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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이 승 수



모눈종이같은 밤을 지나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밟지 말아야 할 것과
밟아야 할 것들 사이에서
밤새
나는 곡예를 하고 있었다

◈ 한림대 국어국문학과 졸업(94학번).










고흐의 방



마룻바닥의 낡은 결을 따라
그대 나직한 숨소리가 들려올 때
나는 그대의 지난 밤에 사납게 엉켜 든다
닫혀진 녹색의 창문 곁에
풍경화가 한 점 미련으로 남아 걸리고
그대 대신 그대의 자화상이 여인 대신 여인의 초상
이 수줍게 걸렸어도 붉은 침대보는 펄럭임을
잊지 않았다 유독
푸른 벽만이 창백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지만
그에게 스며든 우울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적어도
그대의 세계에서
데생으로 그치고 말 生은 있을 수 없다
아무런 빛깔도 누려 보지 못한 채 바래어 가는
그것이 그대의 유일한 슬픔이며 두려움이기에
더는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더는 덧칠할 수 없을 때까지
한 번 붓을 쥔 자는 놓을 줄 모른다 악마처럼
비쩍 마른 다리를 버티며
맞이할 누군가가
그대에겐 없다 다만
작은 해바라기 화병을 위해 존재하는 그대
때마침 의자들이 삐걱인다 ‘그래’‘그래’
공감하는 듯 일제히 절그럭거리며
방안의 여럿은 윤곽선을 잃을 정도로
슬피 운다 나마저 덩달아
테두리를 잃었을 때
두 개의 의자들과 붉은 침대보를 지닌 침대
다섯 점의 그림들과 우울하게 푸른 벽까지
그대의 방은 이미 내 것이 된다



돼지감자


우리집 텃밭에
다른 푸성귄 자라지 못해

누가 심었을까
알 굵은 돼지감자

종아리 길이만큼 늘씬해진 게
회초리질 하듯 맵게
뽑아야만 뽑혀질 텐데

다섯 식구 죄다
자기는 아니래구

깊이도 박혀 있어
손은 쓰라려운데

혹시 삼년 전
이 세상에서 뽑혀져 나간
우리 노인넨가

소용 안되게
이런 건 왜 심었담

껍껍허니 목이 메어
먹기에도 나쁜 것을.










달걀과 다이아몬드

달걀은 본래
깨어지는 것을 용납치 않는다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 애물단지다
달걀은 더없이 聖스러운 이름이다
깨어지는 날엔 제 안의 피를 모두 쏟아내면서
어느날은 입에 거품까지 물고
최후를 맞기 때문이다 어쩌면
의젓한 걸음을 걸을 뻔했던 녀석은
어마어마한 불찰을 꾸짖는 듯
손톱 아래에 무시못할 상처를 입히고 나는
한동안 강요된 자성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녀석의 패악이 남겨준 ―
그는 그런 식으로 항변한다 하지만 실은
무언가 녀석 안에 담겨져 있었다는 것이
제법 묵직하게 찰랑거렸다는 것이
더 두렵다
그 안엔 이 세상에서
한 번 뒹굴어 보겠다는 신념이 담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녀석만한 다이아몬드를
기껏 손가락 위에 군림할 수 있을만큼
조각조각 낸다고 해도
그것은 오히려 본분을 지킬 수 있는 일로
통한다 누구나 탐내기에
한껏 헤픈 인격을 갖추며 이렇다할 것 없는
제 속을 훤히 다 읽히는 바보스러움이
그만의 미덕이다 변하지 않는 고지식함이
특별함을 잃는다
소중함을 잃는다 그런 위인이
新婦의 손가락에 흐뭇하게 끼어지고
그녀들은 함부로 후라이팬 위에
달걀을 깬다.









강과의 대화

윤기가 - 흐르는 강을 따라 걸었다 잔잔한
그의 미소가 푸근해 보여서일까 때때로
고민의 수만큼 알약을 먹다
낭패본 이들이 그에게 - 안기는 때도 있다
잔혹한 자애가 흐르는 그이지만 나 역시 그에게
고민거릴 얘기해 본다 강과
나 사이의 교신을 위해선 돌멩이들만
있으면 - 족하다, 만만찮을 내 고민을 짐작이라도 한듯
작은 돌멩이 세 알로 전화 걸던 얘길 해준다
처얼렁 큰 돌멩이 하나로 억장 무너졌던 얘기도 해준다
풍덩-하고 이번엔 내가 강에 안기고 싶었지만
그는 차디차게 거절해버린다

싫다아 - 나한테 돌 던진 사람은









마지막 날에 시인들은


폼페이의 마지막처럼 지구가 온통
화산재로 덮여 들어갈 때
그들은 가장 먼저 죽게 될 것이다
심상찮은 기운을 눈여겨보다가
화산이 시뻘건 불덩이를 토해낼 무렵
그들은 서서히 몸을 일으킬 것이다
누군가 가장 안전한 곳을 찾아
대륙을 횡단할 때
누군가 화산이 터지게 된 이유를
타민족에게 물으며
사람들을 선동할 때
누군가 우주선을 만들어
소수나마 달나라로 피신시킬 때에도
그들은 인류 최대의 재앙을 향하여
나아갈 것이다 달아난 이들이
짓밟아 놓은 풀들을 일으켜 세우고
등이 전복된 무당벌레를 어깨 위에 태우면서
모두가 뒷걸음질쳐 달아나는
반대 방향을 향하여 그들은
나아갈 것이다
드디어 그들이
성난 화산을 만났을 때
몸서리치며 뜨겁게 우는 용암을 만났을 때
서로를 치고 받는 돌덩이들을 만났을 대
어이없게도 화산은 불꽃놀이의 발포대가 되고
용암은 마시기 좋은 포도주로 변하며
돌덩이들은 축제를 벌인 이들의 배설물이 될 것이다
화산재마저 완벽히 남은 앙금을 털고
흩날리는 꽃가루로 향기를 더할 때
지구의 마지막 날은 늦춰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내막은
신비롭고 얇은 책 속에 숨기어져
펼쳐본 몇몇만이 그 비밀을 알아채게 될 것이다








풍경


- 달빛 -
오랜 시간을 두고
나는 너를 잊어
찰랑거릴 슬픔이 더는 없다고
믿어 왔는데

두려워라 이 밤
달빛은 제대로 엎질러져
너는 또다시 내 안에 담겨버렸네.


- 대나무숲 -
젖은 마음을 말리려고 대나무숲엘 갔다 가장 굵은 마디 아래에 누우면 그것은 머리를 쓰다듬는 손가락이 되고 그 손가락 끝에 입술을 대고 불면 대금 소리 대신 간지럽다 웃는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옅게 아주 옅게 들려오고 쐐액쐐액 부쳐주는 시원한 바람에 스르르 눈은 감기는데 내려다보는 그 모습이 그날은 너무 서럽게 닮아 있어 잠 대신 다른 것이 쏟아졌다.

- 酒酊 -
단단하게 뭉쳐진 힘에
덜미를 잡히우고 싶다 이 손아귀에 든
잔처럼 나뒹굴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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