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올해 34살의 직장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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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병적을 담당하는 형으로부터 수기를 써보라는 권유를 몇 번 받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계속 사양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은 과거 나의 삶과 지난 4년간의 생활을 되돌아보며 앞으로의 삶을 추스르기 위한 기회로 삼기 위해서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막내 형으로부터 나는 아버지가 따로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집안 분위기가 여느 집과는 약간 다른 편이어서 왠지 모를 서먹서먹함이 있었는데 바로 내 형들과 누나들과는 아버지가 다른 형제였다니….
그리고 나의 생부가 얼마 전 돌아가셨다니….

형들과 거리가 소원했었는데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더욱 이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누나들은 출가를 했거나 가출을 한 상태였기에 이 세상에서 나 혼자라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박히게 되었다. 어머니는 생계 때문에 날마다 행상을 나갔다. 누나, 형들은 사회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계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삶이 고단해 가끔 술을 마신 후 많이 울었고 때로는 형들과 크게 싸웠다. 난장판이 된 집을 뒤로 한 채 등교 하는 나의 발걸음은 늘 힘이 없었고 반 아이들과도 어울리지 못했으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머니의 장사 밑천을 톡톡 털어 사라지곤 했던 작은형, 빚을 낸 돈까지 거덜 내는 큰 형의 얼굴이 행주치마 속에 동전뿐인 채 머리에 플라스틱 양동이를 이고 가는 어머니의 여윈 뒷모습에 겹쳐질 때면 형들에 대한 증오심이 일어 이를 갈았다. 어떻게든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야간 대학이라도 가야겠다고…. 졸업 후 많은 돈을 벌어 생활고에 지친 어머님의 위안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대로 대학진학은 되었지만 집안형편은 끝없는 나락이었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아르바이트를 겹치기로 하여 어렵게 대학을 졸업했고 직장을 얻어 그 동안 눈 덩이로 변한 집안 빚을 어머니와 갚기에 바빴다.

인생이란 이런 것인가? 회의가 들었다. 정신없이 벌어 쥐꼬리만큼 돈을 모으면 남들 하는 대로 괜찮은 여자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리고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웬지 가슴에는 구멍이 뚫렸고 그 구멍은 날이 갈수록 커져 가기만 했다. 그럴 바에는 결혼하지 말자 혼자 살다가 조용히 가자. 그 후 술을 마셨고 취하면 그 뚫린 구멍으로 외로움이, 이 세상을 나 혼자 서성이고 있다는 외로움이 밀려 왔다.

속 좁은 여자들은 나의 이 마음을 몰라 줄 것 같았다. 내가 이야기를 하면 끝까지 들어주고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격려의 말 한마디를 해 줄 수 있는 형이, 아버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런 나의 마음을 말해 주듯 추적추적 이슬비가 내리던 95년 어느 수요일 종로에 나갔다. 파고다 공원 뒤쪽의 어느 극장(이곳은 추적60분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이야기 상대자를 찾으러 특정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임을 알게 됨) 앞에서 우두커니 서있을 때 어떤 군인이 다가와 말을 걸어 와서 이곳 생활(동성애)에 들어서게 되었다. (호기심과 외로움이 평범하게 사는 나 자신을 포기하게 했고 결국은 지금의 상황으로 몰고 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 후로 몇 사람들과 관계를 갖게 되었다. 짧게는 1주, 길게는 1년. 그 속에서 외로움을 잊는 듯 했고 위로도 받은 듯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기도 했고, 주기도 했다. 이렇게 받은 상처 때문에 술집(게이바)에 드나들어야 했고, 영업이 끝날 때까지 취한 눈을 치켜뜨고 휘청이며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내 삶을 말해 주듯이 말이다.

IMF가 우리사회 전반을 휩쓸고 지나갈 때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절반이 퇴직을 해야 했고 그 속에서 나는 50만원의 감봉에 업무는 배로 늘어났다.살아남기 위해서 일요일에도 일을 해야 했고 집에서도 업무를 계속해야 했다.남은 자들의 슬픔도 아주 크나 큰 것이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된 것을 잊고자 거의 매일 집에서 술을 마셨다. 나 말고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술 권하는 사회’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생각된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기 몇 달 전 나는 배가 너무 아파 응급차로 병원에 실려 갔다. 마음속으로는 계속 술을 마셨기에 위에 구멍이 나지 않았으면 급성맹장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온은 40°에 육박했고 열을 내리기 위해 오한에 떨면서도 온몸으로 아이스 팩을 녹여야 했다. 이런 저런 검사를 끝내고 나흘이 지나서 퇴원한 다음날 보건소에서 집으로 전화 한통이 걸려 왔다. ‘HIV감염인’ 라고….

