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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 정: 한림대학교 국문학과 졸업(93학번).



11층에서 내려다 본 세상

▷ 이 수 정 ◁

주차장이 보이고 소금구이 집이 보이고 미용실이 보이고
또 식당이 보이고 움직이지 않는 그 사이사이에 까만 머리들이
느리게 또는 빠르게 움직이고
주차하는 차와 나가는 차가 스치며 교차되고
가스통을 실은 오토바이는 무법자처럼 과감하게 보이고

11층 막힌 유리에서 한 잔의 차를 마시며 내려다 본
내려다 본 세상은 그런대로 괜찮아 보인다
이제야 알 것 같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하며 하늘보고 한숨 쉴 일 아니다
11층에서 내려다 본 세상도 이렇게 한가해 보이는데
하물며, 하늘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늘 태평성대 아니겠나?

11층에서 내려다 본 세상은 보이기만 한다
소리는 10층에서 삼켜버렸나보다
그래서, 저 아저씨와 아줌마가 지금
돈 얘기를 하는지 자식걱정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냥 아저씨와 아줌마가 얘기하고 있다는 것 뿐
하물며, 하느님이 아무리 귀를 쫑긋 세우신 들
'아이고, 하느님!' 소리가 들리기 힘들지 않을까 싶네


















걁에 대한 명상

▷ 이 수 정 ◁

난 걁을 정말 좋아해. 내가 좋아하는 단어가 대부분
걁으로 시작하거든. 그리고 아주 공평한 형태를 갖추
고 있어 양팔을 같은 각도로 벌리고 있는 것 같잖아.
무엇이든 안을 수 있을 것 같은 포근함이 있어. 수정
음, 내 이름이거든. 사랑 삶 소망 솜사탕……. 밤새
워 말할 수도 있지만 이쯤하자. 근데 가끔 걁은 아프
기도 해. 둥글둥글함이 없이 양팔이 뾰족하게 나왔잖
아. 걁은 안으려고 한 건데 남을 찌를 수도 있잖아. 상
처, 사상, 사망, 살기……. 밤새워 말할 수도 있지만
이쯤하자.
수정, 좋아하는 글자이지만 아픈 글자이기도 해. 꼭
쥐고 놓고 싶지 않다가도 어느 때는 획 던져 버리고
싶은 글자, 수정. 무게가 천근만근으로 내 어깨를 짓
누르다가도 하늘로 두둥실 띄우기도 하는 글자.
내가 수정이가 아니었다면 하는 생각을 한다.
나를 버리고 싶다가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이 미치면
힘줄이 끊어질 정도로 부여잡는 나. 난 수정이를 사랑해야만 할 것 같다.

























펑펑펑 눈이, 아이의 눈물처럼

▷ 이 수 정 ◁

하늘만한 얼굴의 아이가 잔뜩 찌푸리고 있다.
사탕을 물고 가다 돌부리에 넘어지기라도 했나보다.
금방 울음보가 터질 것 같은데.
아이가 울기 전의 얼굴은
팔십 노파의 얼굴이다.
세상 다 살아버린 주름투성이의 할머니가 웃는 모양새로
잔뜩 찌푸린다.
터질 듯 말 듯 아이는 엄마가 오길 기다리는 것일까
최대한의 동정을 모으기 위한 아이로서의 영악함은
slow motion의 찡그림을 만들어 놓는다.
아이의 우는 얼굴에선 한 인간의 고단한 삶이 보인다.

하늘만한 얼굴의 아이가 으-앙
드디어 더이상 인내심을 버렸던지
아니면 엄마가 아이의 시야에 들어왔던지
하여간에 하늘이 찢어질 듯 울어 제낀다.
아이의 눈물이 '펑펑펑' 내린다.
이 세상을 젖내나는 눈물발로 모두 덮어버릴 만큼
끝없이 울어버린다. 이제 아이는 눈물을 그쳤다.
그리고 세상은 아이의 눈동자만큼 깨끗한 흰 세상이 되었다
아이야, 너 또 언제 울 터이냐?
하늘을 본다.




















