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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이 영 애


나르시스를 사랑한 에코-
지독한 사랑 때문에 몸은 없어지고
목소리만이 남았다는 전설을 남기고 있는

너를 만나보려면
영원을 통과하며 울리는 너의 기다림을 흉내내야 한다.

이제, 내 사랑의 시작이다.

◈ 한림대 국어국문학과 재학(96학번)









낮에 떠 있는 별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람이 지나간다. 천천히 흐르는 구름은 추위를 타듯 입술이 파랗게 부어 있었다.

이렇게 몹시도 바람 부는 날이면, 나는 동네 어귀로 나가 살얼음 진 냇물을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냇물 속에는 작은 물고기들이 발 없는 유령처럼 스산하게, 가라앉은 낙엽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서 있던 작은 다리는 무너지는 城처럼 균열하고 있었다. 그 위태로운 다리 위로 시외버스가 다니기 때문에 언젠가 무슨 일이 나고야 말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수근대곤 하였다. 시내는 한차례 겨울을 거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말라가고, 사람들은 보다 큰 강을 찾아 도시로, 도시로 떠내려갔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늘 더욱 외로운 곳으로 헤매며 갔다. 내가 찾는 별이 늘 나의 시선 바깥을 배회하고 있는 것처럼










달걀 껍질 속에 들어 있던 생각


비워지길 기다렸던 기대들이여, 안-녕!

발자국 소리를 듣고 싶었던 둥근 바닥에게도,
따뜻하게 나를 키워왔던 끈끈한 주위에게도 안녕
이라고, 이제는 작별하려 한다.

눈물 모양으로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 껍질을 깨고
빛나는 깃털을 펼치리라 생각하셨지만
껍질 속에서 더욱 웅크린 채로 나는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씨앗이 되고 싶었네.

아침이면
냉장고 속으로 들어갈 나의 형제들이여,
아직 얼굴도 모르지만
너희들의 그 건강한 빛과 모양으로
나를 감추어 주렴, 영원한 어머니 속에
아니면, 아득한 바닥으로 떨어져 꽂히게 하렴.

꽃처럼 붉은 대지의 심장을 뽑아 올리며
푸른 싹으로 솟구치고 싶은 마음을










노을

썩어가는 사과 무더기 위에서 꿀을 빨아들이는
붉은 호랑나비떼를 보며
나는 숨이 가쁘다

떨어진 마른 잎과 썩은 사과 위에서
날개를 접었다 펴며 꿀을 빨아들이는
이 땅도 붉은 호랑나비떼
그 붉은 가루가 날려 나는 숨이 멎을 것만 같다.

산자락을 날리우는 저 먼 빛도
나비의 붉은 날개 세상을 접었다 펼 때,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쓸쓸히 날아오르고 싶어

빈 창공에선 노을이
파닥이며 날아올랐다 스러진다
Press the photo
Press the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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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여행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날 저녁 다시 돌아올 것이었으므로 나는 가방도 없이 기차를 탔다.

벽촌으로 향하는 완행 열차 속에 몸을 떨며 여행을 시작했을 때, 나는 요람 속에 흔들리는 아기처럼 가붓한 나른함이 들었다. 기차 안은 사람이 없어서 더욱 흔들리는 듯 했고, 차창도 같이 흔들리면서 거리 풍경을 돌리고 있었다. 그 속에는 고개를 깊숙이 숙인 노파가 검게 오그라든 몸을 힘겨워 하며 게처럼 다리 벌려 걷고 있었다. 걷는다기보다 조금씩 뒤뚱거리며 제 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기차와 함께 아프도록 내 머리를 흔들며 지나갔다. 내게는 졸음처럼 무거운 눈물이 흘러 귓속에 괴었다.

그 물 출렁이는 귀의 검은 터널을 기차는 통과하고 있었다. 푸른 띠를 두른 통일호 열차는 파도와 같이 세상을 덮치지만 격렬한 경주 끝에 다가오는 숨막힘처럼 멈추어진다. 검은 바다 저편에서 푸른 파도를 끌어당기듯 사람들도 어둔 기억 저편으로부터 끌어당기어져 선잠에서 깨어나고 몇몇은 내린다. 모두 막 태어난 아기처럼 기지개를 켠다.

나도 설레는 기분이 들어 주머니에서 차표를 꺼냈다.
구겨져서 마른 미역처럼 짠 냄새가 나는







달의 소묘

1
나, 흉내낼 수 없는 먼 곳에
보름달이 떴네

깊은 가슴에 파랗게 응어리가
졌네

공중을 선회하는 별들은
외로운 자의 발걸음 같네

산자락을 따라 맴도는
별들은 은근히
달 주변을 출렁거린다네

모두가
달을 하나 따먹고
여우가 되고 싶은 심정이라네

여기저기
집을 지키는 개들이 컹컹 짖으면
달은 조금씩 여위어 가네


2
밤의 푸른 수면 위에
초생달처럼 예리한 고양이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가로수의 붉은 잎들이
물고기처럼 노니는 양을 잠자코 지켜보다
갑자기,
흰 발을 쳐들었다

소리도 없이 나뭇잎 하나가 떨어진다

다시,
죽은 나뭇잎의 넋 같은
초생달이 고양이의 시선을 하고 있다










고구마밭

식구들이 모여 자는 어둔 방에서
들적지근하고 텁텁한 고구마의 냄새가 난다

이불 밖으로 비집어 나온 얼굴들이며 무릎들이
흙을 밀어내며 자라는 고구마의 껍질처럼
진한 색이다

줄기 속에 숨어서 흙을 밀어내고 있는
고구마의 안간힘처럼
크게 낮게 코고시는 아버지의 숨소리
어머니와 동생이 그 옆 엉켜 방 하나를 채우며 잠을 자고 있다

무더운 여름날
땅 위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귀기울이는 고구마처럼
가슴 속에 한 덩어리씩 입맛 다시는 꿈들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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