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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3월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버님을 뵌 지도 오래되어 부모님 댁에 들렀다가 아버님의 왼발이 좀 부어있는 것을 보았다.

평소에도 건강이 시원치 않으신 터라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그리고 4월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아버지의 왼발은 좋아지지 않고 조금 절기까지 하셨다. 나는 그제서야 안되겠다 싶어 아버님을 모시고 병원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여러 병원을 다녔지만 아버님의 왼발은 호전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유명한 피부과가 강남에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찾아갔는데 원장 선생님께서 카포지육종 같으니 원자력병원에 가보라고 소견서를 써 주셨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피부암 종류라고 하셨다. 나는 암이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하였지만 일단 원자력병원으로 아버님을 모시고 갔다. 원자력병원에서도 이런저런 검사를 많이 했다. 그런데 아버님의 병명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한 채 다시 이대부속병원으로 가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암이 아닌가 보다”라고 하고 한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또 한편으론 너무 화가 났다. 도대체 아버님의 병명을 왜들 빨리 못 찾는지….

병명을 빨리 찾아야 초기에 치료해서 더 악화되는 걸 막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아버님께서는 몇 달 새 많이 늙으셨고 갈수록 초조해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님뿐 아니라 어머니, 나, 집사람…. 우리가족 모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병명도 모른 채 왼발을 앓고 계신 아버님이 안쓰럽고 자식 된 도리로서 죄스러웠다. 어느 자식인들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아버님은 이대부속병원에 일주일을 입원하셨다. 이곳에서도 역시 검사를 많이 받았는데 어느 날 의사선생님께서 검사결과가 나왔다고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긴장되었다. 왠지 안 좋은 결과일 것 같았다. 의사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병명은 HIV! 나는 충격보다 어이가 없어 다시 물어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똑같았다. 믿기지 않아 멍해 있는데 의사선생님께서 서울대병원으로 가라고 하셨다. 왜 그리가냐고 물었더니 정부에서 지정한 병원이라 하셨다. 나는 여전히 설마 하는 의심을 안은 채 아버님을 모시고 또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서울대병원으로 옮겼다. 서울대병원에서의 검사결과는 이대부속병원의 결과와 같았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청천벽력 같은 선고에 눈앞이 깜깜하게 내려앉았다. 이일을 어쩌나! 그러나 충격도 잠시 더 큰 걱정이 밀려왔다. 어떻게 아버님에게 말씀드려야 할지….

며칠을 고심 끝에 아버님께 말씀드렸다. 아마도 아버님의 충격은 나보다 더했으리라 싶지만 식구들이 입을 상처를 염려해서인지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셨다. 아버님은 그런 분이셨다. 가정에 충실하고 자식들을 너그럽게 안아주는 사랑이 많은 분이셨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아버님에게 이토록 엄청난 병이 찾아온 것일까. 집안 식구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어머님의 질책 섞인 원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만 갔다. 며칠을 고심 끝에 아버님께 말씀드렸다. 아마도 아버님의 충격은 나보다 더했으리라 싶지만 식구들이 입을 상처를 염려해서인지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셨다. 아버님은 그런 분이셨다. 가정에 충실하고 자식들을 너그럽게 안아주는 사랑이 많은 분이셨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아버님에게 이토록 엄청난 병이 찾아온 것일까. 집안 식구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어머님의 질책 섞인 원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만 갔다.

