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해 욱: 본명 - 신 지 연

한림대학교 국문학과 졸업(93학번).

199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나비

▷ 신 지 연 ◁

바람 한 가득 입 안에 머금고
숨을 멈춘 햇살
아래, 보드랍게 날고 있는
붉은점모시나비
온통 날개로만 살아가는
그 사뿐한 몸짓을 시샘하다가, 아니
어쩌면 生이 저렇게 가벼워서야 되리
혀를 차려다가
문득 저 날개도
땅으로 팽팽하게 끌리는 물체임을
깨닫는다

이 가벼움은
죽음 앞에 선 전쟁용사의 굳은 입술
찢길 듯 말 듯 위태로운 날개
무쇠갑옷인양 차리고
투명한 공기 속에 몸을 숨긴
교활한 지구의 중력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맴돌던 꽃이 떨어져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가벼웁!게 날아다니는 나비
의 날개 속엔
돌로 굳은 눈물방울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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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성
─ 팔백광년, 그것은 거리를 넘어선
그리움의 공간이다

▷ 신 지 연 ◁

팔백 년이라나
우리 서로 마주하기 위해
빛이 날아온 먼 길은

우린 그렇게 눈물겹게
만나긴 만난 것인데
그대 그 맑은 빛은
팔백년 전 어느 날의 앳된 눈동자
그대가 마주한 얼굴은
서경별곡 부르던 눈물의 여인
대동강 푸른 물이 된
두어렁셩, 나의 前生이리

팔백 년의 어느 길목쯤
스치우는 옷소매에
눈웃음만 가볍게 묻히고
그대는 나를 향해
나는 그대를 향해
바쁜 걸음 걸음 재촉했을 우리
그 길목의 나무둥치에 앉아
서로의 어깨에
지친 몸 달래어나 볼 것을,
오늘밤에사 마주하긴 마주한 우리는
먼 옛날 까마득히 사라진
어슴푸레한 殘影인 걸

아무리 발돋움해 보아도
팔백 번의 겨울을 보내고야
나의 언덕에 다가올 그대
오늘밤의 얼굴, 안타까움만
목구멍 가득히 넘쳐올라
달맞이 꽃잎 위에 떨어지고
이 먼 길의 저쪽 끝자락엔
들을 수 없는 북극성, 그대의
아득한 숨소리





지리산 겨울밤

▷ 신 지 연 ◁

어디쯤인지도 몰랐다 지리산 산자락이라는 것뿐 스
님의 사륜구동차 더풀더풀 눈길 올라 닿은 곳 둥글게
오려진 하늘 가장자리에 산은 가위자국으로 남고 땅
속 깊은 우물처럼 하늘은 먈갛게 내 얼굴을 담고 있
었다 장작 지핀 나른한 토굴방 송이향 알싸한 穀茶
한 잔이 겨울나그네 흠흠흐흐흠 콧노래로 흩어졌다

새가 좋아 풀이 좋아 산 속에 산다는 늙은 스님, 보
육원이 외로워 동자승이 되었노라고 내 손을 잡고 웃
는다 토굴에서 나는 겁많은 童女였다 여행길 며칠동
안 기름때 절은 머리칼 얼마나 사람이 그리웠겠느냐
고 오늘밤 이 사람의 어머니인 듯 아내인 듯 귀여운
딸아이인 듯 그가 흘린 눈물방울 어쩌면 우물 같은
밤하늘 별로 박힌 지도 모른다고




























자미골 유필규씨네 아기장수
정선군 무릉리 자미골 살던 유필규씨네는 倭政 때 아기장수 아들을 얻었다 한다. 다른 마을에선 엄마 아빠 손에 죽어야 했던 슬픈 아들 ─ 유필규씨는 애엄마도 모르게 실겅 위에서 옹알이하던 아들을 안고 멀리멀리 떠나버렸다 한다. 자미골 장수는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 신 지 연 ◁

맑은 개울물 석탄 가루로 버리고
이젠 그 탄광마저 문닫은 쓸쓸한 마을에
토박이 할아버지는 아직도
아기장수 돌아올 날을 기다립니다
이 골짝 떠난 장수가 못내 섭섭해
입맛만 쩝쩝 다시면서도
어디 공사판 술에 쩔은 막노동꾼
초라한 모습으로라도 살아있어주길
죽지 않고 살아만 있어주길……
먼 산만 바랍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할아버지 누런 이 사이로
정선 아라리 구슬픈 가락이 흘러나와
고향을 등진 옛 이웃이 그리운지
하늘로 날아가구요
늙은 아기장수 어디쯤엔가
아직도 살아있으리란 한 톨 희망
깊게 패인 주름살 속으로 파고들어
서글픈 노래 마디마디 따라
싹이나 틔울 듯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복제양 돌리
영국 로슬린 연구소가 고향인 돌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데, 사람들은 그를 보고 신의 섭리를 비웃은 생명이라 저주하기도 하고 과학의 승리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라며 감격해 하기도 한다.

▷ 신 지 연 ◁

두리번 두리번
옥녀탕에 담긴 설악산처럼
돌리의 맑은 눈동자에
세상이 고인다
돌리를 흘겨보는
로슬린 연구소 무서운 손님들도
그 눈망울 속에 들어만 서면
반짝반짝 빛나는 어린애가 된다

엄마의 따뜻한 눈길도
하느님 은총의 손길도
가까이할 수 없는 외로운 돌리
죽어서도 덮지 못할 흙이불의 품
박물관 추운 전시실 속
박제될 제 슬픈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깡총깡총 뛰다가
없는 엄마 찾아 엄매엄매 울다가
스르르 잠이 드는 주의 어린 양
꿈 속에선
눈망울에 비친 맑은 세상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을지
엄마의 따뜻한 품에
얼굴 묻을 수 있을지















나의 언어

▷ 신 지 연 ◁

詩를 쓰며 나는
고무 함지박 속에서 물장구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엄마의 때타올을 따라
흙무덩이 된 내 몸에서는
굵은 때가 물 위로 둥둥 떠나갔고
아, 그 때 내 살은 얼마나 매끈해졌는지
이불 속에 들어만가면 얼마나 금새 잠이 들었는지

그도 그럴까

詩를 쓴다고
애쓰기는 애쓰는 것인데
땟국물 흐르는 그에게 문득문득 미안해져서
나도 한 번쯤 그의 때밀이나 되어볼까
이불 속에서 버둥거리던 매끈하고 노곤한 종아리
반지르르하게 드러날 그의 빨간 살을 생각해본다

나는 그토록
빛나는 그를 상상하며
때미는 손을 멈추지 않은 것이었는데
문득 손놀림을 멈추고 바라본 그의 자리는
텅, 비어있다
후둑후둑 떨어지던 굵은 때만 수북히 쌓이고
온다 간다 한 마디 없이
그는 사라져버렸다



쌓여있던 때가 다시
그의 몸뚱이로 엉겨붙으며 날개짓한다
하얀 몸에 미련 버리고
촘촘히 배인 세상살이 먼지투성이로 사는 것이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운명이라고
슬픈 얼굴로 送信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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