켰다. 이에 성내의 군민들은 몽고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동문과 남문에 집결하여 싸웠다. 그러나 춘천성은 몽고군의 당거와 수십대의 발석거에 의해 동문과 남문의 성문과 성벽이 무너지면서 몽고에 의해 급기야 점령당하게 되었다. 춘천성을 함락시킨 후 몽고군은 최후까지 저항한 성내의 군민 300명 이상을 무자비하게 살육하였다. 이 때의 춘천성 상황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당시 박항은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부모의 시신을 찾았다. 성 및에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부모가 어디에서 죽었는지 알지 못하자, 박항은 부모와 용모가 닮은 사람 모두를 거두어 장사를 지냈는데, 그 수가 300여인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뒤 박항은 어머니가 포로로 잡혀가 연경에 있다는 말을 듣고 두 번씩이나 가서 구하려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몽고군은 춘천성을 함락시킨 후 여자나 어린아이는 노비로 팔아넘기기 위해 포로로 잡아가고, 남자들은 모두 무자비하게 죽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춘천성민과 안찰사 박천기 등이 한계상황에 놓여 있었던 봉의 산성에서 잔혹한 몽고군과 맞서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항전한 저항정신이나 문학 조효립이 그의 처와 함께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던짐으로써 적에게 붙잡혀 당하게 될 치욕을 막고 스스로 명예를 지키려고 한 정신자세는 당시의 춘천인들이 오늘날 우리 후손에게 남겨준 위대한 역사적 유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3) 왜구의 침입과 춘천

고려말 충정왕 2년((1350)까지 40여년간 지속된 왜구의 침입은 몽고와의 전쟁이후 심화된 고려왕조내의 정치적 갈등과 경제적인 무질서를 극복하려는 일련의 개혁활동을 무력화시키며 사회적 혼란을 증대시켜 갔다. 특히 이 시기에 전개된 원과 명의 교체에 따른 대륙정세의 변화는 내부적으로 정치적인 대립과 갈등을 더욱 증폭시켜 고려 왕조내의 새로운 정치질서 개편을 몰고 왔다.

원래 왜구는 한반도와 중국의 해안지대에 출몰하여 약탈과 살육을 일삼은 해적집단을 말한다. 삼국시대부터 왜구의 출몰이 있어 왔으나, 이 기간동안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게 이루어졌다. 그 이유는 당시 일본이 남북조의 혼란기에 처하여 지방세력가들이 서로 전쟁을 벌임으로써 국내의 사회질서가 붕괴되었고, 이로 한하여 생활기반을 상실한 일부 무사집단과 농민들이 대마도, 송포, 일기등을 근거지로 하여 해적활동을 전개했으나, 일본정세의 혼란으로 이들 변경 지방에 대한 통

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왜구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우리나라의 해안을 집중 공략하였다. 주로 근접지역인 남해안과 조운선의 통로였던 서해안이 왜구들의 약탈대상이 되었다. 14세기 초까지만 해도 왜구의 침입규모나 횟수 그리고 피해 정도는 그다지 심각한 편은 아니었다. 왜구의 침입은 단지 국지적인 성격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14세기 중엽인 충정왕 연간에 접어들면서부터 왜구들의 규모가 대형화되고 침입대상 지역도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때부터 왜구는 고려의 해안이나 도서지방에 빈번히 침입하여 조운선을 탈취하겨나 민가에 방화하고 살육과 약탈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공민왕대(1352 - 1374)에 이르러 왜구는 더욱 기세를 떨쳐 이 기간동안에 무려 100회가 넘게 침탈하였다. 삼남일대는 물론 강원지역을 포함하여 전국 각지에서 침탈행위를 자행하였고, 해안지방은 물론이고 내륙지방까지 왜구가 출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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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운데 고려에서는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1374)하였는데, 특히 우왕대에는 왜구의 침입과 그 만행이 극에 이르렀다. 왜구는 우왕 4년(1397)에 양광도와 전라도, 그리고 경상도의 내륙지방으로 침투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였으나, 고려군의 공격으로 빈번히 실패로 돌아갔고, 1379년 이후 계속된 동해안 일대에서의 침입도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1383년부터 왜구는 다시 대규모 선단을 동원하여 먼저 남해안 일대를 공격한 뒤, 이어 서해안으로 북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지가 이끄는 고려 선단 47척에 의해, 1383년 5월 관음포에서 왜선 17척이 침몰당하고, 왜구 2,400여명이 섬멸됨으로써 왜구의 시도는 또다시 실패하였다. 이에 왜구는 침입의 양상을 바꾸어 내륙지방으로 침입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이해 6월부터 단양, 제천, 주천, 영주, 순흥등 소백산맥과 태백산맥 주변의 마을을 침입하였다.

