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출·감시·통제의 사슬을 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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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05

‘공동행동’은 한국의 악명높은 에이즈예방법에 맞서 감염인 인권 보호의 신호탄을 쏠 것인가

▣ 김정숙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활동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어요….”

술잔이 한잔 두잔 돌면서 어느새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취기가 도는 듯했다. 그는 주정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투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의 손을 붙잡고, 역시 같은 말을 되풀이해야 했다. “당신 죄가 아니에요. 당신이 죄를 지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라고. 에이즈에 걸린 것이 그의 죄가 아님을 조목조목 설명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그의 생이 다하기 전엔 견고하게 박힌 ‘주홍글씨’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서글픔이 밀려온 탓이다. 감염인을 만날 때마다 되풀이되는 일상이다.

준비된 범죄자, 걸어다니는 시한폭탄?


1985년 한국에서 에이즈 감염인이 처음 발견된 직후, 정부는 부랴부랴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이하 에이즈예방법)을 제정했다. 에이즈예방법은 ‘감염인 색출법’이나 마찬가지다. ‘고위험 집단 정책’을 뼈대로 한 미국의 실패한 에이즈 통제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한국 정부는 에이즈예방법을 통해 감염인들을 걸어다니는 시한폭탄으로 매도하며 에이즈 공포를 조장해왔다.

에이즈예방법에 따라 감염인은 언제든 준비된 범죄자로 취급됐고, 끊임없는 색출과 감시·통제의 대상이 됐다. 그래야 ‘에이즈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게 정부의 신념인 듯했다. ‘에이즈에 걸리면 죽는다’고 겁을 주고, 감염인들에겐 ‘에이즈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걸어다니는 시한폭탄’이라는 사회적 낙인이 들씌워졌다. 감염인을 비난하고 멀리하는 게 ‘에이즈를 예방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신기루가 만들어졌다. 정부가 이 ‘예비 범죄자들’에게 붙인 꼬리표는 ‘신의 천벌을 받은 문란한 존재’이자, ‘국민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위험하고 더러운 존재’라는 것이었다.

에이즈 감염인은 직장에서, 병원에서,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버림받으며 사회적 죽임을 당하고 있다. 감염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병원에서 치료를 거부당하기 일쑤다. 직장 건강검진에 에이즈가 포함돼 있는 경우도 있어서, 그 결과가 사업주에게 전달되어 해고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감염인의 주민등록번호·성정체성·성행태 등에 관한 정보까지 질병관리본부에 차곡차곡 쌓이고, 이 정보들을 ‘질병관리’라는 미명 아래 함부로 사용한다. 에이즈에 감염된 외국인은 한국에 들어올 수 없고, 감염이 확인되면 강제출국을 당한다. 심지어 감염인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성행위를 했을 경우 처벌을 받게 돼 있다. 공무원이 여러분의 성행위를 감시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이런 감시와 차별을 합법화하는 것이 바로 에이즈예방법이다.

에이즈는 수혈이나 성행위를 통해서, 그리고 에이즈에 걸린 산모에서 태아에게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가 감염돼 면역력이 약해지는 질병이다. 의학의 발전으로 에이즈 치료제를 복용하면 고혈압이나 당뇨병처럼 관리할 수 있는 만성질병이 됐다.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발표된 한 연구 결과를 보면, 현재 미국 에이즈 감염인의 평균수명은 감염 뒤 24년에 이른다. 물이나 음식을 통해 감염되는 콜레라나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는 결핵과 달리 에이즈는 혈액이나 유즙을 통해 감염되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통해서는 감염의 위험이 전혀 없다. 의학적으로 보더라도 에이즈 감염 위험성은 성관계를 가지는 모든 이들, 수혈이나 헌혈 등 혈액을 다루는 모든 이들에게 마찬가지다.