백지장이 되어 버린 머릿속, 그 후 며칠간은 어떻게 지냈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담당의사 선생님이 알려 준 주의사항을 기억하지 못해 15일 만에 다시 응급실로 실려 가야 했다. 소변으로 핏덩이가 계속 나오고 허리가 너무 아팠다. 다시 한번 주의사항을 확인 받고 퇴원했다.

첫 번째 혈액검사에서 혈소판 부족, 면역지수‘9’로 나왔다. 그래서인지 피도 잘 멈추지 않았고 심장은 1분당 180이상 뛰었다. 너무 피곤해서 움직일 수조차도 없었다.

약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 심해 쳐다보기만 해도 구토가 일었고, 먹은 것을 토해내는 일이 다반사였다. 거기에다 밥 먹는 일까지 고역이었고 악순환의 반복으로 몸이 굉장히 축났다. 때때로 날계란 두 개로 버티어야 했다. 이후에도 몇 번 더 응급실에 실려 가야 하는 등 건강이 악화되어 일을 그만 두게 되었다. 생활 기반마저 잃게 되니 절망감은 더욱 깊어졌다. 약 먹고 잠자는 것이 일과가 되었고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가도 약을 먹을 때 부르르 떨리는 몸을 보며 좌절은 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정리하기로 했다. 내 주변의 인간관계, 친구들, 그리고 내가 가버린 후 나의 체취를 느끼며 슬퍼할 어머니를 위해 사진, 책, 사소한 물건까지 치워버렸다. 먼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들을 마지막으로 봐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억이 되어버린 강화도 길의 전등사 전경, 앞바다, 가을날 단풍이 든 국립묘지의 학모양이라는 산, 만지면 손에 묻어날 것 같은 푸른 하늘, 하얀 구름, 한강대교를 건너며 맞았던 차가운 바람, 나의 슬픔과는 상관이 없이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았지만 더 고통스러운 상황이 되기 전에 끝내야지 하며 여러 가지 방법들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칼을 손목에 대는 순간, 한강에서 뛰어 내리려는 순간 눈앞은 뿌옇게 흐려지고 자살을 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이 생각났다. 죽어서 좋은 곳에 가서 고통스럽지 않고 평안히 지내고 싶다는 미련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모질지 못했다. 아프면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고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인정받지 못하는 아픔을 가지고 있는 나 자신을 받아 줄 수 있는 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절대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그분은 내 모습 그대로 받아 주었고 많은 위로와 마음의 평화를 주었다.

죽기로 작정한 순간, 내가 그 분께로 다시 돌아간 순간 내 자신은 죽은 것이고 지금부터는 ‘덤’으로 사는 삶을 살기로 했다.내가 이 세상에 ‘어떻게’ 태어났고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 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가 않다. 다만 하루하루 감사함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렇게 힘든 기간 동안 방역계 임계장님이 식사하는 것, 약복용하는 법, 그리고 많은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해주었고, 병원까지 뛰어 오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동안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이 지면을 통해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루게릭’이라는 병에 걸려 약도 없이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도 있고, 원인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앞을 못 보는 사람들도 있고, 걷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 외에도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병에 걸린 사람들도 있다. 나를 포함한 모든 병든 자, 가난한 자,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점차 바뀌고 있으나 더 많이 바뀌어야 한다. 관계당국에서 일반인들에게 HIV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올바로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감사드린다.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HIV환자들에게 도움을 주심에 감사드린다.

특히, 친 혈육처럼 집에 초대해서 식사도 같이 하고, 죽겠다고 협박(?) 하던 것까지 다 받아주며 내가 가장 힘들었던 6개월 동안 활동공간을 마련해 준 방동현형에게 감사드린다. 나는 지금 다시 일을 하고 있다.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맞이할 수 있는 것에 감사드린다. 일 할 수 있는 것에 감사드린다.

앞으로, 나 자신 여러분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듯 다른 이웃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나누려는 몸짓을 해보려 한다.

/ 손순규(가명)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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