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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이 영 애



시를 쓰며 꽤 버텨 온 것 같다.
몸도 마음도 불구인 내 육신을 기댈 수 있는 것은 오직 시의 지팡이 뿐이었다
나의 지팡이들 나무되어 잎사귀 무수히 자라 오르는 곳,
그곳은 바로 ‘시모리(詩山)’이다.

◈ 한림대 국어국문학과 재학(96학번)








새장 속의 새


1
밤거리를 지나 집으로 가다가
트럭에서 팔리는 새들을 보았다.

백열전구 아래 모자를 쓴 청년이 하품을 하며
새장 속의 새들을 팔고 있었다.

새장 속에는 날 수 없는 새들
알 수 없는 언어로 노래 부르고
억눌린 듯한 새들의 기묘한 노래에 맞춰
말라붙은 담쟁이 벽을 따라 기어 오를 때

내 마음 속 깊이
잠들었던 날개가
퍼드득,
깃을 쳤다.


2
나는 새를 훔치고, 새는 내게 잡혀서
우린 달렸다.
가로수도, 가로등도, 건물도, 거리도
우린 모두 달렸다.

우리는 모두 쫓기는 사람들
터질 것 같은 가슴에, 쓴 침을 삼켜
위안한다, 우린 서로 부둥켜 안고 울고만 싶다

새는 내 가슴에 있고, 心臟처럼 파닥이고,
내게서 도망치고 싶어한다.

내가 그 주인에게 쫓기듯이




거미의 집
- 집詩 7


공중에 매어 달린 거미의 집
인적 없는 풀섶에서나 고목의 가지 사이
낡은 지붕 아래에서나 지하실의 벽 사이에
잊고 있던 생활의 틈바구니로 거미줄이 쳐진다.

위태로운 거미의 집
가느다란 실가닥으로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며 벽을 만들고
하늘과 땅 사이 공중과 공중 사이
떠다니는 발자국의 집

거미는 머물기 위해 집을 짓지 않는다
자꾸만 이사를 하는 旅路의 집
지으면 허물어지고, 지으면 허물어지는 자취의 집

일상의 한귀퉁이로 거미줄이 쳐지고
방황하던 영혼이 삶의 그물에 걸릴 때마다
거미는 집을 헐어 새로운 길을 만든다










산책로


은행나무 가로수
한낮에 켜진 가로등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서 있고
나는 홀로 거리를 걸을 때,
우울한 생각이 여러 마리 새앙쥐처럼
아파트 철책을 가로지른다.

감방에 매달려 있는 철창처럼
단단한 철책 사이를 자유롭게 달리던 새앙쥐들은
높다란 아파트 건물까지 기어오르다, 떨어져 내린다

오래된 아파트 건물 벽에 너덜거리는
암회색 페인트 조각처럼 팔랑거리며
어리석은 새앙쥐들 무수히 떨어져 내릴 때,
아파트 벽은 또한 소리 소문도 없이 허물어진다

아파트 벽이 모두 허물어지는 어두운 저녁이 되면,
‘나는 나를 가두는 벽이 없어서 외롭고 슬퍼’, 라고 중얼거리는데,
새앙쥐는 말이 없어도 꼬리가 있어서 외롭지 않고
나는 오래 전에 꼬리를 잃어, 꼬리가 긴 언어에 기댄다.

허공 중에 긴 꼬리를 뻗은 언어의
언어를 말하는 나의 종족들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끊어진 생각을 이으려
공중 전화 부스 앞에 긴 줄을 서고,
그 위론 끝없는 전선들
이어지지 않는 언어의 사념들처럼 어두워 오는 허공을 헤맨다.

떠도는 별도 무리를 찾아
전선 위를 산책하는
저녁이다.










농부와 딸


나는 밭머리에서 책을 읽고,
아버지는 경운기로 과수원 사이 밭을 갈고 계시다
어린 나는 밭머리 끝에서 소리내어 책을 읽고,
아버지는 평형을 유지하며 딸딸딸딸 시끄러웁게 밭을 갈고 계시다

나는, 나는 더욱 크게 책을 읽는데
딸딸딸따알 아버지는 내게서 멀어지시다
아버지, 위태로이 밭가는 양을 참아가며 가만히 기다리다가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실 때, 나는 다시 큰소리로 책을 읽다

얼굴도, 목덜미도, 팔다리도, 모두 까만 아버지
눈썹도, 수염도, 머리카락도 모두 까만 아버지
먼 곳 바라보시다

“아버지, 아버지 여기에 무어 심어요?”해도
아버지 먼 곳을 바라보시다
“아버지, 아버지 여기에 무어 자라요?”해도
아버지 땅 속 먼 곳을 바라보시다

해마다 과수원 사이 밭에 심는 푸른 콩을 생각하시듯

나도 검붉게 갈엎은 밭에서 자라 오를 푸른 콩을 생각한다
아버지의 검붉은 팔 위에 솟아오른 푸른 콩 줄기 같은 핏줄을 바라본다

내가 잠시 멍청해진 사이
습한 바람이 불어 책장을 마구 넘기다
습한 생각이 불어 밭사잇길로 마구 뛰어들다










5월의 산


1
5월의 산은 너무도 깊어...

산 속은 온통 산. 산 속 나무도 산.
나무 속 새도 산. 새 속 울음도 산.
울음 속에 흐르는 한숨도 온통 산이다.

이 산, 너무 깊어서 그 속까지 알 수 없지만
그만큼
산은 높기도 하지

산 위도 온통 산뿐이다.
산 위 구름도 산.
구름 위 하늘도 산.
하늘 위 별도 산.

산은 온통 별을 찾아 오르는 계단.
그 계단 내 마음은 층층이 오르고 있네.


2
카페 모서리 창가에서

성냥갑을 비워 탑을 쌓는다.
성냥갑을 비워 탑을 쌓는다.
성냥갑을 비워 탑을 쌓는다.
성냥갑을 비워 탑을 쌓는다.
성냥갑을 비워 탑을 쌓는다.

·
·
·

성냥갑 속에는,
성냥갑이 들어 있고, 성냥갑이 들어 있고,
성냥갑이 들어 있고, 성냥갑이 들어 있고,
성냥갑이 들어 있어서...

맨 처음 놓여진 성냥갑의 시간 속에
내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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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거리



바람이 칼처럼 차다 차고 검은 빛이 번뜩여 나는 이미 깊은 잠이 들었을 너의 머리카락이 떠오른다 바람도 엉클어진 채로 깊은 잠이 들었다 한 가닥도 찾을 수 없는 먼 곳에 정지해 있다 정지한 채로 흐른다 물에 떠가는 죽은 물고기처럼 가지치기를 끝낸 가로수의 잎들도 조용하다

그만큼 세상은 깊은 밤이다 오토바이가 한 대 바람처럼 빈 도로를 가르며 달린다 살이 베어지는 날카로운 아픔이 지나간다 그만큼 위태로운 시간이다 우리 모두가 정지한 채로 흐르고 있는 시간 모두가 숨소리 없이 떠가는 잠을 자는 시간에

스·르·륵

플라터너스 큰 잎이 떨어져
껌버섯이 피어난 거리의 늙은 얼굴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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