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뇌][아름다운 곳][에이즈)]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

Citation from: LaBelle


한살 한살 나이가 들고, 머리가 차고, 생각이 많아지면서 여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도 함께 차오른다. 스물여덟이라는 인생을 살면서 과연 내가 언제나 평등한 인간관계 속에서 살았던가. 결혼한 선배와 결혼을 앞둔 친구들, 직장생활 속에서 부대끼며 사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아직도 세상은 여자가 살기에 참 팍팍하다는 생각을 하며….

한때 간 큰 남자 시리즈가 유행을 하고, 주부(主婦)생활을 즐기는 남편을 뜻하는 하우스허즈밴드(Househusband)도 점차 늘고 있으며, 가정의 행복을 위해 아내에게 얻어맞을 수도 있다는 ‘맞고 사는 남편들의 모임(맞사모)’까지 결성된 요즘, 어찌 보면 여자가 살기 편한 세상이 된 것도 같다.

그러나 이 말을 천천히 곱씹어보면 예전에 비해 살기 편하다는 뜻이지 결코 여성의 지위가 나아졌다거나 하는 뜻은 담겨 있지 않다. 이제는 은장도를 품고 정절을 지키거나 남편 뒷바라지에 눈물을 감추는 모습 따위는 곰팡내나는 유물일 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지만, 현실은 아직도 여자가 살기에는 힘들기만 하다.

특히 80~90년대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은 20대 후반~30대들은 과도기적 사회현실에 더욱 답답하기만 하다. 머리는 앞서가는데, 사회현실은 아직도 60~70년대를 답습하고 있는 꼴이니 말이다.




나는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여성우월주의자도 아니며, 남성비하론자는 더욱 아니다. 하지만 이런 내가 문득문득 발끈해질 때가 있다. 여성에 대한 사회편견과 차별의 벽에 부딪히며 생기는 작용과 반작용 때문이다. 이 여성차별과 편견이란 건 좀처럼 내성이란 게 생기질 않고, 작용이 크면 클수록 반작용도 커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가해자가 꼭 남성이란 법도 없다.

누가 이런 나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피해의식 때문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나는 여기에 대해 할말이 많다. 우리 나라에 태어난 여자치고, 한 번쯤 여자로 살아가는 데 힘듦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그래서 나는 차별과 편견, 학대로 얼룩진 여자의 일생을 짚어보려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피해의식인지, 아니면 집단 따돌림에 의한 왕따인지는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 밝혀질 터.

한국 여자는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차별을 받는다. 성별 감별이 위법이 되는 세상이라지만 여전히 우리의 사고는 20~30년 전 그때나 별반 차이가 없다. 여아 낙태라는 공공연한 비밀이 집단적으로 나타나는 현장은 바로 학교다. 현재 한 반 여아 대 남아의 비율은 1:2 더블 스코어까지 올라가 있다. 오죽 했으면 ‘남아선호 부모세대, 짝꿍 없는 우리세대’라는 표어까지 나왔으랴.

여성계는 한 해 평균 전체 여자 태아의 9%에 해당하는 3만 명이 모태 속에서 사망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생명의 신성함보다 고추의 위대함을 앞세우는 사회가 저지르는 집단살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적인 성비는 1백5~1백6이지만 범띠해인 지난해 대구의 출생성비는 1백17이었다. 지난 97년 전국적으로 셋째 자녀 출생성비는 1백34, 넷째는 1백55.9. 이런 수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남아선호에 대한 예는 주위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하물며 딸을 가진 어머니조차 딸에게 딸보다는 아들을 먼저 낳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던가. 여성 국회의원이 나오고, 대학에 여성학에 반(反)한 남성학 강의가 개설됐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은 딸 골라 죽이기가 저질러지고 있는 야만의 땅 가운데 하나다.

이렇게 해서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된 한국의 딸들이라고 해서 어려움이 끝난 것은 아니다. 고물고물한 고추가 달리지 않아 서운해 하는 할머니의 눈빛을 슬쩍 비키고, 오빠와는 밥상의 격을 달리해 주는 부모의 푸대접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될 쯤 사회의 편견이 시작된다.

여자의 과거는 용서돼도, 못생긴 건 용서가 안 된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여자를 판단하는 최고 잣대인 미(美)에 의해 평가받는 데 익숙해진다. 예쁜 여자가 공부 잘하면 공부까지 잘하는 여자가 되지만, 못생긴 여자가 공부 잘하면 지독한 년이 된다. 여자라서 정리해고 1순위에 오르는 경제권 내 자리매김도 당연시 된다.

여자라서 성욕은 억제해야 한다. 아니면 오양처럼 광폭한 마녀사냥에 개박살이 나는 걸 감수하든지(1백50만 윤락여성을 먹여 살리는 것은 남성들이다!). 사회편견에 싫은 기색을 비치거나 반대 발언을 하면 싸움닭 취급을 받기 일쑤다.

어찌어찌 해서 결혼을 하면,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고부갈등과 가사·육아와의 전쟁이 전개된다. 사회가 급속도로 발전해 왔다면 가부장적인 가족제도는 질적으로 변화하지 못한 탓에 아직도 우리의 가족 내에는 고부갈등이 엄연히 존재한다. 예전과 달리 그 전개양상과 내용의 차이가 있을 뿐. IMF가 터지고는 아내들에게 돈버는 동시에 남편들 기까지 살려 주기를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다. 직장 내 여성(아내)들은 다른 남성들의 밥그릇을 뺏는다는 비난까지 감수하며 슈퍼우먼 역할을 하고 있다.

자, 이래도 한국은 여자가 살기 편한 나라인가?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편견과 차별이라는 벽에 대항해 홀로 뛰는 마라톤 같은 외로운 투쟁의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긴 마라톤 인생의 3분의 1쯤에 서 있다. 앞으로 남은 레이스는 어떤 작전과 계획으로 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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