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승 수: 한림대학교 국문학과 재학(94학번).



장례식 情景

▷ 이 승 수 ◁

곡소리
노름하는 소리
음식나르는 소리가
뒤섞였던 어느날

나는
내 이름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유쾌히 웃는 소리
시비거는 소리
배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도 역겨웠던 그날은

내 이름 부르는 소리도 듣기 싫었다.

나는
구정물 같은 소리들을 피해
세면실로 도망쳤다.

문을 걸어 잠그고
아직 치워지지 않은 그의 칫솔을
내 입 안 깊숙히 박아 넣으며

무엇이든 그가 먼저 씹어
내게 먹였던
어느 어린 날처럼

눈물이 가득 고인 입 안을
오래도록 닦아내었다.

내 이름 부르는 소리도
들을 수 없었던 그날은

내 이 닦는 소리만이
세면실 벽을 타고 울려왔다.




연륜

▷ 이 승 수 ◁

공교롭게도 거리는 굳게 다문 입들로
수다스러워지고 있었다.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을 듯한 오후의 입 속에서
사람들이 팔락댄다.
지저분하게 닳아가는 것에 예의주시하며
헌 지폐와 함께 취급되기를 거부하고
이왕이면 세상의 다른 주머니에 별도로 보관되기를
기대하는 그들은
새 지폐 같다. 이제 갓 찍혀 나온

어지러운 냄새에 정신이 들어
하긴, 나도 다르지 않아
사람들의 환대를 당연하게 여기며
빳빳하게 군 적도 많지 않았는가
악수 대신 날카롭게 핏물을
그어 준 적도 있지 않았는가, 알고보면
우리는 神의 가위로 언제고 오려질 운명들인데

오후의 수다스러움이 질 무렵 여기저기
입 속에서 씹히다만 사람들이 토해진다.
으례 그들은 집으로 향하는
일곱 가지 무지개 전철에 몸을 싣고
따뜻한 차 한 잔의 물기도 적시지 못한
건조한 얼굴로 조금씩 그리고 눈치껏
옆으로 구겨진다.
점점 내게로 접혀 드는
어지간한 무게를 참아 주는데
묘하기도 하지, 어느새 나도 접혀지고 있었다.
취급되기 쉽도록 그렇게
접혀지고 있었다.
풀기가 걷혀지는 느낌이었으나

내 몸에도 나이테가 그어지려 해
꼬깃꼬깃 접혀진 헌 지폐들에게만 있는








할머니

▷ 이 승 수 ◁

지금은 죽고 없는 어느
중풍 걸린 노친네.

갈아 주는 이 없으면 사방에 똥칠하고
오전내내 먹은 것 모두 다 게워내던

지금은 땅에 묻힌 어느
중풍 걸린 노친네.

물린 상이 저만치 보이는데
자기를 굶기네, 자기를 죽이네,
엄마 뺨을 갈기던

지금은 젯상 받는 어느
중풍 걸린 노친네.

그런 당신은
철쭉이 만발한 마당 한 구석
나를 위한 그네 엮어
내 등을 밀어 주던

그런 당신은
흐르는 시냇물에 발 담그게 하고
두런두런 조약돌의 사연들을
얘기해 주던

그런 당신은
단풍이며 은행이며
제일루 빛깔 고운 나무 밑에
나를 앉혀 놓고
나무를 떨궈 주던

그런 당신은
따뜻한 온돌방 당신의 웃목에서
무릎 위에 나를 얹어
공중으로 들어 올려 주시던

그런 당신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나의 할머니.


목격

▷ 이 승 수 ◁

관우가 주살되던 밤이었다.
영웅은 육손의 함정에 안타까이 걸려드는데,

어디선가 선명히 들려오는
짧은 단말마의 외침과
순식간 수습되어 사라지는
한 무더기 날쌘 움직임.

나는 관우의 비명을 들은 것인가.

책을 덮고 창을 여니
도주하고 있는 것은
오나라 군사가 아니라
석 대의 오토바이.

날이 밝자,
이웃집엔 상여가 들어가고
집집엔 형사들이 들이닥쳐

쓰레기통엔 중국의 古典 한 권이
방안엔 겁많은 여중생 하나가
꼬박 사흘을 들어 앉아 있었다.




















잘 잠기는 문
― 어릴 적 내 별명은 "문짝에도 情 주는 아이"였다.

▷ 이 승 수 ◁

우리 집엔 잘 잠기는
문 하나가
엄마의 귀가가 더딘 날은
더욱 오래 잠겨 있던
문 하나가 있었다.

열쇠가 들어 앉은
깊숙한 곳엔 부모의 결혼 사진첩과
아우의 돌 반지, 그리구
엄마가 모아놨을 백 원짜리 동전들 그 중에
몇 개를 표나지 않을 만큼 집어서
사탕 중에 제일 비싼 무지개
사탕을 빨며 으시대던
그 날의 범죄행각.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눈 감아 주었던
나의 소중한 알리바이가

떼어진 후
더 이상 누리지 못함에
더 이상 저지르지 못함에

그리고 핥지 못함에
절망하던 어린 도둑.

그런 나를 어른들은
문짝에도 情 주는 아이라고 했다.













1997, 눈 덮인 도봉산

▷ 이 승 수 ◁

눈 먹는 토끼
얼음 먹는 토끼

斑白이 된 山의 시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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