막막한 詩

▷ 이 수 정 ◁

막 살고 싶다고 / 막 살아 버리겠다고 / 마음 속으로
말하고 또 말하지만 / 나는 늘 막 살지 못했고 / 막 사
는 삶이 얼마나 근사할지 / 막, 상상을 하곤 했다. /
막막해지는 순간이 불규칙하게 / 막 밀려오는 때가
있다 / 막걸리 한 사발이라도 마시면 막혔던 마음이 /
뚫릴지 모르지만 무안하게도 나는 막걸리는 좋아하
지 않는다 / 막 가는 인생이 되고 싶지 않다는 고집과
/ 모른 척 막 가고 싶다는 똥고집이 / 막상막하로 팽
팽히 밀고 당기는 사이 / 어쩜 나는 막차를 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꼬마별 하나

▷ 이 수 정 ◁

반짝이는 별이 모두 손가락 다섯 개는 아니다.
나는 매일 별을 본다.
영롱한 별이 모두 까만 밤하늘에서만 빛나는 건 아니다.
나는 매일 별을 본다.
별 하나 별 둘… 별이 무수히 많은 것만은 아니다.
나는 매일 하나의 별을 본다.
내가 보는 별은 내가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다.
내가 보기 싫으면 숨겨둘 수 도 있다.
별과 나는 얘기할 수 있다.
나는 별을 보면 글기차를 만들고 싶어진다.
나는 기차를 글로 만든다.
은하철도 999보다도 긴 글기차를 앞장서는 꼬마 기관사
내가 아무리 길게 기차를 만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앞서 달리는 꼬마별
내가 심통나 기차를 한 칸씩 없애 버려도
종종종 뒷걸음을 칠 줄 아는 나의 꼬마별
"기차를 만들어줘. 네가 만들고 싶은 대로 가고 싶은 대로.
내가 기차를 끌어줄게"
고마운 나만의 까만 별 하나.
"하지만 꼬마별, 너 아니? 가끔은 네가 부담스러워.
나는 기차를 만들 힘이 없는데, 넌 계속 반짝이며 나를 재촉하잖아"
"넌 아니? 네가 만든 기차 칸칸을 뛰어 다닐 때 난 가장 행복하다는 걸?"
오늘도 꼬마별은 긴 글기차를 힘든지도 모르고 앞장서 달린다.

소중한 나의 꼬마별. 나는 오늘도 컴퓨터 턴온(turn on) 버튼을 누른다.
은하 철도 999 출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날

▷ 이 수 정 ◁

'이번 역은 삼각지, 내리실 곳은…' 어, 여기가 어디야?
나는 반대방향으로 실려가고 있었다. 서울역 갈월 삼각지
세 정거장을 지나치도록 까맣게 모르고 나는 반대로 반대로
실려가고 있었다.
서울역이 명동이고 갈월이 충무로이고 삼각지가 동대문운동장이라고
믿으며 나는 까무룩 정신을 놓을 뻔했다.

퉁겨져 나오고 나서 갑자기 웃음이 마구 쏟아졌다.
단지 매일 다니던 3번 출구가 아닌 1번출구로 들어간 것 뿐인데
나는 영 엉뚱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면 처음엔 어이없이 웃고 다음엔 기가 막혀 내 자신의
미련스러움에 가슴을 쾅쾅 치게 될 것이다.

오늘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날이다.
철썩 같이 믿었던 4호선 전철에 찍혔고
오른편 플랫폼에 찍혔고
적당히 비슷비슷한 퇴근길 샐러리맨들의 표정에 찍혔고
세 정거장이 지나도록 넋 놓았던 내 몽상가적 머리에 찍혔다.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다. 1차 증상이다.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2차 증상이다.
그리고 가슴을 '쾅쾅' 치겠지. 3차 증상이다.

나는 오늘 반대로 반대로 달려가고 있었고
까마득히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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