어쨌든 나는 의사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1999년 6월 29일에 아버님을 입원시켰다. 입원하고 나서의 하루하루는 힘든 과정이었다. 아버님의 몸은 서서히 증세가 더해갔다. 왼발은 신발을 못 신을 정도로 부었고 왼손도 많이 부어갔다. 왜 하필 우리집안에 이런 불행이 닥쳤는지 한숨만 나왔다. HIV는 지구상에서는 고칠 수 없다는 병인데 그럼 서서히 죽어가는 아버님의 모습을 그저 속수무책 지켜보기만 해야 한단 말인지. 자식 된 도리로 견딜 수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의사선생님과 상담을 하였다. 그리고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암은 손을 쓸 수 없지만 HIV는 치료를 잘 받으면 아무상관 없다면서 치료법을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의사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치료법은 HIV 바이러스를 칵테일 요법으로 치료하여 면역성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었다. 보통 정상인의 면역세포 수치는 700이 넘는데 아버님은 200이 약간 넘는 수치였기에 200이하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치료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 때 아버님은 2인용 병실에 입원하고 계셨는데 며칠 후 같은 병실에 계신분이 돌아가셨다. 그분의 병이 아버님과 같은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바로 옆에서 죽음을 본다는 것이 너무도 두려웠다. 나는 그만 겨우 갖기 시작한 희망을 잃고 말았다. 그동안의 노력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아버님도 결국은 저렇게 돌아가시는 것이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내가 이럴 정도인데 아버님의 충격은 얼마나 컸을까. 분위기도 바꾸고 더 이상의 충격도 막기 위해서 아버님을 1인용 병실로 옮기기로 했다. 병실을 옮기고 나니 아버님도 기분이 좋아지신 것 같았다. 그 당시 나는 가장으로서 형편이 어려웠지만 아프신 아버님을 버려둘 수가 없었기에 종일 아버님 옆에서 간호했는데, 덕분에 하루하루 아버님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아버님께서도 내가 옆에 있는 것이 큰 위로가 되셨는지 방사선치료를 받으면서 조금씩 좋아지셨다. 입원할 당시 온통 퉁퉁 부어 신발도 못 신을 정도인 왼발과 젊은 사람 2배가 넘을 정도였던 왼손의 부기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리고 활기를 찾아가셨다.

아버님이 병원에 입원하고 계신 동안 친척과 친구 분이 여럿 다녀가셨다. 오시는 분마다 대체 무슨 병이냐고 물어보았지만 나도 아버님도 병명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저 피부암이라고 넘겨 버렸다. 만약 아버님의 병명이 HIV라고 사실대로 말했다면 그분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나 또한 아직도 HIV라는 병에 대하여 정확히 모르고 있는 형편에 그저 매스컴에서나 들어 알고 있을 그분들은 어떤 경계를 보냈을까. 아버님 곁에 다가가기나 했을까. 더구나 내가 의사선생님에게서 들은 바로 HIV는 성관계를 통해서 감염된다고 했는데 어쩌면 아버님을 상종 못할 사람으로 몰아붙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HIV는 병으로 받는 신체의 고통보다 누구에게도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고통일지도 모르겠다.

병원에 입원한지 11일째 되던 1999년 7월 10일 의사선생님께서 퇴원해도 된다고 하셨다. 병세가 많이 좋아지셨던 것이다. 대신 한 달에 한번 정도 내과에 와서 치료를 받으라고 하셨다. 나는 의사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퇴원 후 아버님을 모시고 방사선치료를 계속 다닌 끝에 1차 방사선 치료가 끝났다. 방사선 치료가 끝난 며칠 후부터 아버님의 부기는 눈에 띄게 가라앉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정상으로 돌아왔다. 큰 고비를 넘긴 것이다. 하지만 기쁨 뒤로 커다란 걱정이 이어왔다.

약값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약을 복용하셔야 되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동안 아버님의 치료비로 무리하기도 했거니와 아버님 병간호 하느라 가장인 내가 변변히 돈을 벌지 못했기 때문에 약값은 내게 큰 부담이었다. 이런 나의 고민을 아시고 의사선생님께서 보건소에 진료비 영수증을 제출하면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일러 주셨다. “아! 그런 방편도 있구나.” 하고 반가웠지만 막상 보건소에 가려니 망설여졌다. 왜냐하면 아버님의 병명은 모두가 꺼리는 HIV! 처음 대하는 보건소 직원들의 시선이 따가울 것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용기를 내었다. “아버지를 위한 일인데 그깟 시선쯤 무슨 상관이랴! 그래 한번 가보는 것이다.”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보건소로 향했다.

보건소에 들어서서 잔뜩 주눅이 둔 표정으로 조심스레 찾아온 용건을 말했는데 보건소 직원들이 의외로 따듯하게 안내해 주는 것이었다. 더구나 HIV에 대하여 하나하나 자세히 꼼꼼하게 일러 주면서 병원에 잘 다니고 약만 잘 드시면 살아가는데 지장은 없으며 내가 크게 걱정하고 있던 약값은 국가에서 해결해 준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고마웠다. 내가 남자가 아니었다면 손을 잡고 눈물이라도 흘렸을지 모르겠다.

