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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최 윤 선


머리는 너무 단단하고
가슴은 너무 무르다
나는,
모래밭, 바위산을 걷는
발로 시를 쓰고싶다.
다시, 그대를 만나기 위해

◈ 한림대 국어국문학과 재학(97학번).









다시, 그대를 만나기 위해


그는 이제 내 곁에 없고 과거에 서 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발바닥만한 땅
비천한 시간 속에 산다.
내가 그에게
여기, 나 있는 지금으로 건너오라고
깃발처럼 두 손을 펄럭여도
그는 눈먼 앉은뱅이처럼
내게로 오지 못하고
시간의 화석만 그리운 듯 바라볼 뿐이다.

그와 나 사이에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출렁이는
시간의 바다

걸어서는 건너지 못하는 그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손에 쥔 것을 모두 버리고
신발과 옷을 벗고
가슴과 머리를 모두 비워
가벼워져야 한다.
뿌리를 빨아먹고 피둥피둥 살찐
추억의 열매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대,
우리가 씨뿌린 나무의
야윈 뿌리를 발라 들고
바다를 건너 현재의 땅으로,
메마른 권태의 시절로 와야 한다.
잠자리 날개짓으로 바다를 넘어
내게로 와야 한다.









밤, 안개 속

유령처럼 세상을 배회하는 안개
살갗을 뚫고 어느새 혈관을 흐른다.

저 뒤에 산이 있었나
저 앞에 집이 있었나

모든 게 희미해지고
그래서 모든 게 공평하다.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애틋해서 괴로운 것도
안개 속에선 무덤만큼 고요하다.

그러나 차마
영원히 잠들 수 있으랴.

아침을 따라 안개 걷히고
사라진 것들 우뚝 우뚝 되살아
거울처럼 선명히 눈앞을 닦아 놓으며

모 든 게 살 아 있 다.
잊는다는 것은 꿈이다.









가을산에 올라


너 기다리던 사람 오는가
가을산아.
오랜 세월 홀로 서서
모두 잊은 듯,
기다림조차 잊은 듯 침묵하고 있지만
너를 오르며,
비천한 추억을 잊으려
이 악물고 너를 오르며
나는 알았다.
노랗고 붉은 나무 잎사귀들
네 외로움인 것을.

네가 기다리던 사람을 위해 열어놓은 문으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 흙발로 들어와
허옇게 드러난 네 뼈를 밟고
네 가슴에 올라 제각각
부르고 싶은 이름 부를 때
너 울고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온통 붉어진 네 살갗 아래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눈물 속에 잠겨 있는
메마른 너의
겨울을 보았다.



누드쇼


어젯밤에도 세상은 잠들지 않았다.

숙면을 한듯 맨드름한 얼굴의 아나운서가 구린내 나는 NEWS!를 노래하듯 읊어대는 아침. 불면의 세상은 간밤에도 많은 범죄를 저질렀고, 상상력을 무기력하게 하는 신종범죄의 충격은 제 발끝만 보고 걷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순간 세상으로 이끈다.

이것은 교묘한 누드쇼, 절대로 홀딱 벗지 않는 누드쇼다. 똥 묻은 엉덩이를 가리기 위해 음부를 보여주고, 발기된 성기를 숨기기 위해 엉덩이를 들이대는, 앞뒤를 모두 볼 수 없는 속임수다. 욕하면서 침흘리고, 귀를 막고 눈뜨고 있는 사람들은 벌건 대낮에도 그를 만난다. 화려하고 위엄있는 주인으로 변장한 그를 향해 끝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혼을 팔아 돈을 사고, 밤이면 어지러운 꿈을 꾸며 망각의 잠을 잔다. 그리고는 간밤에 거행된 자극적인 누드쇼를 보며 아침을 먹는다.

흥분과 경멸이 뒤섞인 눈으로
T V 를 보 며
밥 을 먹 는 다.









비누


찬바람이 불면서 비누는 찬물에 잘 녹지 않는다.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자꾸 미끄덩거리는 비누의
무력한 반항을 보며,
닳아가는 것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온 스물 일곱 해
물에 씻겨 내려간 비누거품처럼 느껴져
헛헛한 밤

나는, 바위를 깨는
차돌멩이가 되는
꿈을 꾼다.

Press the photo
Press the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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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


도시 가로수의 매미처럼
따갑게 우는 밤비
내 귀를 깨우지만
오늘은 비 맞는
빨간 기와 지붕처럼
그저 아프기만 하다.

컵라면 하나 사러
나갔다 와서
비 맞은 머리는
바위처럼 무겁고
컵에 든 라면처럼 달그락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웅― 웅―

까무룩한 잠 속에서
벙어리 외침같은
아득한 메아리로
비가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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