고려 조정은 왕안덕을 양광도조전원수로 임명하여, 내륙으로 침투하는 왜구를 대적하게 하고, 전의령 우하를 독찰사로 경상도에 파견하여 왜구를 격파하도록 하였다. 이어 7월에는 교주강릉도 체찰사 최공철이 방림역(평창)에서 왜구 8명을 죽이고, 적의 병장기와 말 59필을 노획하였다. 또 8월에도 왜구 1,300여명이 춘양, 영월, 정선 등지에 침입해 왔다. 이렇게 지속된 왜구의 침입은 9월에도 계속되어 강릉부와 김화현이 왜구들의 침입을 받았고, 이어 회양부와 평강현이 이들에게 함락되었다. 이에 따라 개경은 계엄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왜구들이 강화, 교동 등지로 진출하여 예성강으로 올라와 개경을 위협하던 종래의 방식과는 달리 강원도 내륙지방을 통해 개경으로 진출하려는 의도하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고려 조정은 평양과 서해방면의 정병을 개경으로 이동시켜 수도를 방위하고자 하였고, 전정당상의 남좌시, 밀직상의 왕승귀, 왕승보, 정희계, 인해, 개성군 왕복명, 판개성부사 곽선 등을 강원도로 보내어 왜구를 격퇴하도록 하였다. 왜구에 의해 홍천현이 함락당하였으나 원수 김입견 이을진이 왜구를 공격해 5명을 죽였다. 반면에 남좌시 등은 김화현에서 왜구와 싸우다 실패하였고, 왕승귀는 화살에 부상을 당하였다. 또 이 해 10월에 이르러 왜구는 화천, 양구, 춘천, 가평 등지에 침입하였다.

도체찰사 남공철이 화천으로 진군하였으나, 왜구의 습격으로 그의 아들이 적에게 포로가 되는 등 위기에 몰렸고, 체복사 정승가는 양구에서 왜구와 싸우다 패하여 춘천까지 퇴각하였으나, 왜구의 추격으로 춘천마저 함락당하였다. 다만 원수 박충간이 가평에서 왜구 6명을 죽이고 적을 내쫓았다. 왜구는 청평산으로 들어가 이를 근거지로 하여 노략질을 계속하였다. 이에 조정은 찬성사상의 우인열을 도체찰사로, 전밀직 임대광을 조전원수로 임명하여 적을 치게 하였다. 또한 왜구가 안변부 흡곡현을 침입한 뒤 주변의 여러 지역들을 노략질하였는데, 이를 막을 수가 없자 고려 조정은 밀직제학상의 조준을 강릉교주도 도검찰사로 임명하여 이 일대의 왜구 토벌에 나서게 하였다. 원수 이을진과 부원수 권현룡, 병마사 곽충보등이 양양에서 왜구 20명을 죽이고 말 72필을 노획하는 승리를 거두자, 왜구는 고성포로 퇴각하였다. 그 뒤 고성포에 정박한 왜구는 11월에도 빈번한 야간 기습작전으로 고려군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1383년에 왜구들은 소규모 병력을 동원한 국지전을 전개하면서 내륙지역으로의 침투를 기도하였으나, 고려군의 적극적인 토벌작전으로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왜구는 그 활동이 점차 위축되어 침입 횟수가 크게 감소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