약값은 이렇게 해결되어 아버님은 계속 병원에서 약을 타 드시게 되었다. 그런데 약을 드실 때마다 구역질하고 약을 넘기기 일쑤였다. 걱정이 되어 아버님이 드시는 약에 대하여 의사선생님에게 물어보니 칵테일 요법의 치료제라고 하셨다. 약은 계속 드셔야 하는데 약을 드실 때마다 겪는 아버님의 고통이 너무 커서 나는 의사선생님에게 상담을 요청하였고 의사선생님은 몇 가지 다른 약을 지어 주셨다. 그 약은 아버님에게 맞았는지 더 이상 구역질을 하지 않으셨다. 아버님의 구역질도 멎고 병세도 안정이 되어 나는 조금씩 마음의 여유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달이 지났을 무렵 보건소에서 연락이 왔다. 어머님도 한번 검사를 받아보라는 것이었다. 두렵고 걱정스런 마음이 앞섰지만 어머님을 설득하여 보건소직원과 함께 국립보건원에 검사를 받으러 갔다. 그리곤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결과를 기다렸다. 검사결과가 나오기까지 집안 분위기는 침울했다. 아주 간단한 말들만 주고받을 뿐 누구도 더 이상의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말을 꺼내면 분명 어머님의 검사결과가 화제에 오를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얼마 후 보건소로부터 검사결과 통보가 왔다. 아! 나는, 아니 우리가족은 또 한번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고야 말았다.

그 때 아버님은 2인용 병실에 입원하고 계셨는데 며칠 후 같은 병실에 계신분이 돌아가셨다. 그분의 병이 아버님과 같은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바로 옆에서 죽음을 본다는 것이 너무도 두려웠다. 나는 그만 겨우 갖기 시작한 희망을 잃고 말았다. 그동안의 노력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아버님도 결국은 저렇게 돌아가시는 것이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내가 이럴 정도인데 아버님의 충격은 얼마나 컸을까. 분위기도 바꾸고 더 이상의 충격도 막기 위해서 아버님을 1인용 병실로 옮기기로 했다. 병실을 옮기고 나니 아버님도 기분이 좋아지신 것 같았다. 그 당시 나는 가장으로서 형편이 어려웠지만 아프신 아버님을 버려둘 수가 없었기에 종일 아버님 옆에서 간호했는데, 덕분에 하루하루 아버님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아버님께서도 내가 옆에 있는 것이 큰 위로가 되셨는지 방사선치료를 받으면서 조금씩 좋아지셨다. 입원할 당시 온통 퉁퉁 부어 신발도 못 신을 정도인 왼발과 젊은 사람 2배가 넘을 정도였던 왼손의 부기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리고 활기를 찾아가셨다.

아버님이 병원에 입원하고 계신 동안 친척과 친구 분이 여럿 다녀가셨다. 오시는 분마다 대체 무슨 병이냐고 물어보았지만 나도 아버님도 병명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저 피부암이라고 넘겨 버렸다. 만약 아버님의 병명이 HIV라고 사실대로 말했다면 그분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나 또한 아직도 HIV라는 병에 대하여 정확히 모르고 있는 형편에 그저 매스컴에서나 들어 알고 있을 그분들은 어떤 경계를 보냈을까. 아버님 곁에 다가가기나 했을까. 더구나 내가 의사선생님에게서 들은 바로 HIV는 성관계를 통해서 감염된다고 했는데 어쩌면 아버님을 상종 못할 사람으로 몰아붙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HIV는 병으로 받는 신체의 고통보다 누구에게도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고통일지도 모르겠다.

병원에 입원한지 11일째 되던 1999년 7월 10일 의사선생님께서 퇴원해도 된다고 하셨다. 병세가 많이 좋아지셨던 것이다. 대신 한 달에 한번 정도 내과에 와서 치료를 받으라고 하셨다. 나는 의사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퇴원 후 아버님을 모시고 방사선치료를 계속 다닌 끝에 1차 방사선 치료가 끝났다. 방사선 치료가 끝난 며칠 후부터 아버님의 부기는 눈에 띄게 가라앉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정상으로 돌아왔다. 큰 고비를 넘긴 것이다. 하지만 기쁨 뒤로 커다란 걱정이 이어왔다.

