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구


1. 전근대시기의 인구, 2. 근현대시기의 인구, 3. 현재인구의 구성과 특성, 4. 현재인구의 분포와 특성

1) 강원도와 춘천부의 인구

전근대시기 강원도와 춘천부의 호구, 인구상황을 살펴 보려면 고려후기 이후부터 동요되었던 중세사회체제를 재정비한 조선전기 사회를 일차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조선전기 사회는 처음 고려말의 사회제도를 답습하다가 태종대에 이르러서 전면적인 개편이 이루어졌고, 성종대에는『經國大典』이 완성됨과 더불어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을 위한 체제가 강화되면서 완비되었다.

조선초기에 있어서 사회적 현실문제와 밀접하게 직결되었던 호구파악은 고려시대의 호구제도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으나, 태종·세종대를 거쳐 성종대에 이르러 개정 정비된 호구법은 매 3년마다 호구조사를 실시하여 역과 공부의 파악을 의한 호적대장을 작성 집계하여 개편하고 호조와 지방행정관청인 강원도와 춘천부에 비치 보존하였다.

호구 또는 인구는 인간의 집단이 각 지역에서 사회생활을 영위하여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주체자이므로 각 지역의 사회경제적 특성과 역사적인 제약성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집단으로서 인구의 변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인구 변동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증가(출생)과 자연감소(사망)이다. 자연증가와 감소는 출생과 사망에 의한 재생산에서 인구의 변동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의 재생산을 규정하는 조건은 연령구조와 이를 근간으로 한 노동력의 인구구조가 중시되는 것이며, 이러한 인구현상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경제적 여건에 따라서 각종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조선전기의 호구조사는 태종 4년(1404)에 처음으로 실시되었고, 그 이후 태종 6년(1406)과 『세종실록』지리지의 전국 호구조사 기록이 호구통계의 전부이다. 강원도 및 전국의 남녀인구를 최초로 기록한『세종실록』지리지의 호수와 인구통계는 일찍이 세종초기 연간에 자료를 수집하여 세종 14년(1432) 윤회, 신색등이 편찬한『신찬팔도지리지』에 의거한 것으로 세종 초년인 1420년대의 사회상을 살필 수 있는 통계자료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춘천도호부의 호구는 1,119호 1,950명에 속현인 기린현 108호 251명을 포함하면 전체 호수는 1,227호이고 인구는 2,201명이다.

대체적으로 세종실록지리지 편찬 당시보다 1938-40년 강원도지가 편찬될 당시에는 강원도의 호수가 11.2배가 증가되었으며, 『여지도서』가 편찬될 영조 때에는 6.4배가 증가된 것이다. 호구총수와 여지도서를 비교하면 3% 증가했는데 호구총수는 관동지와 비교하면 오히려 16%가 감소된다. 이 시기에는 흉년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유행하여 전국적으로 호구수가 감소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세도정치로 정치가 문란하여 국가기강이 흐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적으로 고종 때 관동읍지와 강원도지 편찬 당시를 비교하여 살핀결과, 69%가 증가하였다. 이것은 실제로 호구수가 증가되었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통계숫자의 산출방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시대의 강원도 호수와 인구수를 연대별로 살펴보면, 태종 4년(1404)에는 15,879호에 인구 29,238명이고, 인조 26년(1648)은 10,660호에 54,003명, 현종 10년(1669)은 45,315호 185,770명, 숙종 43년(1717)은 64,190호 277,881명, 영조 29년(1753)은 90,814호 390,640명, 정조 원년(1777)은 83,749호 340,814명, 순조 7년(1807)은 82,321호 336,122명, 헌종 3년(1837)은 79,789호 318,383명, 철종 3년(1852)은 79,961호 324,488명, 고종 원년 호수는 2.4% - 5.2% 이고, 인구수는 3.1% - 5.4%인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강원도의 호수와 인구수는 저눅에 대해 약 5% 정도였음을 알 수 있으며, 오늘날과 같이 8도중 호구수가 가장 적은 동시에 인구밀도(㎢)면에서는 2명에서 15.3명으로 낮아 가장 성근 지역으로서 산지가 많았던 강원도였음을 살펴볼 수 있다.