정부의 주장대로 감시와 통제에 기반해 에이즈를 예방하려면 성생활을 하는 모든 국민에게 강제로 에이즈 검사를 시키자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연인을 만나고, 결혼을 하고, 혼인신고를 할 때 에이즈 검사 확인 제출을 의무화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걸까? 정부는 스스로 오류에 빠져들고 말았다. 감염인·동성애자·성노동자·이주노동자에게만 예방 책임을 강요하는 것으로는 에이즈를 예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자신이 에이즈에 걸린 줄도 모르고, 에이즈 검사를 받을 엄두도 못 내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감염인을 감시하고 외국인, 성노동자 등 몇몇 집단에만 에이즈 검사를 강요하고, 기껏 콘돔이나 던져주는 것이야말로 국민건강권을 내팽개치는 길이다. 에이즈 감염인이란 사실을 당당히 밝힌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지지와 보살핌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에이즈 예방의 지름길은 감염인의 인권을 증진시키는 것이란 얘기다.


법정 전염병 병력자 정보 제공에 분노


지난 2005년 보건복지부는 법정 전염병 환자의 채혈관리를 위해 법정 전염병 병력자 정보 제공을 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차별과 편견 속에서 자신을 철저히 숨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감염인들은 이런 움직임에 분노했다.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의 법정 전염병 정보 제공 계획을 전면 백지화할 것을 주장하고, 정부의 반인권적 정책을 비판하며 이 땅에서 처음으로 감염인 스스로 인권을 말하기 시작했다.

2006년엔 감염인 단체들과 보건의료인, 동성애자, 인권·시민단체들과 함께 감염인 당사자들의 의견이 배제된 채 일방적으로 진행된 정부의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개정안’에 반대해, ‘HIV/AIDS 감염인 인권증진을 위한 에이즈예방법 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을 발족했다. 같은 해 7월4일 공동행동은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감염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아닌 감염인의 인권을 보장하고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없애는 것이 진정한 에이즈 예방법”이라고 선언했다.

공동행동은 이어 ‘국민의 건강권’이란 이름으로 감염인을 여전히 통제와 감시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려는 정부의 개정안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또 민주노동당 현애자 의원실과 함께 감염인 인권 증진이 모두를 위한 에이즈 예방법이라는 내용을 뼈대로 한 ‘HIV/AIDS 감염인 인권 증진을 위한 에이즈예방법 전면 개정안’을 마련하는 노력을 시작했다. 개정안은 기존 예방법의 핵심인 전파 매개 금지조항과 강제 검진 같은 반인권적 독소 조항을 없애고, 익명 검사와 감염인 인권 보장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법안이 예정대로 4월 임시국회에서 해당 상임위인 보건복지위원회에 상정될 경우, 정부안과 공동행동의 개정안을 두고 전면적인 논쟁이 벌어지기를 기대한다.


에이즈 인권운동은 왜 FTA에 반대하나


에이즈 예방과 치료는 비단 의료 측면의 문제만이 아니다. 하루에 8천 명씩 에이즈 환자가 죽는 것도 적절한 예방·치료법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전 세계 에이즈 감염인의 60% 이상이 살고 있는 아프리카에서, 하루 1달러도 못 버는 이들이 에이즈 치료제 약값을 감당하기란 불가능하다. 값비싼 에이즈 치료제를 만드는 초국적 거대 제약회사와 그 회사의 본사가 있는 ‘선진국’들은, 가난한 나라 정부가 값싼 복제약을 생산하거나 수입하는 경우 무역 제재를 가하기도 한다.

최근 초국적 제약회사들은 의약품에 대한 특허권 강화와 의약품 가격 억제정책을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추진하고 있다. 이런 탓에 한-미 FTA 협상이 체결되면 큰 피해를 입게 될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에이즈 감염인들이 꼽힌다. 갓 걸음마를 시작한 에이즈 운동 진영이 한-미 FTA 체결 반대 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차별과 배제, 감시와 통제의 질곡을 뚫고 조금씩 연대의 바다로 나아가는 에이즈 감염인 인권 운동은 우리 사회의 인권과 민주주의 발전 정도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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