세상에 이럴수가! 이제 경우 아버님의 증세가 안정되어 한시름 놓고 있는데 어머님마저 HIV라니 도저히 충격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HIV가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왜 우리가족에게 이처럼 모진 시련이 찾아왔는지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어머님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버님에 대한 원망은 극도에 달했고 아예 사는 것을 포기하신 것 같았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깜깜했다. 하지만 아버님도 힘겹고 어려웠던 과정을 무사히 헤쳐 나오시지 않았는가.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하나하나 풀어가기로 하였다. 우선 어머님을 진정시켜 지정된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그리고 면역성 검사를 하였는데 다행히 500이 넘었다. 아버님에 비하면 아주 좋은 상태였던 것이다. 하지만 어머님은 여전히 마음을 풀지 않으셨다. 약을 드시지 않는 것이다. 집안의 불화는 갈수록 깊어갔고 하루도 말다툼이 잠잠할 날이 없었다. 나는 어머님을 설득하고 또 설득하였다. 어머님은 아직 이렇다할 증세가 나타나지도 않고 면역성도 높으니 약만 잘 드시면 아무 지장이 없다고! 만약 약을 안드시면 면역성이 떨어져 큰일이 나니 제발 약을 드시라고! 어머님은 붙들고 늘어지는 내가 안되었는지 결국 약을 드시기로 하셨다.

또 한번의 큰 고비를 넘긴 것이다. 하지만 고비는 계속 되었다. 집안 불화가 잦아들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님은 아버님을 용서할 수가 없으신 것 같았다.

그 이후…. 3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두 분은 사이가 좋으시다. 서로 약도 챙겨주며 서로의 몸을 보살펴 주면서 다정한 모습으로 살고 계신다. 두 분이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HIV에 감염된 원인을 아버님이 가족들에게 고백하였고 어머님은 그 고백을 들은 후 아버님을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 동안 차마 물어보지 못했지만 아버님이 HIV에 감염된 이유가 정말 궁금했다. 아버님은 아주 착실한 가장이셨기 때문이다. 한눈을 팔아 어머님 속을 썩인 적도 없었고 우리들에게 큰소리도 잘 내지 않는 분이셨다. 그런 아버님이 왜 HIV에 감염되었을까.

아버님의 고백은 이러했다.

16년 전 동대문에 볼일이 있어 간 적이 있는데 볼일을 마친 후 우리 동네(그 당시 우리집은 석관동이었다)에 늘 가던 이발소에 들러 이발을 하실 작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이 늦어져 동네 이발소에 가자니 이발소문을 닫을 시간이 될 것 같고 해서 일을 보시던 동대문에서 이발을 하기로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한 이발소에 들어갔는데 이발을 마치고 면도가 거의 끝날 무렵 면도를 하던 여자가 뒤로 젖혀진 의자 위에 눕혀있는 아버님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소곤거렸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님은 어렸을 적, 심한 귀앓이를 한 탓에 가끔 남의 말소리를 잘못 알아들으실 때가 많다. 아버님은 무슨 말인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하였다. 그리하여 얼떨결에 그 여자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그런 일은 그때 딱 한번이라고 하셨다. 아버님의 고백은 사실일 것이다. 나는 아버님을 잘 안다. 자랄 때도 그랬거니와 결혼해서도 아버님 곁에서 살았기 때문에 아버님이 함부로 행동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딱 한번의 실수! 그 한번의 실수가 이토록 엄청난 결과를 불러올 줄이야! 본인의 고통은 고사하고라도 어머님까지 똑같은 고통을 겪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남은 가족들이 커다란 불안과 불화에 빠져들 거라는 것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아버님의 딱 한번의 실수는 이처럼 우리가족을 자칫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뻔 했다. 하지만 우리가족은 극복해냈다. 서로 용서하고 안아주는 사랑의 힘으로 우리가족은 그 어두운 터널을 무사히 빠져 나왔다. 만약 어머님이 끝까지 아버님을 용서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내가 힘에 겨운 나머지 두 분을 포기하였다면 우리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힘든 고비를 잘 넘겨주신 아버님 어머님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과 따뜻하게 대하며 함께 애써주신 보건소 직원들, 형편이 어려워 자칫 치료도 받지 못할 HIV 환자를 지원하여 주는 국가에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아버님의 병이 발병한지 3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족은 경제적 어려움을 제외하고는 아무 지장 없이 평화롭게 살고 있다. 다만 한 가지 마음 아픈 일은 아이들 엄마가 떠난 것이다. 그래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시부모님이 모두가 두려워하는 HIV 환자이고 그 때문에 가장인 나는 오직 두 분 치료에만 매달려 있으니 생활비도 궁핍하고 혼자서 집안을 꾸려가기가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야속한 마음에 원망도 했지만 이제는 집사람을 이해한다. 고생만 시켰는데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아이들도 이 다음에 어른이 되면 엄마를 이해하겠지….


/ 김원식(가명)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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