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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원 국: 한림대학교 국문학과 재학(97학번).


모래밭에서

▷ 김 원 국 ◁

할머니 한 분이 송충이처럼 느릿하게 모래밭을 걸어가고 있다
모래밭은 붉은 색이고 대추같은 마음이다
태양은 마음만이라도
파래지려는 듯 붉은 가운데 푸른 기운이 맴돌기도 한다
조그맣게 모래가 파이며 게 한 마리가 올라왔다
조금 낯설지도 모르겠다 알게 모르게 모래밭은 조금의
변화를 겪었다 게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많은 생각을 하는 듯 비틀거리며 무거운 발자국에 채이지
않도록 노력했다 게는 무심한 듯 하지만 많은 생각들을
하면서 할머니를 쫓아갔다 할머니는 봇짐을 매었고
추운 듯 옷깃을 여미었다 옷자락에선 싸르르 눈이 쏟아지고
할머니는 혼자서 무척 추워보였다 태양은 마침 재미있는
광경을 발견한 듯이 이들을 길게 비추었고 그러면서
슬금슬금 집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모래밭은 끝이 없는 가운데
할머니의 송충이 같은 걸음은 변화가 없다 잠시 후 어둔 개
한 마리가 뛰어오면 할머니는 어떻게 길을 찾아갈까
무거웠던 발자국들도 소리없이 집을 찾아간다






















가을 생각

▷ 김 원 국 ◁

너무나 빨리 걷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조금 더 무겁게 걸어보고 싶었다
가을처럼도 생각해 보고 싶었다
이미 떠나간 가을은 머무르던 동안 많은 생각들을
했다고 했다 가을이 떠난 자리에는
수북히 생각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나에겐 쓸모가 없었다 가을의
생각은 곱게 태워져 겨울을 불러왔다
겨울이 무섭게 달려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은
겨울이 놀기 좋은 땅이다 조용한 가을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나도 무언가 생각을
해 보려 했다 그러나 무의미한 생각들조차
한데 이어지지 않고 가닥가닥 사방으로
쳐들어갔다 올챙이마냥 제멋대로인 생각들을
한데 불러 모을 수가 없었다 미약하게나마
가을에 대한 생각을 해 보았다 도무지 그의 생각들은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그리워졌다
그의 수많았던 생각들을 알 수는 없었지만
감동이 숨어있는 것 같았고 잘하면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고 생각했다 떠나간 가을이
아쉬워졌다 힘찬 가을의 어깨짓의 여파가
공기의 유리선을 타고 전해졌다 어깨를 잡히며
자리를 비워주었다 이제 가을의 흔적은 차가워질 것이고
마지막으로 한 호흡 정도 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색깔있는 풍경

▷ 김 원 국 ◁

색깔들 속에서
색이 다른 여러 장의 마음을
들쑤시다 보면
시간은 정지된 채로 빠르게 흘러가 버린다
우리는 어떤 놀이를 하든지 시간은 빠르게 도망치고
내가 멍한 틈을 노린다 흠 개미의 수염처럼
귀여운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적힌
색깔은 팔랑팔랑 나비가 되어 버린다
하늘은 무채색이며 나비 색깔의 종이는
하늘을 가린다 오늘의 날씨는
나비입니다


골목
어리석은 고양이
다가오지를 않는군
나에게 다가온다면 맛좋은
오징어를 줄 텐데
의심하는 고양이와 고통스런 오징어들을
지켜보면 따분할 일이 없지
시끄러운 주민들을 피한
아늑한 골목 모퉁이에는
반갑게도 의심많은 고양이와
고통받는 오징어가
환영해 주네
그들과 친구가 되면 평생
따분할 일이 없지


붕어처럼
라디오를 껐다
붕어의 알처럼 조용해졌다
문뜩 붕어의 알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곳의 따뜻함이 느껴지려고 했다
한편 붕어 알이 되어 보는 건 어떨까 했다
얼마 후엔 붕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붕어가 어디에 사는 지도 모르겠다
혹시 연못에 살지 않을까?
바다는 고통스러우니 연못이 좋겠다
깔끔한 연못에서 깔끔한 붕어가 되어
헤엄치고 싶다
연못의 자갈 속에서 수영하고 싶다
비린내가 나지는 않을까? 냄새를
맡아 보았다 아무 냄새도 없다
냄새마저도 조용해진 걸까
방바닥에 엎드려 헤엄을 쳐 보았다
방바닥을 타고 연못이 흘러왔다









































은빛 물고기

▷ 김 원 국 ◁

나는 은은한 빛을 보았다 그것은 달처럼 부드럽게
헤엄쳐 흘렀다 나는 다다를 수 없었으나
빛이 멀게 느껴지진 않았다 나는 어둠을 헤쳐 가며
하나의 은빛 살과 같이 날쌔지 않은가 하며
미소지었다 세상은 온통 까맣고 땅은
더욱 검게 내려 앉아 가고 있었다 어둠은 시원하고 자유로워지는
지금에 처음부터 어둠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나는
그 많은 나의 세월의 껍질들을 젖히고 날아오르는
샤워 후의 상쾌함 같이 아른한 무엇을 느끼며 나는 생각한다
나의 본질은 유리그릇에 담겨 우주를 떠도는 은빛
물고기 같은 유영의 본능이다 친구들이 곳곳 공기를
들이키려 고개를 내밀면 나는 나의 가슴지느러미로
나의 검은 시대를 미끄러져 간다





























늙은 말

▷ 김 원 국 ◁

나는 나를 떠나서 과거를 향해 가 보았다
진정 나를 느끼지 않고 다른 이들만을 볼 수 있도록
힘썼다 나는 나의 자랑스런 고집과 풋내 나는
긍지를 잠시 감추었다 나의 가족과 옛집과
친구들 또 친하지도 않은 친척들까지 한꺼번에
떠올리려 애썼다 그건 내가 아마도 외로웠었나 보다
어미말의 지친 모습이 문득 과거와 겹쳐지게 보였나
보다 나는 말을 보았다 사람들의 손에 채이고
끌려 다니는 지쳐서 헉헉거리는 혀 삐죽 내민
누런 소 같은 말은 그 불쌍해 보이는 말은 장성한
아들 말들이 셋이나 있는 나이 든 노모와도 같았다
나는 나의 어머니도 어느새 나이가 드셨다는 생각
을 했다 나는 나의 어머니도 혀를 내민 채 지쳐서
비틀거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당장에
어머니의 곁으로 다가가 부축해 주고 싶었다
모두가 감싸안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
했다 나는 너무나 불안하고 또 어둠처럼 외로
웠다 너무나 조용한 주위라 생각했다
























새벽을 지낸 후에

▷ 김 원 국 ◁

왜인지 어딘가가 포근해지는 느낌입니다
어디서부터 푸른 하늘은 젖어왔는지 모릅니다
나의 가슴엔 구멍을 파고 가을비에 젖는 소년이 있습니다
동그랗게 누워버리는 강아지의 인생이 있습니다
새벽 다섯 시의 세계는 깨어지는 세계입니다
모든 것의 정지 속에서 안개가 깨어지고 있습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삐걱거리는 방문이
심란스럽게 흔들립니다
이제 하늘은 개었습니까?
궁금한 소년이 다리를 흔듭니다 종소리가 울립니다
그때 그곳에서도 울렸습니다 함께 밤을 세운 작은
책자 속이거나 그 책자 근처를 서성이는 어떤
마을이거나 행복하거나 깨끗하거나 따뜻하거나
어린이거나 잠자리의 눈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피아노건반같은 졸음이 둥그렇게 날아오릅니다
생각은 선율 속에서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