2) 춘천부 면리의 호와 인구

전근대시기의 춘천도호부의 호구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고, 정기적인 변천을 파악할 수 잇는 자료가 그렇게 많은 실정은 아니다. 따라서 조선시대 춘천도호부의 호수와 인구상황에 대한 것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몇 개의 관찬 및 사찬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참고하여 살펴볼 수밖에 없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춘천도호부의 호수는 1,227호이며, 인구수는 2,201명(속현인 기린현 108호, 251명 포함)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호구통계와는 상당히 다르다. 즉 당시는 대가족제 사회였으므로 지금의 호수 파악 개념과는 당연히 차이가 있고, 인구수에 있어서도 대개 남정을 중심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유역자층만을 조사하는데 목적을 두고 계산하였으며, 16세 미만의 아약층이거나 61세 이상의 노인층과 여자인 경우는 파악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을 감안하면 역과 공부의 부담자로서의 호구만을 파악한 것이다.

조선초기의 산견되는 호구통계는 인구의 실제수이기보다는 유역자의 총수엿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아무튼 인구의 '구(口)'란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고 '호(戶)'란 가호 또는 세대수를 의미한다. 태종대의 호는 2구 1호이며, 세종대에는 3구 1호의 배분으로 되어 있는 것을 살필 수 있다.

또한 당시 호구 통계는 현재와 같이 체계적으로 실시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호구의 증가는 그 지역의 제유역 내지는 세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적극적일 수 없었다. 따라서 인구수는 조선후기에도 대략 마찬가지지만 당시의 기록보다 훨씬 많았다고 보아야 한다.

한편 김정호( ∼1864)에 의하여 1864년(고종 1) 편찬된 것으로 보는 『대동지지』의 춘천부 호구수는 민호 6,200호, 인구 20,530으로 조사되어 1호당 3.3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원주목은 민호 7,420호, 인구 34,410명, 강릉대도호부는 민호 5,400호, 인구 33,500명이었다. 강원도의 81,230호와 332,173명에 비하면 호수는 0.76%이고, 인구수는 0.62% 정도이다. 춘천부는 26관읍중에 강원도 수부가 될 수 있는 기반이 이미 잡혀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초기부터 강릉, 원주, 춘천 3관읍이 현재와 같이 강원도 3대도시로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조선후기에 활발했던 지리지의 편찬으로 춘천도호부의 호구수를 대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춘천부의 호구수 비교 통계표를 정리하여 보면 다음 <표 31>과 같다.

<표 31> 조선시기 춘천부 호구수 비교 통계표

地理誌

春川誌

輿地圖書

(1759)

春川府邑誌

(1871)

人口

人口

人口

戶口數

2.2

8.8

2.6

5.3

7.8

7.0

5.5

8.2

7.8

53

73

11

54

60

77

78

49

60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근대시기의 춘천은 고려시대 이래 점차 춘천부에는 종 3품의 부사와 종6품의 교수 1명이 중앙으로부터 파견되었으므로 계속적인 사회교화의 영향으로 호구수는 증가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기에 춘천지역은 많은 피해를 입어 인구와 호수가 감소되어 전국 도별 백분율로 추산해 보면, 인구는 3.1% - 3.5% 정도이고 호수는 2.3% - 2.5% 정도였다. 당쟁이 격화되던 영조 31년(1755) 5월 역모사건을 수습한 것을 축하하는 춘당대시를 보는 중 과거 답안지에 임금을 비방하는 심정연의 글이 발견되어 새로운 역모사건으로 몰려 이때 가담한 강몽협등이 춘천태생이라 하여 현으로 읍호가 10년동안 강등되어 춘천부의 세력이 위축되었으나 호구수의 변동은 크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